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도구화 위험에도 감성지능 만들어야 할까?

“사랑은 은유로 시작된다.
달리 말하자면,
한 여자가 언어를 통해 우리의 시적 기억에 아로새겨지는 순간,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에서

 

보일스님

사랑도 프로그래밍 될까?

차가운 금속성의 인공지능과 따뜻한 감성의 사랑 사이에는 분명 온도 차가 크다. 너무나 이질적인 이 관계의 연결은 그 온도차만큼이나 낯설고 당황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고리즘으로 만들어 인공지능에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을까. 어쩌다 보니, 갑자기 사랑이라는 감정이 싹트는 일종의 버그 내지 작동오류가 아닌 애초에 시스템으로서 장착시키는 방식으로써 말이다.

더욱 정교해지고 섬세해지는 감성 컴퓨팅 기술은 이 도전이 그리 멀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인간의 ‘기억’이라는 것은 대부분 온전치 못하고 주관적 왜곡과 변형의 산물이다. 그러한 인간들의 서사인 역사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앞서 영화 ‘그녀, Her’에서는 인공지능이 단지 음성을 통한 소통만으로도 사랑이라는 감정이 싹트는 시작과 과정을 소재로 삼았다면, 아예 인간과 거의 일치하는 형태의 몸을 가진 인공지능 로봇을 대상으로 한다면 어떨까. 영화 ‘조, Joe’에서는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질문이 이전보다도 더 짓궂고 도발적이다. 마치 ‘이래도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라고 묻는 듯해서 불편하기까지 하다.

‘당신은 인공지능 로봇과 사랑과 빠질 수 있겠습니까?’ 흥미롭지만 피하고 싶은 질문 아닐까. 인공지능 로봇 설계자인 주인공 ‘콜’은 자신이 제작한 인공지능 로봇 ‘조’와 사랑에 빠진다. 문제는 시제품이었던 인공지능 로봇 ‘조’의 성공 이후, 또 다른 ‘조 2.0’을 제작하고 양산되면서부터 발생한다.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감성 알고리즘을 장착한 인공지능 로봇 ‘조 2.0’은 여기저기에 판매되고 각각의 방식으로 소비되고 이용된다. 흥미로운 점은 주인공인 콜과 인공지능 로봇 조가 느꼈던 사랑이라는 감성이 알고리즘화되어 동일한 방식으로 복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수없이 복제될 수 있는 사랑인 것이다. 애초에 ‘콜’과 ‘조’가 느꼈던 사랑과 이후의 복제된 사랑들 사이에 어떤 차별성이 있을까.

영화의 중심 내용을 차지하는 ‘콜’과 ‘조’의 사랑이 고유함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사랑은 알고리즘화 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 사랑으로 인해 느끼는 각자가 느끼는 감정까지는 동일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 그 고유함이 존재할지도 모르겠다. 기술이 가 닿지 못하는 지점이다.

사랑 알고리즘을 통해서 사랑하면서 특정 감정을 느끼라고까지는 설계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사랑을 특별하고 고유하게 만드는 건, 사랑하는 자의 의지와 선택의 문제일 것이다. 인공지능의 시대, 복제와 재현의 무한 증식과 고유성과 특별함을 지키려는 의지 사이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시작되고 있다. 

감성 컴퓨팅

만약 인간이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고 해보자. 그게 어떻게 해서 가능해지는가? 기본적으로 인공지능이 인간만큼이나 또는 인간보다도 더 매력적이거나 호감을 느낄 정도여야 할 것이다. 이 ‘매력적인’이란 의미에는 단순히 외형적인 끌림뿐만 아니라 정서적 교감을 포함한다. 인공지능 로봇의 외형에 대한 소위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 현상은 현재의 기술 발전 속도로 볼 때 그 극복 가능성을 예측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여기서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란, 로봇의 겉모습이 인간과 비슷해질수록 인간이 로봇에 대해 느끼는 호감도가 증가하다가 일정 정도에 이르면 강한 거부감을 느끼게 되지만, 그 수준을 뛰어넘어서 완전히 인간과 동일해지면 다시 호감도가 증가해 인간 대 인간이 느끼는 감정 수준과 동일해진다는 것이다.

문제는 정서적 영역이다. 이 정서적 교감을 위한 소통이 가능한 인공지능 연구가 한창이다. 방대한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 최근의 컴퓨팅 능력의 비약적 향상은 이전과는 다른 수준의 인공지능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소위 ‘감성 컴퓨팅’ 분야도 예외가 아니다.

‘감성 컴퓨팅’이란, “감정, 다른 정서적 현상에 대해 의도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뜻한다.” ‘MIT Press’ 즉, 감성 컴퓨팅 기술은 컴퓨터에 인간의 감성을 인지하고 학습과 적응을 통해 인간의 감성을 처리할 수 있도록 감성 및 지능 능력을 부여한 것으로, 인간과 컴퓨터의 효율적인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이다.

최근에는 불교의 ‘아비담마’ 인식론을 인공지능 연구에 활용하기도 한다. 즉 ‘아비담마’를 도입해 89개의 마음 종류와 52개의 마음 요소를 바탕으로 한 마음 현상의 다양성을 모델로 삼아 인공지능 시스템과의 접목을 시도하기도 한다. 
 

