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햇살 아래 끝이 보이지 않는 오르막을 걷는 순례단 어깨가 힘겹다. 삼보사찰 천리순례 6일차인 10월6일. 새벽4시 숙소를 출발해 실상사 참배를 마친 순례단이 지리산 금계 마을을 지나 경남 오도재를 향해 오르는 길. 이번 일정 중 최대 난코스로 꼽히는 구간을 지나는 순례단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아스팔트 지면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는 이중고나 다름없다. 매연과 유독가스를 코 앞에서 뿜어내며 달리는 자동차는 순례단을 위협하고 문명의 이기는 잠잠했던 순례단 마음까지 재차 헤집는다.
이른 새벽 일어나 6시간 내 묵언 행선하고 있는 순례단 몸은 땀으로 이미 흥건히 젖었다. 이따금 쌩쌩 지나가는 자동차 외에 한적함이 가득한 도로엔 거친 숨소리만 들릴 뿐이다. 체력은 일찍이 한계점에 다다랐다. 그럼에도 버틸 힘이 되는 건 간간히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앞서가는 순례 도반의 멈추지 않는 발걸음, 그리고 가야 한다는 일념 하나다. 어느새 높이 773m 오도재 입성을 알리는 ‘지리산제일문’이 이보다 반가울 수 없다.
현판을 지나면 오도재 끝이 보인다. 오도재는 함양 마천면 구양리와 구룡리 사이를 연결하는 고갯길이다. 산을 오르는 꼬불꼬불한 모습이 독특하면서도 절경을 이루고 있어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으로 꼽힌다. 삼봉산과 법화산이 만나는 지리산의 마지막 쉼터로, 마천면 삼정리 영원사 도솔암에서 수도하던 청매 인오조사가 이곳을 오가며 깨달음을 얻었다 해서 오도(悟道)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서산대사, 사명대사, 청매대사 등 승군이 머물렀던 곳으로 영남학파 종조인 김종직 선생을 비롯해 많은 시인 묵객들이 걸음을 멈추고 이곳에서 지리산을 노래했다.
까다로운 이름만큼 오도재는 쉽사리 입성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도재에 이르는 길은 오르막길이 연속되는 구간으로 평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고되다. 그럼에도 가파른 경사면을 오로지 두 발에 의지해 오르는 순례단 의지도 만만치 만은 않다. 어머니를 잃고 방황하던 중 천리순례 소식을 듣고 개별 참가 신청을 냈다는 안응연(62) 씨는 가운데 행렬에 서서 부단히도 걸었다.
뙤약볕 고생길에도 환희심에 힘든 줄도 몰랐다고 한 안 씨는 “어머니 49재를 지내자마자 순례를 시작했는데 걸으면 걸을수록 아픔이 가시고 자가 치유가 되는 기분”이라며 “친구들과의 모임이나 맛있는 것을 먹는 것도 좋지만 내게는 순례 자체가 ‘극복’의 의미를 지닌다”고 했다. 안 씨는 “걷다보면 개인적 아픔도, 코로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도 어느새 잊어버리고 만다”며 “삼보사찰 천리순례라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찾을 것 없이 내가 느끼고 있는 이 자체가 코로나 극복이자 대중 포교”라고 했다.
순례단이 오르막 마지막 구간인 오도재 전망대에 도착하자 일찌감치 먼저 나와 이를 기다리고 있던 해인사 사부대중이 순례단을 환대로 맞았다. 이번 순례 주제인 ‘삼보’ 가운데 한 곳이기도 한 법보종찰 해인사 주지 현응스님을 비롯해 10여 명 본말사 주지 스님, 서춘수 함양군수 등은 조망대 아래까지 버선발로 마중했다. 오르막 내리막 곳곳엔 자승스님이 상월선원 천막결사 당시 남긴 게송, ‘땅이 노래하고 하늘이 춤추니 수미산이 사바세계로다’가 써진 현수막이 걸렸다.
현응스님은 “큰 고비인 지리산도 무탈하게 넘은 만큼 해인사까지의 거리인 80km도 아무 탈 없이 도착할 것이라 기대한다”며 “순례단 걸음마다 연꽃이 피어난다는 정진력으로 공덕을 이루시길 바란다”고 했다. 현응스님은 순례단이 지나는 함양불교사암연합회의 적극적 협조를 약속했다. 서춘수 군수도 “함양을 지나는 동안 큰 불편없이 지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이번 순례 일정 중 가장 힘든 구간 중 하나로 꼽히는 오도재를 부상자 없이 무사히 넘은 순례단은 오도재 전망대에서 지리산 주능선을 바라보며 잠시나마 휴식을 취했다. 왼쪽 천왕봉에서 오른쪽 반야봉까지 27㎞에 이르는 고봉준령이 한눈에 피로를 씻겼다. 여기서부터 이날 숙영지까진 2km 내리막. 한결 가벼운 모습으로 다시 떠날 채비를 하는 순례단 뒤로 깨달음을 얻었다는 청매선사 십이각시가 눈에 들었다.
