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빈드푸르, 키다르푸르, 네그람푸르를 거쳐 다르파리에 도착

행선하는 순례단.
행선하는 순례단.

3월2일 새벽 순례단 22일 차 행선에 나섰다. 바이샬리를 떠나 쿠시나가라로 가는 길이다. 부처님의 마지막 길, ‘열반의 길’이다.

순례단은 21일 동안 초전법륜지 사르나트 녹야원을 출발하여, 성도지 보드가야, 6년 고행지 전정각산, 교단을 이룬 라즈기르 영축산을 거쳐, 첫 여성 출가지 바이샬리까지 500km 넘는 길을 걸었다.

지금까지 지나온 길은 부처님께서 중생의 행복을 위한 기쁨의 길, 환희의 순간이었다. 초전법륜, 성도, 교단 성립, 첫 사찰, 최초 비구니, 모두 기쁨이었다. 그러나 바이샬리에서 북으로 가는 길은 슬프다. 완전한 소멸이 아닌 ‘반열반’임을 알지만 중생심으로는 슬픔과 비탄을 감추지 못한다.

부처님께서 80세 되던 해 영축산에서 내려와 죽림정사 파트나를 거쳐 바이샬리로 오셨다. 그해 이 지역에 가뭄이 크게 들었다. 주민들도 가뭄으로 먹을 것이 부족하므로 500명의 비구에게 모두 흩어지라 하시고 당신도 아난다 존자만 데리고 벨루바 마을에 가셨다. 우안거를 나는데 많이 편찮으셨다. 아난다는 혹시 안거 중에 열반하시면 어떡하나 걱정했지만 부처님께서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므로 열반을 안 하실거라고 스스로 위안했다 부처님께서 아난다의 마음을 알고 지금 열반에 들면 제자들이 불편하겠다 여겨 수명을 더 연장해서 안거를 넘겼다. 안거가 끝나자 대림정사 ‘중각당’으로 다들 모이게 했다. 그리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불상 이운하는 선광스님 모습.
불상 이운하는 선광스님 모습.

“나는 안과 밖이 없이 법을 설하였습니다. 세상의 어떤 스승은 법을 주먹 속에 감추며 마지막까지 제자들의 복종과 이양을 바랍니다. 그러나 여래가 가르친 법들에는 ‘스승의 주먹’과 같은 것이 따로 없습니다.” 이어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러야 합니다.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법을 등불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러야 합니다.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자등명 자귀의, 법등명 법귀의’는 이렇게 바이샬리에서 탄생했다. 부처님께서 끝까지 우리들을 위해 남겨주신 참으로 고귀한 선물이다. 나를 등불로 삼고 나에게 귀의하라 하지 않으신 유일한 스승, ‘나 아닌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며 복종을 강요하지 않으신 위대한 성인. 인류 역사에 이런 스승, 이같은 성인은 없었다.

부처님께서는 3개월 후 열반에 드실 것이라 선언하시고 북으로 떠나셨다. 늘 오가던 길이었다. 35세에 성도 하신 후 45년간 영축산 죽림정사에 머무시며 바이샬리를 거쳐 고향인 카필라바스투, 쉬라바스티의 기원정사를 오가셨다. 영축산을 떠날 때만 해도 여느 전법의 길과 다름 없으리라 여겼는데, 마지막 길이 되고 말았다.

‘늙은 코끼리가 고개를 돌리듯이’ 뒤를 돌아보며 “내가 이 바이샬리를 보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구나”는 말을 남기시고 바이샬리를 떠나셨다.

순례단도 부처님의 길을 따라 쿠시나가라를 향해 길을 나섰다. 병이 드신 여든 노구의 부처님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순례단 앞에도 힘든 길이 기다리고 있다. 쿠시나가라에 도착할 동안 6일을 야외에서 지내야 한다. 순례단은 그동안 길게는 5일, 짧게는 2일을 야외에서 자고 호텔에서 밀린 빨래와 샤워 등을 하며 걸어왔다. 매번 흙먼지 속에 밤새 울려 퍼지는 결혼 축가 소리와 폭죽 소음에 잠 못 이루는 야외 취침이었다. 이번에는 최장 6일을 보낸다.

