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일스님이 들려주는 4차 산업혁명 이야기] <3> 인공지능에도 불성이 있나요①
[보일스님이 들려주는 4차 산업혁명 이야기] <3> 인공지능에도 불성이 있나요①
  • 보일스님 해인총림 해인사승가대학 학감
  • 승인 2019.07.19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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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성 유무는 행위가 갖는 속성에 따라 결정

인간과 기계 나누는 경계는
일반적인 상식보다 훨씬 더
모호하고 단정짓기 어려워

그 모호함 속에 불성 유무를
특정 개체에 규정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이해일까 …

바로 이 지점이 인공지능 로봇
유사 인격체들과 공존에 대해
논란이 분분한 이유가 된다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지,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다.” (비트켄슈타인(Ludwig Wittgenstein), <논리­철학 논고> 중에서)

보일스님

“질문이 잘못되지 않았나요? 제 생각엔 ‘인공지능에도 불성이 있나요?’가 아니라 ‘인공지능도 불성을 가지게 될까요? 라고 해야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학인 스님이 눈빛을 반짝이며 물어온다.

반문이 제법 날카롭다. 그렇다. 고정적이고 확정적인 존재는 없다. 모든 존재와 현상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 생성·지속·변화·소멸을 반복한다. 다만 변화하는 흐름 속에서 무언가가 되어갈 뿐이다. 우리가 인공지능 로봇에게 불성은 없다고 선언한다고 해서 스티븐 호킹이 지하에서 안심하겠는가, 일런 머스크가 다행이라고 여기겠는가.

아니면 구글의 레이 커즈와일이 발끈할까. 그러든가 말든가 인공지능 개발은 진행되고 있고 계속될 것이다. 현재 인공지능 로봇에 불성이 없다고 하면 인공지능은 영원히 기계로만 머물게 될까? 있었던 불성도 사라지는데, 없던 불성은 왜 생겨날 수 없는 걸까.

불성을 논의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일천제(一闡提, Icchantika)‘라는 개념이다. <대반열반경>에 따르면 ’모든 선근을 끊어 없애고 본심이 그 어떤 선법과도 연결되지 않으며, 조금도 선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자‘를 일천제 즉, 불성이 없다고 설한다. 유정 중생일지라도 불성이 없는 존재가 될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불성이 있고 없고를 결정하는 것은 그것이 머무르는 소재나 의지처가 아니라 개별 개체의 행위가 갖는 속성에 따라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불성은 범어 ‘Buddha-dhātu’의 역어로 붓다(佛) 혹은 깨달음(覺)을 뜻하는 ‘Buddha’와 성(性) 혹은 계(界)를 뜻하는 ‘dhātu’의 합성어이다. 붓다(佛)의 본성(本性) 또는 붓다(佛)의 인(因) 등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 불성 사상은 동아시아 불교 선 수행 전통에서 꽤 영향력이 있는 아이디어였다. 불성에 대한 이해방식도 다양하다.

붓다가 될 가능성을 의미한다는 관점에서부터 모든 유정물이 본래 다 갖추어진 불성을 가진 부처이기 때문에 그것을 자각하기만 하면 된다는 입장까지 그 범위가 넓다. 심지어는 기와나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 같은 무정물에도 불성이 있다는 ‘무정(無情)불성론’도 존재한다. 관점이 다양하다는 것은 해석의 여지 또한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불성을 붓다가 될 가능성이라는 이해 속에서 생각을 전개해 보기로 한다. 
 

인간의 DNA도 디지털 프로그램으로 변환이 가능해진 시대가 됐다. 디지털로 재구성된 생명의 탄생이 가능하다면 그 생명에도 불성이 있다고 봐야 할까. 그때 그 생명체의 수행은 어떤 의미일까. 출처=www.shutterstock.com
인간의 DNA도 디지털 프로그램으로 변환이 가능해진 시대가 됐다. 디지털로 재구성된 생명의 탄생이 가능하다면 그 생명에도 불성이 있다고 봐야 할까. 그때 그 생명체의 수행은 어떤 의미일까. 출처=www.shutterstock.com

디지털 프로그램으로서의 인간

유정물과 무정물의 경계는 일직선으로 반듯하게 자른 듯이 나누어지진 않는다. 단순히 생명이 있고 없고에 따라서 구분을 시도한다고 하더라도 생명이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 정립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작업이 만만치가 않다. 우선 최근 유전자 가위 기술의 탄생으로 황금기를 맞이한 분자생물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생명을 자기를 복제하는 시스템이라고 이해한다. 즉, 생명체란 마이크로 부품으로 이루어진 플라스틱 조립식 장난감, 즉 분자 기계에 불과하다는 관점으로까지 확대된다. 

이에 앞서, 루돌프 쇤하이머(Rudolf Schoenheimer)는 생명에 대해 ‘단순한 조립식 부품을 합친 것이 아니라 그 부품 자체가 역동적인 흐름 안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독창적 견해를 제시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섭취한 음식물이 분자의 형태로 체내에 고루 퍼지고 머물다 변화하고 배출되는 과정을 증명해낸 것이다. 그 흐름의 진행 과정에서 우리의 몸은 유지되고 존속된다.

