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공양 올린 춘다의 마을 지나 마지막 목욕한 카쿠타 강 거쳐 다비탑 도달

3월8일 새벽 예불을 마치고 출발한 순례단은 5.5km를 걷고 1차 휴식을 취했다. 파질나가르, 경전에 나오는 파바마을이다. 춘다의 집이 있었던 바로 그 곳이다. 순례단은 ‘춘다의 마을’에서 400m 떨어진 길 가장자리에서 1차 휴식을 취했다. 오전 3시30분 경, ‘춘다의 마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해가 떠 있는 동안만 문을 연다. 특별 방문을 요청했지만 이날부터 우리나라의 정월대보름에 해당하는 인도 최대 명절이 시작돼 마을 옆을 지나가는 것으로 만족했다.
순례단은 더 이상 바람이 없었다. 곁을 걸어서 지나는 것 만으로도 충분했다. 부처님 열반 길을 따라 나설 때만 해도 슬프고 복잡 미묘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열반지가 다가오면서 마음이 변했다. 부처님이 가신 그 길을 그대로 제 발로 걷는 이 자체가 믿을 수 없고 부처님 가피를 받은 듯 환희에 넘쳤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나? 숱하게 성지를 순례했지만 부처님 다니신 길을, 부처님 제자들처럼 대중이 함께, 일찍이 불교사에 없었던 이 희유한 역사에 주인공이 되어 동참한다는 사실에 다들 눈물 흘렸다. 함께 걷고 야영하며 함께 고생하는 대중에게 고마워했다. 환희와 감사는 순례를 이끌어준 상월결사 회주 스님에 대한 감사 존경 찬탄으로 이어졌다. 처음에 그 인사는 의례적이었다가 이제는 진심에서 우러나왔다.
파바마을 대장장이 아들 춘다는 부처님께서 마을에 도착해서 그의 망고 동산에 머물고 계신다는 말을 듣고 달려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았다. 설법을 듣고 감동하여 다음 날 부처님과 제자들에게 공양을 올렸다. 공양 중에는 ‘수카라 맛다바(sukara maddava)’라는 요리가 있었다. 이를 본 부처님은 “춘다야, 이 수카라 맛다바는 모두 내 앞으로 가져오도록 하고 비구들에게는 다른 것을 주도록 하라”라고 말씀하셨다. 부처님은 그 요리를 혼자만 드시고 남은 것은 구덩이를 파고 묻도록 했다. “이 세상 가운데서 이것을 먹더라도 완전하게 소화할 수 있는 것은 악마와 범천 신들과 인간들 사문과 바라문을 포함하더라도 여래 이외에는 없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수카라 맛다바에 대해서는 연한 돼지고기, 버섯요리, 토란 등 다양하다. 아마 가난한 대장장이 아들 춘다가 그것도 가뭄에 수많은 대중에게 공양을 마련했다면 고기는 아니고, 주변 밭에서 나는 식물 종류였을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그 음식이 상했음을 알고 다른 사람에게는 주지 못하게 하셨다. 부처님만 드신 것은 공양 올린 춘다를 위해서였다. 재료가 상한 것을 알고 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했으니 못 먹겠다고 했으면 춘다가 얼마나 상심할까? 부처님은 여래는 소화할 수 있다고 하셨지만 결국 열반에 이르렀다.
부처님께서 상한 음식을 춘다에게 양해를 구하고 안 먹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안타까움도 든다. 그러나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걸식을 하되 “주는 대로 먹어라” 하셨다. 다만 병든 비구에 대해서만 일부 열외를 인정했다. 당신은 그것이 비록 상한 음식이라 해도 당신이 제자들에게 말했던 율을 지켰다.
