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팔간즈 출발…두바울리야까지 26km 행선
열반성지 쿠시나가르까지 이제 48km 남았다

3월6일 상월결사 인도순례 26일차는 숙영지 고팔간즈를 출발해 두바울리야까지 가는 24km 행선 길이다.
이 날은 음력 2월15일 열반절. 부처님 열반 성지 쿠시나가르까지 48km, 도착 이틀 앞두고 맞는 열반절이어서 더 뜻 깊었다. 새벽 2시 30분 행선 출발 전 법정스님의 열반재일 발원문을 부처님 전에 고했다.
“진여의 본래 자리로 돌아가신 부처님이시여! 저희 상월선원 인도순례자들은 불기 2567년 열반재일을 맞이하여 지극한 마음 모아 발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방편으로 열반을 나타내셨지만 열반에 든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영원토록 이 세상에서 설법하고 계십니다.
대자대비하신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보여 주신 열반의 세계는 집착을 떠난 적정한 세계이고 대립과 갈등을 떠난 평화로운 세계이며 구속을 떠난 자유로운 세계입니다. 이제, 저희들은 부처님 열반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고통을 제대로 인식하고 그 고통의 원인인 집착을 없애기 위해 팔정도의 길을 걸어 열반 언덕에 다다를 수 있도록 정진하겠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저희들의 이 발원 공덕으로 멀리 있거나 가까이 있거나 모든 사람들이 집착을 떠나 평화와 행복을 누리고 마침내 적정한 열반을 성취하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발원합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 석가모니불”
발우공양 때 독송하는 회발게(回鉢偈) <불생가비라 성도마갈다 설법바라나 입멸구시라(佛生迦毘羅 成道摩竭多 說法波羅奈 入滅俱屎羅)>는 불교 4대 성지를 게송으로 구성한 것이다. 부처님이 왜 이 세상에 오셨으며 어떻게 수행하고 무엇을 깨우치고 가르쳤으며 어떻게 열반에 드셨는지 공양할 때 마다 잊지 말라는 뜻이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두 장면은 성도와 열반이다. 인간 몸 받아 태어나는 인연도 소중하지만 불법(佛法)을 만나, 열반에 일러야 궁극에 도달한다. 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삼는 기독교와 달리 부처님 입멸을 불기(佛紀)로 삼는 것도 이 같은 이유다. 성도 보다 열반에 대해 훨씬 더 많은 이론과 논쟁이 일어난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바이샬리에서 마지막 안거를 나시고 3개월 뒤 열반에 드실 것을 예고한 부처님께서는 북쪽으로 발걸음을 돌리셨다.
순례단이 걸어온 길이다. 오시는 동안 기력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고 하시니 아마 마을 마다 많은 불자들이 부처님을 지극 정성 모셨을 것이다. 당시 가뭄이 심했다고 하지만 강에 막혀 더 이상 가지 못할 곳 까지 따라온 바이샬리 라차비족에게서 보듯 그들은 할 수 있는 모든 정성을 다 쏟았을 것이다. 이는 마지막 공양을 올린 춘다에게서도 알 수 있다.
춘다는 대장장이의 아들, 즉 천민 계급 출신이었다. 그의 망고나무 아래 부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공양을 청하자 아난다는 춘다가 가난해서 공양을 마련할 수 없을 것이라며 부처님을 만류한다. 결과적으로 상한 요리를 내놓아 부처님을 열반에 들게 하였지만, 춘다를 통해 당시 인도인들이 부처님과 불교 교단을 대하는 존경과 사랑을 엿볼 수 있다.
바이샬리의 리차비족에게 발우를 건네고 다시 북으로 발길을 돌리신 부처님. 과연 어디로 향해 가시려고 하셨을 까? 고향 카필라바스투를 목적지로 삼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상식적으로 봐도 맞지 않다. 출가자에게 고향은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교화가 목적이지 태어나고 자란 곳에 대한 추억 부모 형제와의 기억 서린 향수는 아니다. 오히려 아들 부인 이모 사촌 등 석가족은 대부분 출가해 제자가 되었다. 아버지 정반왕은 이미 돌아가셨다. 나라가 코살라국에게 점령돼 사라졌다. 고향으로 갈 이유가 전혀 없다.
부처님께서 가신 ‘열반의 길’은 사실 늘 다니시던 ‘전법의 길’이다. 부처님께서는 영축산과 죽림정사의 라즈기르에서 파트나, 갠지스강을 건너 바이샬리로 가신 뒤 서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칸닥가 강을 건너 쉬라바스티로 가셨다. 다시 거꾸로 내려오시는, 성도 이후 45년의 전법 활동을 그 길 위에서 하셨다. 순례단이 따라가는 바로 그 길이다.
그러므로 부처님 열반의 길은 특별한 새로운 길이 아니라 사람들을 만나 탁발하고 설법으로 고통을 덜어주는 그 길을 그대로 가신 것이다.
부처님의 마지막 모습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편찮으시다고 일정을 중단하거나 특별한 이동 수단을 이용하신 것도 아니다. 늘 하시던 것처럼 길을 가셨고 힘들면 나무 그늘 아래서 쉬셨으며, 목마르면 강물을 마셨고, 공양을 청하면 응하시고 법을 청하면 들려주셨다. 제자가 여쭈면 답을 주셨다. 그러다 다시 기운을 차리면 또 길을 가셨다.
마지막 불이 꺼지기 전까지 제자들이 살아갈 지침을 주셨고 제자를 맞으셨다. 부처님이 안 계시면 누구를 스승으로 삼아야 하고 여쭈니 “계를 스승으로 삼아라” 하셨고 부처님 안 계시면 누구에게 공양해야 하느냐 여쭈니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병든 자를 치료하며 가난한 자를 돕고 외로운 자를 위로하며 청정하게 수행하는 자를 외호 하는 것”이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
팔정도를 닦으라 하시고, 당신의 태어남과 출가 수행 전법의 일생을 말씀 하신 뒤 “부지런히 근면히 수행정진했으니 너희도 부지런히 게으르지 말고 수행 정진하라“는 마지막까지 가르침을 주셨다. 죽음을 맞이해서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고, 여여하신 그대로 평생 보여주신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래서 제자들은 부처님의 말씀이 곧 진리이며 인류를 살릴 최고의 가르침임을 다시 굳게 확신하였으며 이를 머리 속으로 암송하다 문자로 남겨 지금까지 전했다.
떠나심을 슬퍼하는 아난다에게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다. 육신은 떠나지만 깨달음은 너의 곁에 있으리라“고 말씀 하신 것처럼 가르침이 제자들을 통해 면면히 이어지니 부처님은 떠나신 것이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 열반을 ‘반열반’이라 한다.
순례단 대변인이자 불교학자인 종호스님은 ”부처님 열반이 주는 가르침은 일체의 모든 중생 생명은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으므로 이에 대한 믿음으로 살라는데 있다“며 ”열반재일을 맞아 어떤 것이 부처님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며, 부처님 다움이고 행동인가 생각하는 불자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숙영지 고팔간즈 시내를 빠져나와서 철길 건널목을 지나자 얼마 뒤부터 들판 제방길을 걸었다. 길은 숙영지를 3km 가량 앞두고 마을로 방향을 틀면서 끝났다. 하룻밤 지낼 야영지가 마을에 있어 잠시 벗어났다. 26일차 24km를 걸어 누적 641km가 되었다.
다음 날 또 다시 제방을 따라 간다. 춘다의 집이 있었던, 오늘 화질나가르(Fazilnagar)라 부르는 파바마을, 오늘날 가기강(Gagi)으로 부르는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목욕하셨다는 쿠쿠다강, 말라족이 다비를 했다는 히라냐바티(Hiranyavati), 경전에서만 보던, 부처님 열반에 등장하는 그 곳이 지척이다.









