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일스님이 들려주는 4차 산업혁명 이야기] <2> 또 다른 인공생명, 포스트 휴머니즘 시대의 불교
[보일스님이 들려주는 4차 산업혁명 이야기] <2> 또 다른 인공생명, 포스트 휴머니즘 시대의 불교
  • 보일스님 해인총림 해인사승가대학 학감
  • 승인 2019.07.12 16: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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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인욕바라밀은 필요없는 것인가?

유전자가위 기술로 대표되는
인위적 유전자 조작의 경우
업에 대한 정보를 저장하는
DNA에 인간이 직접 개입해
외부에서 복제에 관여한다

업의 작용과 흐름을 교란시켜
생체 정보의 흐름도 차단하고
심지어 업의 성숙을 억제해 …
유전자 가위 기술의 개발은 새로운 인간종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다. 간단한 유전자 편집만으로도 선천적 질병의 예방과 치료가 가능해지고 있다.
유전자 가위 기술의 개발은 새로운 인간종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다. 간단한 유전자 편집만으로도 선천적 질병의 예방과 치료가 가능해지고 있다.

“삶은 덧없고 목숨은 짧으니, 늙음을 피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쉴 곳이 없네. 죽음의 두려움을 꿰뚫어 보는 사람은 세속의 자양을 버리고 고요함을 원하리.” 

-<쌍윳따 니까야> ‘갈대의 품’ 중에서

“당신은 보수입니까, 진보입니까?” 벌써 긴장하기 시작한다.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서로 눈치까지 살피기 시작한다. 경제적 수준, 출신 지역, 학력 수준 등등 관련이 있어 보이는 모든 데이터까지 순간적으로 탐색하기 시작한다. 아, 이거 쉽지 않다. 어렵다. 세련되게 즉답을 피할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왜 이럴까?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밝힌다는 것은 상대방의 생각에 대해 어디까지를 수용할 수 있고, 거부할 것인지에 대한 일종의 자기 고백이다. 그래서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사실 보수와 진보의 대립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그 사회 전반적 맥락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고전적 의미의 정치지형이 제4차 산업혁명 시대를 지나면서 변화를 맞게 된다고 한다. 향후 진보와 보수의 기준은 인간의 신체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과학기술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가 될 것이라는 주장은 매우 흥미롭고 주목할 만하다. (로랑 알렉산드로& 장 미셸 배스니에의 논쟁 중에서, <로봇도 사랑을 할까> 참조)

다시 말해, 첨단과학기술과 인체와의 결합에 어느 정도까지 관대할 수 있는지의 문제이다. 결국 생체보수주의와 기술진보주의자의 대립, 이것이 미래의 정치 구도이다. 기술진보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인간의 지능 향상을 위해 유전자 조작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이라면 생체보수주의자들은 이것을 인간을 기계화시키는 것이라며 반대한다.

가장 먼저 이 주제를 다루는 이유는 향후 다루게 될 모든 주제를 관통하면서 일관되게 제기될 문제의식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 인공지능을 비롯한 첨단과학기술이 가득 차고 그 속에서 살아가겠지만, 그 인공지능 너머와 이면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화두와도 같은 물음이다. 

새로운 인류의 등장 

제4차 산업시대에 들어서면서 생체과학기술과 인공지능기술의 발전으로 새로운 인간종의 탄생까지 논의하게 되었다. 이제 인간은 어느 수준까지 첨단과학기술을 수용해서 생명을 유지, 존속하는 것을 허용할 것인가. 그리고 유전자 복제, 변형, 조작 기술을 어느 선까지 수용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허용 기준은 무엇이어야 하나.

이 새로운 기준과 논쟁이 중요한 이유는 이 기준의 이면에 생로병사라는 인간의 실존적 한계이자 불교의 고통에 대한 이해체계가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이다. 제4차 산업시대의 변화는 자칫 인간다움에 대한 전통적 신뢰와 가치 기준에 심각한 도전이 될 수 있다. 

지난 2011년 재생의학계의 권위자인 앤서니 아탈라(Anthony Atala)는 세계 최초로 생체물질을 소재로 한 3D 프린터 기술을 통해 사람의 방광과 신장을 만들어 이식에 성공했다. 이렇게 인간의 장기를 새로 만들어 지속해서 교체할 수 있다면 장기 질환으로 인한 사망 가능성은 대폭 줄어들 것이다. 인간이 생물학적 나이는 먹지만, 노화로 인한 노쇠는 없다. 인간은 이제 수명연장을 넘어서 어쩌면 영생을 꿈꾸게 될지도 모른다.

