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스님 최초 탄생한 바이샬리 순례
첫 여성 출가지 대림정사 터 참배하기도
3.1절 기념 태극기와 인도 국기 들고 행선

상월결사 인도순례가 3월1일 21일 차를 맞았다. 여러 의미가 겹치는 날이었다. 국가적으로는 3.1 절이다. 순례단은 태극기와 인도 국기를 양손에 들었다. 순례가 절반을 넘어가는, 반결제(半結制) 날이다. 원력을 세우고도 코로나 때문에 늦추다 3년 만에 성사된 순례다. 초반기 환자가 속출하는 등 어려움이 많았는데, 어느새 절반을 지나간다. 장염 감기 무릎 발목 등 발걸음을 더디게 했던 상처는 거의 아물어서 다들 걸음이 꽤 빨라졌다.
가장 큰 의미는 비구니 스님이 최초 탄생한 바이샬리 순례일이라는 점이다. 순례단도 특별한 이벤트를 마련했다. 아침 공양 후 불상 이운을 비구니스님들이 도맡았다.
가장 먼저 비구니 조인 제6조 조장 묘수스님이 나섰다. 이어서 덕진스님, 지해스님, 선해스님, 원해스님, 원준스님, 정혜스님, 해인스님, 도연스님 순으로 진행했다. 품에 안을 수 있을 까 걱정은 기우였다. 어디서 힘이 났는지 맨 몸으로 걸을 때 보다 발걸음이 더 빨라졌다. 해인스님은 “여성 출가를 허락해주신 바이샬리에서 부처님 이운을 해서 더 뜻 깊었다. 과연 잘 걸을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막상 제가 걸으니까 시간을 헤아릴 수 없었다. 한 걸음 한 걸음 화두를 잡고 연꽃 위를 걷는 듯 ,부처님 제자처럼 걸으려 했던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도연스님은 “가슴에 안는 순간 울컥했다. 부처님을 안고 가는데 아무런 무게감이 없었다. 시간이 너무 짧게 느껴져 다시 하고 싶어졌다. 짧은 시간이지만 환희로운 시간이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숙영지 하지푸르를 새벽에 출발해 랄간지 샤흐둘라푸르 샤흐자한푸르를 지났다. 부처님께서 라즈기르에서 바이샬리를 오가시던 길을 따라 갔다. 25km를 걸었다. 행선은 근본사리탑 터에서 회향했다. 부처님 사리를 8개국으로 배분할 때 바이샬리의 리차비 사람들이 받아왔다는 그 사리다. 사리용기는 파트나 박물관에 보관하고 이곳은 터만 남았다.
점심 공양 후 첫 여성 출가지 대림정사 터를 찾았다. 불교 교단을 이루는 4부 중은 남성 출가자인 비구가 가장 먼저, 그리고 우바새 우바이 등 남녀 재가신도, 부처님이 출가 전 낳은 아들인 라훌라가 출가하면서 사미가 생긴다. 여성 출가자인 비구니는 그 보다 20년 뒤에 받아들인다. 그만큼 인도 사회에서 여성출가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부처님은 “4개의 강이 바다로 흘러가 하나가 되듯, 4개의 계급은 불법 안에서 하나”라고 말씀 하셨다. 실제로 승단 안에는 계급 차별을 두지 않았다. 브라만 최고 계급 출신 마하가섭도 있었고 이발사 출신 우파리 존자도 있었다. 그런데도 여성에 대해서만은 부처님께서 출가를 허락하지 않으셨다.
불법(佛法)은 인종 민족 성별 직업 등 그 어떤 조건으로도 차별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부처님께서는 여성 출가를 완강하게 불허했다. 부처님 고향 카필라바스투에서 부처님을 키운, 석가족 왕비이자 부처님 어머니이며 이모인 마하파자파티 고따미가 출가를 간곡하게 요청했다. 인도는 한국의 조선시대 처럼 여성에게는 삼종지도(三從之道)가 있었다. 여성은 결혼 전에는 아버지, 결혼을 하면 남편, 남편 사후에는 아들을 따라야 했다. 최고의 민주국가라는 미국 조차 흑인 남성 참정권 보다 백인 여성 참정권이 늦게 도입될 정도로 인종 차별 보다 여성 차별이 더 심각하고 완고했다.
부처님 당시 석가족은 전쟁이나 출가로 남성 없는 여성이 수없이 많았다. 부처님의 어머니 고따미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남성의 종속물로만 존재했던 여성들이 의지할 곳은 그 어떤 차별도 인정하지 않았던 부처님 교단 밖에 없었다. 카필라바스투에서 2번이나 청했지만 결국 거절당하고 부처님은 바이샬리로 돌아갔다.
그런데 마하파자파티 고따미는 석가족 여인 500명을 대동하고 맨발로 400km 거리를 걸어 바이샬리로 왔다. 여인들은 모두 삭발을 하고 노란 가사를 둘렀다. 고따미는 발이 퉁퉁 부어올랐고, 두 팔과 두 다리는 온통 먼지투성이였다.
아난다 존자가 부처님께 간곡하게 출가를 요청했지만 또 거절했다. 이에 아난다 존자는 이렇게 여쭈었다.
“여자도 여래가 선포하신 법과 율 안으로 출가하면 해탈을 실현할 수 있습니까?”
부처님은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승낙을 얻어냈다.
그러나 인도를 비롯한 남방은 끝내 이 여성 출가제도를 이어가지 못했다. 힌두교 문화에 들어있던 ‘여성불성불론’을 불교에 끌어들여 여성은 금생에 복을 지어 내생에 남성 몸을 받아 태어나야 한다는 비불교적 논리를 들이대며 결국 부처님 입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비구니계를 없앤다. 그리고 지금까지 남방불교권에는 비구니 계단이 없다.
상월결사 인도 순례단은 사부중으로 이루어졌다. 비구니스님 11명이 함께 참여한다. 한국비구니 교단은 세계 최대 규모며 활동이 가장 활발하다. 일부 차별 조항이 있지만 문화나 의식 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물론 완전한 평등으로 가기 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한국불교 비구니 교단이 이처럼 성장한 배경은 근대부터 비구승들이 비구니들을 적극 교육하고 비구와 차별 없이 지도한 덕분이다. 비구니스님들도 계정혜 삼학을 철저하게 닦고 후학 교육에 매진하고 가람을 수호하며 세계 최고 비구니 교단을 일구었다. 종단 발전에 이바지한 공덕도 크다. 비구 비구니 사부대중이 모두 힘을 합치고 염원한 결과다.