공양이 끝나고 춘다를 위해 설법을 해주신 뒤 몸이 불편했지만 대중을 이끌고 북쪽으로 가셨다. 순례단도 ‘춘다의 마을’ 곁에서 잠시 쉰 뒤 부처님이 가셨던 길을 따라 다시 북으로 갔다. 4km를 더 걸어 두 번째 휴식을 취했다.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와 제자들과 함께 춘다의 마을을 나와 한참을 북으로 걸었지만 결국 상한 음식이 탈을 내고 말았다. 배가 몹시 아프다며 쉬어가자고 하셨는데 피가 섞여 나왔다. 급성 식중독이었다.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여, 자리를 깔아라 피곤하니 좀 쉬었다 가자”고 하셨다. 그리고 목이 몹시 마르다고 물을 달라고 하셨다. 그러자 아난다는 조금만 더 가면 카쿠타 강이 나온다며 거기서 쉬시자고 한다. 카쿠타 강에 이르러 아난다에게 물을 떠 오라고 하자 아난다는 “방금 수레 500대가 지나가 물이 탁하다”며 기다렸다 떠 오겠다고 했다. 부처님께서 3번이나 말씀하신 뒤에야 갔는데 부처님 말씀대로 물은 맑게 바뀌어 있었다. 카쿠타 강에서 물을 마시고 목욕 하시고 나무 아래 쉬면서 기운을 차리셨다.
순례단은 4km를 더 걸었다. 춘다의 마을에서 8km를 온 셈이다. 아직 시간은 해가 뜨기 전인 오전 5시를 약간 넘기고 있었다. 인도 미얀마 스님을 비롯한 신도들이 나와서 꽃을 공양하며 환영했다. 카쿠타 강으로 내려갔다.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목욕하셨던 그 강이다. 강이라고 하기에는 폭이 좁았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쓰레기로 방치돼 있던 성지는 깨끗하게 정비돼 있었다. 부처님께서 목욕하셨던 강까지 계단이 놓여 있고 불상을 모셨다. 순례단은 이곳에서 아침 공양을 했다. 공양 중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졌다. 순례 28일 만에 처음 보는 비다. 인도에서는 건기에 비가 오면 길조(吉兆)라고 한다. 부처님께서 한국에서 온 순례단을 반겨 주고 가피를 내려주시는 듯 했다. 순례단은 즐겁게 비를 맞았다.
카쿠타 강변에 이른 부처님께서는 춘다가 걱정되셨는지 불러 위로했다. “춘다는 여래를 위한 마지막 공양을 올렸다.” 상한 음식을 올려 열반에 이르게 한 원흉에서 여래께 마지막 공양을 올린 위대한 인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사람들은 이후 춘다를 기려 탑을 세웠다. 일어난 일은 하나인데 중생의 눈으로 보느냐, 부처의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하늘과 땅 만큼이나 크게 벌어진다. 부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한 사람도 놓치지 않고 챙기셨다.
부처님께서는 카쿠타 강에서 목욕을 하고 기운을 차린 뒤 다시 북으로 길을 나섰다. 순례단도 다시 길을 걸었다. 아난다가 500대의 수레가 지나갔다는 그 어느 쯤일 수도 있을 곳에 다리가 놓여 있었다. 차들이 지나자 다리가 심하게 출렁거렸다. 고팔가르로 가는 국도는 짐을 싣고 빠르게 달리는 트럭으로 붐볐다.
부처님은 카쿠타 강에서 서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히란야바티 강을 건너셨다고 경전은 전한다. 그러나 히란야바티까지는 거의 10km에 달했다. 부처님께서는 그 먼 곳까지 어떻게 가셨을까? 경전은 이렇게 전한다. “낡은 수레가 삐거덕거리고 움직이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자처럼 당당하게 대중의 앞에 서서 쿠시나가르로 걸어가셨다.”
순례단이 가는 길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박수 치고 환영했다. 고팔가르 시내를 벗어나자 넓은 갈대밭이 나왔다. 그 사이로 난 흙길을 걸었다. 발이 빠질 정도로 부드러운 흙이 두텁게 깔렸다. 1km 넘는 길을 지나자 다비장이 보인다.