가장 큰 고역은 화장실 사용이다. 물티슈는 절대 안되고, 휴지도 가급적 사용을 금하되 어쩔 수 없이 쓸 때는 봉지에 따로 모으는데 최상은 인도 주민들처럼 물로 씻는 것이다. 왼손으로 처리하고 오른손으로 밥을 먹는 인도식 손 사용법은 마음 하나 내려놓으면 되는데, 참 힘들다. 그래서 야외 생활이 고달프다. 쿠시나가라에 도착하기 전 마음 내려놓는 순례객도 많이 나올 것이다.

박수 치고 합장하는 순례단과 현지인들.
박수 치고 합장하는 순례단과 현지인들.

거의 처음으로 깨끗한 길을 지나온 것은 다행이다. 새벽 행선 때 마을 골목을 지나쳐 왔지만 험한 길은 그리 길지 않았다. 도로는 깨끗했다. 달리는 차도 많지 않았다. 아주 모처럼 편안한 행선이었다며 다들 좋아했다. 이처럼 작은 것에도 행복해한다. 행복은 기다려 나중에 받는 것도, 크고 거창한 것도 아닌 지금 당장 작은 데 있음을 가르쳐 주는 순례 길이다.

22일 차 순례길은 바이샬리를 떠나 고빈드푸르, 키다르푸르, 네그람푸르를 거쳐 다르파리에 도착했다. 26km를 걸었다. 누적 거리 541km, 서울 부산 거리가 477km이니 훌쩍 넘어선 셈이다.

22일 차 묵는 다르파리 역시 다른 숙영지처럼 흙먼지 투성이다. 가뜩이나 야영은 고행인데 기증 받은 텐트까지 말썽이다. 순례를 시작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거의 모든 텐트가 내려앉는 바람에 텐트 수리가 가장 큰 일이 되고 말았다. 아무리 고쳐도 계속 무너지고 부러지는 텐트 때문에 결국 한국에서 삼보사찰 순례 때 쓰던 텐트를 급히 공수받기로 했다. 선물은 내가 가장 좋아하고 아끼는 것을 주는 선한 행위다. 순례단은 30여km를 걸어 지친 몸을 이끌고 숙영지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맞는 무너진 텐트를 볼 때마다 또 하나 소중한 가르침, 선물의 진정한 의미를 배운다.

 

상월결사 인도순례 22일 차인 3월2일 첫 기자간담회를 갖고 이야기 하는 회주 자승스님 모습.
상월결사 인도순례 22일 차인 3월2일 첫 기자간담회를 갖고 이야기 하는 회주 자승스님 모습.

 

“차별 없는 평등한 순례 언론도 동참”

회주 자승스님 기자간담회 통해 당부

상월결사 인도 순례단을 이끄는 회주 자승스님이 순례 후 처음으로 기자간담회를 열고 “순례단 모두 평등한 동참자이므로 언론에서 차별 없이 보도해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22일 차 행선이 끝난 후 자승스님은 순례단과 동행하며 보도하는 언론의 노고에 깊이 감사한다며 “우리 순례단에는 비구 비구니 스님 뿐만 아니라 우바새 우바이 들도 함께 하는 사부대중 순례다. 이 분들의 순례 동참 원력 또한 소중한데 스님들에 비해 많이 다뤄지지 않는 것 같다”며 “언론에서 차별 없이 다뤄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스님은 또 “스님들 중에도 이름 없는 분들이 많이 오셨다”며 “이분들의 순례 동참 동기, 소감 등도 많이 실어주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스님은 “차별 없고 평등한 순례 답게 언론도 그 취지를 잘 살려주기를 당부한다”고 거듭강조했다.

학생들 모습.
학생들 모습.
행선하는 회주 스님.
행선하는 회주 스님.
불상 이운하는 종호스님.
불상 이운하는 종호스님.
골목길을 지나가고 있는 순례단. 
쉼없는 행선. 
현지인들을 향해 합장 반배로 인사하는 회주 스님.
불상을 이운하는 심우스님.
불상을 이운하는 심우스님.
이날 회향 축원을 하고 있는 동명스님 모습.
행선에 동참한 염소
행선에 동참한 염소

인도 비하르주=박부영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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