인공지능이야말로 인간의 불안과 결핍, 고통의 회피, 사랑의 갈구에 대한 은유이다. 문화적 은유이자 정치적 은유이며 예술적 은유, 심지어 종교적 은유라고도 할 수 있다. 언어로서의 개념적 은유가 아닌 하나의 사태로서의 은유, 즉 인공지능 개발을 통해 고통을 치유 받고자 하는 마음인 것이다. 출처=www.shutterstock.com
인공지능이야말로 인간의 불안과 결핍, 고통의 회피, 사랑의 갈구에 대한 은유이다. 문화적 은유이자 정치적 은유이며 예술적 은유, 심지어 종교적 은유라고도 할 수 있다. 언어로서의 개념적 은유가 아닌 하나의 사태로서의 은유, 즉 인공지능 개발을 통해 고통을 치유 받고자 하는 마음인 것이다. 출처=www.shutterstock.com

자본화된 감성

현재 감성 컴퓨팅 기술은 대략 언어인지(Speech Recognition), 안면인식(Facial Expression), 동작인식(Gesture Recognition) 등으로 세분된다. 인공지능 로봇 공학자들의 분류는 이것은 감성 인식 단계라고 할 수 있고, 감정 표현과 감정 생성으로 체계화한다.

우선 감정 인식은 언어와 얼굴 근육의 움직임 또는 동작을 통해 상대방의 감정을 포착하는 단계에 적용되는 기술이다. 대표적으로 애플이 최근 인수한 기업 이모션트(Emotient)는 인공지능 감정 인식 기술을 통해 제품을 바라보는 고객의 표정을 카메라에서 실시간으로 인식해 그 사람의 감정을 분석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인간의 감정을 데이터화 하여 이것이 다시 자본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감정 표현이다. 표정이나 움직임 또는 음성을 통해 각각의 상황에 반응하도록 프로그램화된 인공지능 기술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감성 생성기술이다. 상대방의 다양한 표현을 포착하고 외부 환경의 변화에 대응하는 감정 모형을 만들어, 스스로 상황에 맞는 표현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이다. 

최근 미국의 MIT 미디어 랩(Media Lab)은 지능형 로봇 넥시(Nexi)를 발표했다. 넥시는 물체 감지 능력, 시선 고정뿐만 아니라 화가 났을 때 눈썹을 찌푸리거나 놀라서 치켜뜨는 등 정교한 표현이 가능한 수준이다. 최근의 감성 알고리즘은 나름의 독립적 판단이 가능한 것이 특색인데, 인간이 명령한다고 무조건 복종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환경과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사용자의 명령을 무시할 수 있도록 설계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지능형 로봇 ‘파페로는(PaPeRo)’는 제때 충전을 시켜주지 않거나 인간이 폭력을 행사하거나 하면 사용자의 명령에 대해 시치미를 떼기도 한다. 이처럼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의 감정을 인식하고 이에 반응하여 스스로 감정을 생성하고 표현할 수 있도록 설계된 인공지능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인간의 감정 변화를 인공지능이 판단하는 시대, 오히려 인간보다 더 정확하게 자신의 감정을 파악하고 더 적절한 반응을 해준다면 과연 우리는 누구에게 정서적으로 의지하게 될 것인가. 

은유로서의 인공지능

인공지능이야말로 인간의 불안과 결핍, 고통의 회피, 사랑의 갈구에 대한 은유이다. 문화적 은유이자 정치적 은유이며 예술적 은유, 심지어 종교적 은유라고도 할 수 있다. 그 모든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은유를 ‘무의식이 의식 세계를 숨기고 변형하는 대표적인 방법’이라고 보았다.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아니면, 고통으로 다가가지 않기 위해서 인간은 인공지능이라는 마음을 만들어내고자 하며, 또는 형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 근원을 ‘무의식’이라 부르건 ‘알라야식’이라고 부르건 좋다. 물론 불교 유식(唯識)에서 말하는 ‘알라야식’과 분석 심리학에서 말하는 ‘무의식’은 차이가 있다. 유식은 그 근원을 문자 그대로의 ‘무의식(無意識, unconscious)’이 아니라 다만 ‘잠재된 식’으로 파악한다는 차이가 있다.

인간은 마음속에서 인공지능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투사한다. 언어로서의 개념적 은유가 아닌 하나의 사태로서의 은유, 즉 인공지능 개발을 통해 고통을 치유 받고자 하는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는 사랑이 두려운 마음, 사랑 때문에 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 아니면 누군가를 간절히 그리는 마음이기도 하다.

인공지능 너머로 그 대상에 가 닿기 위한 욕망의 매개로서 인공지능에 사랑 알고리즘을 만들어 장착시켜 사랑을 하려 하고 사랑 받으려 하는 마음을 담은 은유이다. 마치 화가가 그림을 통해, 음악가가 음악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것과 같다.

명화 ‘키스’는 화가 구스타브 클림트(Gustav Klimt)가 그의 유명한 여성 편력 속에서도 유일하게 정신적 사랑만을 나눴다고 전해지는 ‘에밀리에’를 향한 자신의 욕망을 그림을 통해 은유하는 것과 같다. 인간의 감성을 투사한 인공지능을 통한 은유가 일시적인 치유와 안도감을 줄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고통의 근원에서 과연 얼마나 해방될 수 있으며 사랑이라는 감정에 얼마나 다가설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그런데도 인간이 존재하고 욕망하는 한, 인간은 끊임없이 은유할 것이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욕망을 증장하기 위한 하나의 은유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과연 행복일까. 아니면 고통일까. 인간은 사랑이 무한복제되고, 도구화되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그러한 감성 인공지능을 만들어야만 할까. 클림트가 ‘에밀리에’에게 보낸 편지 내용 중 한 구절로 마무리할까 한다. “사랑 그 자체가 쓰린 고통인 것은 분명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것도 고통이라오.”

[불교신문3531호/2019년11월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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