히란야바티 강은 아주 작은 개천이었다. 작은 다리를 건너 다비장으로 들어갔다. 힌두교인들의 작은 탑이 여러 기 서 있는 곁 문을 지나 부처님 다비탑(라마바르 스투파) 정문으로 들어갔다.
부처님께서는 몸이 몹시 편찮으셨지만 당당한 걸음을 잃지 않고 히란야바티 강을 건너 사라나무 숲에 이르렀다. 두 그루 사이에 자리를 깔고 오른쪽 옆구리를 땅에 대고 해가 지는 쪽으로 누우셔서 아난다에게 “내가 오늘 저녁 열반에 들리라” 선언하셨다. 꽃이 필 철이 아닌데 하얗게 꽃이 피었다. 하얗게 꽃이 피고 꽃비가 내리고 음악이 울렸다. 신기하게 생각하는데 부처님께서 하늘의 신들이 여래의 열반에 임해서 마지막으로 올리는 공양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부처님은 하늘의 신들이 올리는 공양도 수행자들의 수행 정진에 못 미친다고 하셨다.
부처님은 “나는 오늘 저녁 열반에 들리라. 너는 쿠시나가르에 가서 여래가 열반에 든다고 알려라”고 하셨다. 아난다가 출가 재가자가 많은 바라나시 라즈그리 바이샬리 등 불교 교단이 번창한 곳에서 열반에 드시지 않으시냐고 했더니 “이곳이 성스러운 곳이 되리라” 하셨다. 비록 힌두교인들이 많은 인도이지만 한적했던 시골은 부처님 열반지로서 성스러운 곳이 되었다.
수 많은 사람이 부처님을 친견하고 돌아갔다. 임종에 이르렀는데도 나중에 온 120세의 바라문 수바드라에게 팔정도를 닦으라 이르시고 귀화 받으시니 마지막 제자였다. 계를 의지하고 낙수물이 바윗돌을 뚫듯이 방일하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 이르시고 열반에 드셨다. 끝까지 제자들을 위해 가르침을 주시고 교화를 하셨다. 처음이나 끝이나 젊고 건강할 때나 늙고 병들었을 때나 죽음에 임박해서나 한결 같은 모습, 당신이 하신 말씀 그대로 한치의 다름도 없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자 이 지역 부족 말라족이 지금 다비탑이 있는 곳으로 모셔와 화장을 했다. 이곳은 말라족이 왕위 대관식을 하는 가장 성스러운 영지였다. 부처님께 최고의 예우를 표한 것이다. 그들은 부처님의 몸에 꽃과 향과 노래와 춤으로 6일간 공양하고 7일째 화장했다. 쿠시나가르에서 7일 거리 밖에 있었던 마하가섭이 말을 타고 가는 대상에게서 듣고 7일 뒤 돌아가니 장례를 늦춰달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경전은 이를 화장을 하려 했지만 불이 안 붙었는데 7일 후에 마하가섭이 세 바퀴 돌고 발에 엎드려 절을 하니 장작이 저절로 불이 붙었다고 표현했다. 불은 히란나바티 강의 물을 길어 껐을 것이다. 경전에서는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또 땅바닥에서 물을 뿜어 올려 세존의 유해를 안치했던 화장장의 불을 껐다”고 표현했다. 화장 후 사리를 수습해서 주변 8개국이 모셔가 탑을 세웠다.
순례단은 다비탑 앞에서 28일차 행선을 회향했다. 열반당은 이곳에서 1.5km 가량 떨어져 있다. 다음날 한국에서 온 신도들과 법회를 봉행한다. 쿠시나가르까지 누적 689km를 걸었다. 29일차 기도법회를 봉행하고 다음 날 부처님 탄생지 룸비니로 향한다.