여성 출가 공덕을 기린 탑과 아쇼카 대왕 석주가 완벽한 모습으로 서 있다. 그 앞에 원숭이가 부처님을 위해 팠다고 전하는 연못도 조성돼 있다. 비구니스님들이 대림정사 주변을 둘러보며 감회에 젖었다. 6조 조장 묘수스님은 “한국 비구니 교단은 교학 학술적으로 가장 우수하며 비구니가 비구니에게 계를 주는 유일한 나라다. 이는 모두 옛 스님들을 잘 모신 은덕이라는 어른 스님들 말씀이 생각난다”며 “여기에 오게 된 것도 저의 복이 아니라 옛날 오랫동안 은덕과 한국에서 바쁘게 살고 있는 스님들 덕분임을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선해스님은 “비구니 교단이 형성되는 뜻 깊은 자리에서 비구니스님들이 사부대중과 함께 오게 된 것 더 깊은 인연이라 생각하며 한국의 비구니스님들과 더 따뜻하고 더 나누는 불교로 발전하도록 노력하는 비구니 교단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바이샬리는 여성 출가자를 받아들인 데서 보듯 정치적으로 진보적이며 문화 사상적으로 열린 나라였다. 왕정 국가 시대였던 부처님 당시 바이샬리는 공화제를 택한 유일한 나라였다. 공화제를 택한 인도는 새 의회가 개원하면 공화제 시원인 바이샬리의 근본사리탑 터 앞 연못물을 성수로 사용하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상좌부와 대중부로 분열할 때 진보적인 대중부 편에 섰으며, 재가자를 보살 보다 더 우위에 둘 정도로 파격적인 교설을 지닌 <유마경>의 무대이다. 이처럼 자유롭고 열린 바이샬리를 부처님은 사랑했다. 불교가 지향하는 나라, 부처님이 만들고자 하는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상월결사 인도 순례를 이끄는 회주 자승스님도 총무원장 재직 시 ‘차별금지법’ 제정에 종단적 힘을 쏟고, 노동자 문제나 사회 갈등 해결, 세월호 진상규명 등 억울한 이들의 아픔을 헤아리고 풀어주기 위해 노력했었다. 순례단에게 바이샬리가 더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순례단은 3월2일 22일 차 부터는 부처님 열반의 길을 따라 간다. 순례 기간 중 최장 기간 6일간을 야외에서 취침하는 힘든 길이다. 20일 차로 순례단이 걸어온 길은 모두 513km다.





인도 비하르 주=박부영 선임기자 chisan@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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