■ 상월결사 인도순례단원을 소개합니다
네번째 제5조 비구 스님
비구 스님은 순례단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1조부터 5조까지 79명 순례단원 중 55명이다. 순례단원 소개 네번째 5조를 만났다. 5개 조 중에서 인원이 가장 적은 9명이다. 5조는 한국에서 진행했던 순례에 참가하지 않았던, ‘뉴페이스’가 대부분이다. 모르는 스님들끼리 한 조여서 어색하거나 부딪히는 일 없느냐는 질문에 스님들은 “스님은 다 같은 수행자라는 공동체, 식구라는 의식을 갖고 있으며 대부분 오며 가며 뵙던 분이라서 전혀 낯설지 않다”고 말했다. 안거 때마다 방부 들이는 수좌, 가람을 수호하는 주지 스님 등 다양했다.

보성스님(선원 수좌, 각화사), 능원스님(수국사) 등 대부분 스님들은 부처님 성지를 도보로 걷고 싶은 간절한 열망을 갖고 있다가 참여했다는 소감을 밝혔다. 인도에 와서 “내가 너무 많은 것을 갖고 살고 있었다”고 말하는 스님도 있었고, 한국불교 중흥은 부처님 당시 신분 억압에서 벗어나게 하셔서 인도 분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부처님처럼 불교 중흥도 결국은 어떻게 감동을 줄 수 있느냐에 달렸다는 지적도 나왔다.