■ 꽃비 맞으며 부처님 이운한 우바이
한 번 더 부처님을 모시고 싶다는 보살들의 소원이 이루어졌다. 순례 28일차 쿠시나가르로 들어가는 7일간에 걸친 ‘열반의 길’ 회향은 제7조 보살들에게 주어졌다. 회주 스님이 한번 더 모시고 싶다는 소원을 밝힌 불교신문을 보고 전격 허락하면서 이뤄졌다.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목욕을 하셨던 카쿠타 강변에서부터 다비탑으로 들어가는 열반의 길에 7조 조장 이태경 보살을 시작으로 차례로 부처님을 이운했다. 묵언 수행 중인 백금선 보살을 제외한 5명이 이태경 조장을 시작으로, 성계순 보살, 김정숙 보살, 강덕순 보살, 막내 정유림 씨로 이어졌다. 그리고 히란야바티 강을 거너 다비탑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순간을 이태경 조장이 회향했다.

다음은 7조 대중의 이운 소감이다.
“아침에 어두운 새벽길을 걸으면서 마음 속으로 열반당 가는 날 우리가 갈 때 꽃비라도 내려주었으면 했는데 제가 부처님 이운하고 걸을 때 비가 내려 이것이 부처님 가피구나 울컥 했습니다.” (이태경 조장)
“저절로 어깨춤이 춰지고 처음 했을 때보다 더 마음이 편해지고 기분이 너무좋았어요.” (성계순 보살)
“처음에 겁이 나서 못했는데 유림이 하는 것 보고 저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했는데 황홀했습니다. 울컥하고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김정숙 보살)
“지난 번보다 긴장은 덜 했는데 힘들었습니다. 다시 기회를 주신 회주 스님께 감사합니다.” (강덕순 보살)
“내일이 생일인데 26번째 생일 선물 중에 제일 큰 선물 받았고 더 모시고 싶었는데 부처님 다치시면 안되니까 참았습니다. 경주마처럼 가는데 하나도 안 무겁고 미소가 나왔습니다.” (정유림씨)

■ 종교 달라도 한국불교 순례단 환대
UP주에서의 환대는 3월8일에도 이어졌다. 새벽 2시30분 삐뻐라까낙 숙영지를 출발한 순례단은 쿠시나가르 열반지를 향했다. 인도의 전통축제일 ‘홀리’를 즐기기 위해 모인 주민들은 순례단의 행선에 꽃비와 색가루를 뿌리며 환영했고, 꽃다발을 공양올리며 “나마스테”를 외쳤다.
이날 행선 중 휴식지 가운데 한 곳은 니랑까리 힌두교 지도자가 이끄는 종교단체의 삿성 바반(종교적 행사를 위한 공간)이었다. 힌두교와는 다른 독특한 이 종교단체는 한국불교 순례단 소식을 듣고 휴식장소로 이용해도 좋다는 연락을 순례단에 취해왔다.
이른 아침, 순례단이 도착하자 순례단이 모시는 부처님을 비롯한 순례단 대중을 환대했다. 이곳의 관리책임자 브라제시 마니(Brajesh Mani) 씨는 “한국불교 순례단 소식을 듣고 이곳을 방문해 준데 대한 감사함으로 순례단에 자청해 공간을 내어주게 됐다”며 “종교적 신념은 다르더라도 한국에서 온 순례단 역시 우리의 친구로 여기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인도는 여러 종교가 모여 살지만 모두가 함께 어우러져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다”며 “한국에서 부처님의 나라 인도를 찾아온 순례단을 기쁜 마음으로 환영한다”고 강조했다.
안전한 순례도 염원했다. 브라제시 관리장은 “부처님이 걸었던 길을 따라 걷는 순례가 안전하길 기원한다”며 잠깐 동안의 만남에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이날 쿠시나가르 입성을 목전에 둔 순례단에 쿠시나가르 대한사, 부다가야 분황사 등 한국 사찰에서도 찾아왔으며, 라자니 칸트 마니 트리파티 전 쿠시나가르 의원 등 지역 관리들도 함께 순례단의 성지 참배에 동참했다.
인도=박봉영 편집국장 bypark@ibulgyo.com







인도 우타르 프라데시주=박부영 선임기자 chisan@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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