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우려했던 일이다. 150여 명 순례단이 우중 행군을 해야할 수도 있는 상황.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걷기조 앞과 뒤에 붙은 지원팀이 우비부터 날랐다. 함양 용추 계곡이 있는 인근 캠핑장에서 하루를 보낸 순례단이 이제 막 8일차 일정을 시작한 10월8일. 출발 한 지 1시간이 채 되지 않는 시점에서 순례단 발걸음이 멈춰 섰다.
곧 폭우라도 쏟아질 듯한 흐린 하늘 아래 새벽 어둠 속 차로 옆에 잠시 멈춰 서서 우비를 입는 순례단 얼굴에 일순간 걱정이 일렁인다. 순례단이 우비를 입는 동안 상월선원 만행결사 회주 자승스님은 말이 없다. 회주 스님도 우비를 입어야하지 않겠냐는 질문에 “비가 오면 맞으면 되지 뭐”라는 한마디 말 뿐이다.
폭우로 온 몸이 젖어도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순례단 의중이 읽혔을까. 함양 안의면과 거창 마리면을 넘나드는 고갯길 바래기재를 넘어가는 내내 다행히 흐린 구름이 빗방울을 묶었다. 비가 멈춘 맑은 하늘 아래 순례단은 대대리와 하고리를 무사히 넘었다.
변덕스러운 날씨만큼 순례단을 괴롭히는 건 용변 문제다. 장시간 걸어야하는 순례단에겐 화장실 하나 없는 인도와 자전거길, 차도를 넘나드는 순례길은 단지 불편하기만한 것이 아니라 걷기에도 지장을 준다. 나 혼자 때문에 순례 전체 대중에게 피해를 줄 수 없으니 목이 말라도 목을 축이는 수준에서 물을 마시고 당장 급해도 일단은 참는다.
이날도 장장 약 30km 장거리 걷기 일정이 예정된 상황. 거창군 가조면과 남하면 둔마리를 연결하는 고갯길 살피재를 올라 한참을 걷던 순례단 앞에 반가운 게 보였다. 해인사와 거창군이 순례단을 위해 이동식 화장실을 마련한 것. 많은 이들의 도움 끝에 긴 시간 불편을 참던 순례단이 다시 한번 재정비를 마친 후 고갯길을 넘는다.
고갯길을 넘은 순례단을 맞이한 건 따뜻한 도시락이다. 7시간의 행선이 있던 오전 내내 삶은 계란 2개와 바나나 1개로 겨우 허기를 채운 순례단에겐 단비나 다름 없다. 배불리 먹기 보단 조금 부족해도 걷기 딱 좋은 만큼 아침 공양을 마친 순례단에게 순례 막바지를 앞두고 먹는 점심 공양은 기다림 만큼 맛도 좋다.
든든히 배를 채운 천리순례단이 마지막 코스를 남겨두고 다시금 발길을 재촉했다. 걷기 중간 중간 휴식 시간이 될 때마다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짓무른 두 발을 쥐어 잡던 백금선 참가자는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긴 하지만 그 순간의 아픔을 참고 걸음을 내딛다 보면 또 저만치 가게 된다”며 “진언을 외며 화두를 들고 가다보면 우리가 길 위를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는 곳이 곧 한국불교 새 길을 만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자는 것 먹는 것 입는 것 무엇 하나 편치만은 않은 순례 생활. 낯선 환경과 마주하며 하루에도 몇 번씩 겪지 않아도 될 불평과 마주해야하는 순례단의 하루가 또 다시 저물어 간다. 평소 우리네 삶이라면 일기일경(一機一境)에 일희일비(一喜一悲)했을 하루. 힘든일이 있으면 견디고, 화나는 일이 있으면 참고, 절망 앞에선 희망을 기다리며 감인대(堪忍待)를 다시금 마음에 새긴다.
천리순례단은 이날 함양 대대리에서 거창 동례리까지 약 30km를 걸었다. 현재까지 누적 이동 거리 총196km. 순례 9일차는 거창을 지나 해인사에 들어선다.
거창=박봉영 기자 bypark@ibulgyo.com
이경민 기자 kylee@ibulgyo.com
사진=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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