즉 우리의 몸은 고정적 실체로서의 육체가 아니라 분자의 흐름이 만들어낸 ‘효과’에 의해 실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 역동적인 흐름 그 자체이다. 그럼 그 흐름을 만들어내는 기본 단위인 DNA는 무엇일까. DNA는 서로 역방향으로 꼬인 리본 모양을 한 구조(이중나선)로 이루어져 있다. 흔히 말하는 유전자 정보는 이 나선 모양의 필름에 새겨진 암호라고 할 수 있다. 두 가닥의 DNA 사슬은 서로 보완하며 자신을 복제해 나간다.

우리의 유전정보는 그 DNA 분자 내부에 보존되는 것이다. 결국 생명이란 여러 부품이 모여서 만들어진 구성물의 단순한 총합이 아니라 그 구성물 분자의 흐름이 유발하는 효과라고 할 수 있다. 그 흐름 자체가 살아있다는 증거인 셈이다. 또 다른 관점을 살펴보자.

세계 최초로 인간 유전체 지도를 완성한 J. 크레이크 벤터(J. Craig Venter)는 지난 2010년 유전체 합성과 인공생명 연구를 거듭한 끝에 최초의 ‘합성생명’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의 연구팀은 그 과정에서 살아있는 그 이중나선 구조의 DNA 정보를 컴퓨터로 디지털화시킬 수 있게 된다. 즉, 디지털을 통해 인간의 유전정보를 전송하고 재합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 마디로 DNA가 생명의 소프트웨어인 셈이다.

최근 크레이크 벤터는 자신의 디지털화된 자신의 유전정보를 우주로 전송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화성탐사선에 DNA 서열분석기를 가져갈 수 있다면, 화성 생명체의 DNA 정보를 전자기파 형태로 지구로 전송하고 지구에서 그 정보를 바탕으로 화성 생명체를 탄생시킬 수 있다고 한다. 놀라운 상상력이며, 그 상상력이 터무니없지 않다는 사실이 더욱더 당혹스럽다. 그럼 결국 생명의 본질은 정보가 되는가? 그 생명의 탄생은 윤회 속에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 생명에도 불성이 있다고 봐야 할까?

인간과 기계의 경계

그렇다면 불교는 생물과 무생물, 유정물과 유정물, 생명과 기계를 어떻게 볼까. 구분할 수 있다면 그 기준은 무엇이 될까. 생명체만의 고유함은 있을까?

인간 의식의 흐름과 마음의 구조에 대해서 집요할 정도로 오랜 시간 천착해 온 아비달마 전통의 <구사론>에 따르면, “생물과 무생물을 분류하는 특별한 법이 있다”고 하여 이것을 ‘중동분(衆同分, sabhāga, Commonality of sentient beings)’이라고 소개한다. 즉 수많은 각각의 생명체들끼리 서로 유사하게 만드는 요소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인간이 살아가다가 갑자기 개나 고양이로 변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중동분’이라는 힘이 작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생물로서의 고유한 증거가 있기 때문에 생물이고 인공지능에는 그러한 것을 갖지 못하므로 무생물이라는 것이다. 그 고유한 증거가 유전정보 전달물질 즉, DNA인지 RNA인지는 알 수 없다. 비록 그 기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은 없더라고 생물을 생물답게 하는 요소는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불교의 지적 전통 속에서 이 ‘중동분’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가에 대한 반론은 존재한다.

세친과 더불어 그리고 공(空)사상에 기반한 대승불교 전통에서도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를 구분하는 기준제시가 또 다른 실체화라고 비판한다.(사사키 시즈카 지음, 법장 옮김, <과학의 불교> 참조) 붓다는 “수행승들이여, 오온은 내 것이 아니며, 내가 아니며, 나의 자아가 아니라고 관찰해야 한다”라고 설했다.(<쌍윳따니까야> S.N. Ⅲ.22)

생명체 내부에 생명의 핵심이라고 할 만한 실체는 없다. 다만 모든 존재는 요소의 잠정적, 임시적 집합에 불과하다. 불교의 생명관을 이렇게 정리한다면, 분자생물학이 지금까지 밝혀낸 생명관과 서로 공통된 시각으로 좁혀져감을 알 수 있다. 결국 인간과 기계의 경계는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보다는 훨씬 더 모호하고, 뭐라 단정짓기 어렵다.

그렇다면 그 모호함 속에서 불성을 유정물이든 무정물이든 간에 특정 개체에 전속적으로 규정짓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이해일까. 바로 이 지점이 앞으로 다가올 인공지능 로봇 또는 유사 인격체들과의 공존에 대해 논란이 분분한 이유가 된다. 다시금 인류의 오래된 질문들을 해야 할 시점이다.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공지능 이전에 사유를 거듭해야 할 문제다. 

[불교신문3505호/2019년7월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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