5조 조장 삼조스님(중앙종회의원)은 “합장하면 손을 치켜 세워 맑게 웃는 모습에서 순례의 작은 씨앗은 뿌려진 듯 하다”고 말했다. 8명의 스님이 제26일차 행선을 마치고 참가동기 순례 중 느낀 점 등을 밝혔다.

시관스님(봉암사 수좌)
봉암사에서 25안거를 났고 이번 하안거에도 방부를 들였다. 부처님 깨달은 경지가 무엇인 지 경전이나 좌선을 통해 얻고자 했는데 여기 와서 인식이 전환됐다. 내가 너무 많은 것을 갖고 살았다. 주변 조건이 너무 좋아 자체 행복을 몰랐구나 진정 깨달음의 이치가 마음의 평화인데 그것은 얻는 게 아니고 자연과 동화되면서 내려놓는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가르침을 얻게 해준데 정말 감사드린다. 어려웠던 점은 한국서는 없던 시끄러운 밤 문화 적응이었다. 숙면을 취할 수 없어 너무 힘들었는데 포기를 하니까 적응이 되었다. 부처님 이운 기회를 주신 데 정말 감사하며, 제 체구가 작아서 힘들 줄 알았는데 안고 나니 저도 모르게 힘이 생겼다. 안고 이운하는 것 조차 모르게 가벼웠고 환희로웠다. 불자가 얼마 안된다고 들었는데 주민들과 접하며 눈망울을 봤을 때 불교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점화 기회가 없었을 뿐이라는 것을 느꼈다. 이번 인도 성지순례가 인도에 불교를 점화하는 시점이 되었다고 본다.

각만스님(대구 소재사 주지)
인도 성지 도보 순례는 일생일대 기회여서 신청했다. 성지순례 왔을 때도 도보 순례를 막연히 생각했었다. 중노릇 40년 가까이 버킷 리스트 1번이다. 우리가 많은 걸 가지고 있구나, 대한민국 살기 좋은 나라구나 애국심도 생겼다. 부처님이 생활하셨던 나라의 속 사정을 보면서 많을 것을 느꼈다. 눈을 마주치니 부처님 씨가 살아있는지 그들도 합장하더라. 시간적으로는 과거에 열반한 부처님이지만 마음 속에 부처님 씨가 살아 있음을 보았다. 그들 중 한 두명이라도 부처님 공부한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불교가 전해질 것이라고 본다. 부처님 이운은 무게감 있다고 해서 걱정 했는데, 다리가 아픈 상태였는데도 통증을 못 느꼈다. 이것이 부처님 가피인가 생각했다.

법본스님(약사사 총무국장)
회주 스님 상월결사를 관심 있게 지켜보면서 취지에 공감하게 됐는데 국내 행선은 소임을 맡고 있어 참가 못해 안타까웠다. 소임 놓고 봉암사 선원에 있다가 시관스님과 참가했다. 회주 스님 목표가 부처님 제1계인 생명존중 불살생인데 이것을 떠나서 불교 논할 수 없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불교 중흥 위해 모두 마음 모아서 씨앗이 되기를 바란다. 초창기에 적응 잘하다 일주일 후 배탈 설사로 탈진해서 개인적으로 고생했는데, 5조 도반 스님들이 약도 주시고 잘 넘겼다. 이번 순례를 계기로 회주 스님의 원력을 모두 지혜를 모으고 원력 모아서 순례 정기화, 청소년 교육 등으로 구체화 한다면 신심이 증장 될 것이다.

각일스님(오세암)
부처님 가셨던 길을 걷는 도보로 걷는 순례는 일생에서 두 번 다시 올 수 없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제 자신을 찾고자 왔는데, 길에서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박수치고 합장하며 반갑게 맞아주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 나라는 부처님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보았다. 일부러 뭔가를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부처님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이 진짜 불교이고 부처님의 진정한 모습이 아닐 까 생각했다. 이런 기회를 주신 상월결사 회주스님께 깊이 감사드리며 저도 불교중흥 생명존중의 상월결사 원력 성취에 작지만 도움이 되도록 열심히 정진하겠다. 부처님 이운은 생전 처음이었는데 정말 가슴 뿌듯하고 너무 너무 행복하고 좋았다.

도봉스님(성남 원적정사)
상월결사 회주 스님 뜻 따라 인도 순례 통해서 부처님 발자취 돌아보고 불교 중흥 고민 원력을 갖고 참여했다. 한국불교가 그래도 괜찮다 안일하게 생각했음을 인도에 와서 깨달았다. 보드가야에서 회주스님 지적하신 우리가 잘못하면 인도처럼 유적지로만 남을 수 있음을 알았다. 앞으로 포교 전념하고 저도 부지런히 정진하며 살아야겠다 생각했다.
인도 비하르 주=박부영 선임기자 chisan@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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