2016년 하버드 대학의 유전학자인 조지 처치(George Church)는 한발 더 나아가 10년 이내에 새로운 인간 세포를 만들어 완전히 새로운 인간 게놈을 창조해내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이 놀라운 이유는, 인류가 이제 인간게놈을 판독하는 단계를 넘어서 인간게놈을 새로 구축하고 그 합성을 시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부모 한쪽이 없어도 아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급기야 작년 2018년, 중국 선전의 남방과기대 허젠쿠이(賀建奎)교수는 유전자 편집 기술을 이용해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도록 특정 유전자를 제거한 쌍둥이를 출산하는 데 성공했다. 현재 이 연구에 대해 윤리적 비난이 거세게 일고 있다. 아직 별도의 검증작업과 학술지 발표도 없긴 하지만 전문가들은 올 것이 왔다는 분위기이다.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 국가에서는 아직 이러한 연구와 시도를 금지하고 있다. 영화 <가타카> 속에 등장하던 ‘맞춤형 아기(Designer Baby)’ 가 탄생한 것이다. 각국에서 규제의 필요성을 외치고 있지만, 이러한 연구가 통제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현재로선 회의적이다. 

과학기술이 종전에는 자연을 대상으로 삼아 인류를 위해 봉사했다면, 현재는 인간을 대상으로 하고 심지어 재료로 활용하고 있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최근에 자주 등장하는 개념인 ‘트랜스 휴머니즘(Trans Humanism)’은 나노기술, 생명공학, 인지과학, 인공지능 등을 이용해 인간의 능력을 증강 또는 개량하려는 일련의 흐름이다. 상당수의 미래학자는 현재의 인류가 이 트랜스 휴머니즘 시기를 지나면 종국에는 현재의 순수한 생물학적 인류가 사라지고 모든 인간이 첨단 과학기술과 결합한 ‘포스트 휴머니즘(Post Humanism)’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예견한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불교는 생체보수주의와 기술진보주의라는 보수와 진보의 구도에서 어디쯤 위치할까. 미리 종교적, 호교론적 감성으로 예단하진 말자. 일단 불교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시한다. 동기주의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치료목적으로 인간의 능력을 증대시켜가려는 의지와 노력에 우호적인 기술진보주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을 새롭게 개량하고 복제하려는 시도가 새로운 윤회의 지속, 또는 고통의 재생산, 확대로 귀결된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불교 교리체계 내에 생체보수주의 측면도 만만치 않게 가지고 있다. 

유전자 조작, 그 ‘파괴적 혁신’

불교는 신과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윤회의 주체가 되는 신이나 영혼, 자아 등 고정불변의 것이라고 믿는 것들은 일종의 허구 또는 유용한 개념 도구 정도로 이해된다. 영혼을 인정하지 않는데 어떻게 윤회가 가능한 것일까. 윤회에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 생명체 안에 고정적이고 소멸하지 않는 윤회의 주체가 있는지에 따라 유아(有我)윤회와 무아(無我)윤회로 나뉜다.

불교는 불변, 불멸의 아트만을 인정하는 힌두교와는 달리 무아윤회의 입장이다. 즉 고정적, 확정적 실체는 없고 다만 업(業)에 의해 윤회가 진행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업을 생명공학에서 말하는 일종의 유전자와 유사한 역할 또는 체세포 DNA와 동일시하는 견해에서 본다면, 윤회를 업의 자기 복제라고 볼 수도 있다. 무아윤회에 의한다면 개체들은 저마다의 생명 정보를 복제하는 흐름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이 바로 윤회이다.

여기서 문제는 유전자가위 기술로 대표되는 인위적 유전자 조작의 경우, 이 업에 대한 정보를 저장하고 있는 체세포 DNA에 대하여 인간이 직접 개입하여 외부에서 복제에 관여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업의 작용과 흐름을 교란한다. 달리 말해 생체정보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차단하여 업의 성숙을 억제 내지는 제거하려는 시도이다.

결국 이미 외부적 기술에 의해 조작된 업의 흐름 속에서는 인욕바라밀처럼 스스로 고통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무의미해진다. 또한 윤회의 사슬을 끊어보겠다는 발심 등의 인간 본연의 의지를 기대할 순 없을 것이다. 결국 기술은 첨단을 향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인간의 정신은 퇴행, 퇴화하고 말 것이다. 계속해서 고치고 조작해서 끊임없이 죽고, 살고를 반복하든 영원히 살아가든 어차피 윤회의 굴레인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 속 어디에서도 윤회를 미화하진 않는다. 오죽했으면 일체개고(一切皆苦)라고 하셨겠는가. 그리고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이 어디 육체에서 오는 고통만이겠는가. 윤회의 삶을 추구할 것인지, 깨달음의 삶을 살 것인지 매 순간 선택의 연속이다. 무상의 서늘한 칼날은 우리의 생로병사에 대한 소박한 이해마저도 여지없이 베어버린다.

보일스님
보일스님

[불교신문3503호/2019년7월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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