청매선사는 전쟁으로 불에 탄 가람과 땅에 떨어진 승풍을 바로잡고 어떻게 하면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해날 수 있을까 깊이 고뇌하며 목숨 건 수행에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갖가지 형상이 분별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소유하지도 않으며 그대로 나타내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 첫 번째 깨달음의 오도송이 십이각시(十二覺時)다. “깨달음은 깨닫는 것도, 깨닫지 않는 것도 아니니, 깨달음 자체가 깨달음 없어, 깨달음을 깨닫는 것이네, 깨달음을 깨닫는다는 것은, 깨달음을 깨닫는 것이 아니니, 어찌 홀로 참깨달음이라 이름하리오.”
“이 길 끝에서 저마다의 선지식을 찾을 수 있길”
■ 삼보사찰 천리순례 총도감 호산스님
“새벽 길을 걸으며 마주하는 하늘의 별, 어느 먼 곳에서 은은히 들려오는 범종소리, 찬찬히 익어가는 감나무의 감을 바라볼 때... 매 순간 순간이 하나의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오직 자기 두 발로 꿋꿋이 걸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동의 순간들입니다. 그 순간들이 모두 모여 이 길 끝엔 저마다의 선지식을 찾아 밝은 길로 나아갈 수 있길 기대합니다.”
호산스님은 지난해 자비순례에 이어 이번 천리순례 총도감을 맡았다. 걷기 조를 비롯해 이를 지원하는 지원팀 등 순례단 전체를 총괄하는 역할로 직위만큼 책임도 막중하다. 이번 삼보사찰 순례가 특별한 테마를 갖고 진행되는 만큼 지난 자비순례와는 또 다른 변수가 매일 긴장을 늦출 수 없게 한다. 그럼에도 호산스님은 “행복한 발걸음”이라고 했다.
“지난해 순례와는 많이 다릅니다. 부처님이 계시고, 그 가르침이 있고, 가르침을 따르는 수행자가 있는 ‘삼보사찰’을 향해 사부대중이 직접 두 발로 10여 개 사찰을 찾습니다. 사찰을 참배하고 불전할 때마다 불심은 깊어지겠지요. 재가 신도들은 물론이고 스님도 마찬가집니다. 세계평화를 발원하는 스님도 있고 우리 사찰 신도들 축원을 올려주는 소임자 스님도 있어요. 사부대중을 막론하고 그런 모습들이 이 순례를 통해 만들어져 가고 있으니 힘은 들어도 행복한 발걸음일 뿐입니다.”
423km에 이르는 대장정이 진행되는 동안 호산스님의 바람은 단 하나다. 호산스님은 “순례단이 반드시 좋은 말씀과 훌륭한 법문 만은 아니더라도 길 위에서 저마다의 선지식을 찾을 수 있길 바란다”며 “이미 100km 구간을 지나온 만큼 충분히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총도감 스님에게 가장 힘이 되는 건 무엇보다 회주 자승스님. 호산스님은 “‘우리가 가는 길이 옳은 길이면 그대로 가야한다’는 자승스님 말 한마디에 매 고비마다 위기를 넘기고 있다”며 “어렵고 힘들어도 중심을 잡아주는 회주 스님을 뒷받침하며 순례가 원만 회향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함께라면 고행도 여행이다”
■ 삼보사찰 천리순례단장 원명스님
순례단장 원명스님은 순례단에서 가장 일찍 일어나고 가장 늦게 자는 사람 중 하나다. 순례단 기상 알림과 새벽 체조부터 다음날 일정을 조율하고 마지막 취침에 들 때까지 원명스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순례 4일차부터 걷기 조 선두 그룹을 수정해 반영하고 혼동이 없도록 직접 마이크를 잡고 하루 내 일정 안내를 한다.
원명스님은 “어떤 상황이 와도 상월선원 결사 정신을 잇는 삼보사찰 천리순례 취지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상황을 조율하려 한다”며 “어제부터 매번 선두 그룹을 바꾸고 있는 건 속도 때문이라기 보다는 비구와 비구니, 우바이와 우바새에 분별을 두지 않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이번 삼보사찰 천리순례 목적이 자기 수행과 대중 화합인 만큼 그 가치에 중심축을 두겠다는 의지다.
지난해 평지를 걷던 것과 달리 이번 순례엔 오르막 내리막이 반복되는 데다 극심한 일교차로 체력적 소모도 적지 않은 상황. 원명스님은 “매일 텐트에서 잠을 자고 씻지도 못하는 불편한 상황들과 마주하더라도 순례 참가자 모두 고통이 아닌 수행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아 감사하다”며 “그 수행과 간절한 염원들이 모여 순례가 끝나는 날까지 다치는 이 없도록 무사히 회향하기만 바랄뿐”이라고 했다. 원명스님은 마지막으로 “어려움이 있더라도 함께 한다면 고행길이 아닌 여행길이 될 것”이라며 “부처님 제자 답게 고행길을 즐겁게 걸어가자”고 했다.
함양=박봉영 기자 bypark@ibulgyo.com
이경민 기자 kylee@ibulgyo.com
사진=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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