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사랑을 알아”…
사만다 마지막 대사에
주인공은 결국 ‘심쿵’

“선생님, 큰일 났어요. 저 사랑에 빠졌어요. 너무 아파요.”
“그거 큰일이군. 빨리 나아야겠네. 그리고 그건 빨리 나아.”
“아뇨, 전 그냥 아프고 싶어요.”

- 영화 ‘일 포스티노, Il postino’ 우체부 마리오와 시인 네루다의 대화 중에서

 

보일스님
보일스님

무슨 정신 나간 소리냐고? 그렇다. 상식적으로 인공지능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어떻게 사람이 기계 또는 디지털 정보에 마음을 주고 사랑이라는 감정에 빠지게 될 수 있을까. 하지만 최근의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 속도를 보면 이 농담 같은 의문이 실현될지도 모르겠다.

딥러닝에 기반한 안면 이미지 인식 기술은 그 정확도에서 이미 인간의 육안을 넘어섰다. 만약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인공지능, 인간의 미세한 표정 하나하나의 떨림과 변화마저도 놓치지 않고 포착하며,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고 배려하며 위로할 줄 아는 인공지능이 가능하다면 어떻게 될까.

알파고가 상징하는 인공지능의 지능에 대한 의문은 이제 다소 식상한 상상력이 되어 버렸다. 이미 딥러닝 기술은 이제 계산능력과 예측능력에 의문을 제기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종전까지만 하더라도 인공지능이 물리적인 면이나 지적 과제에 대해 인간보다 우월한 능력을 보인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감성을 지녔으며 다른 존재들과 교감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계와는 차별화된다고 여겨 왔다.

그러나 인공지능기술의 비약적 발전과 로봇산업의 결합을 통해 인간의 신체노동력을 대신했던 산업용 로봇에서 지능형 서비스 로봇으로 전환하고 있다. 사람과 상호 작용을 통해 복지시설이나 병원 등에서 돌봄 및 간호 서비스를 통해 사회 친화적 로봇이 속속 개발되고 있다. 

이러한 인공지능 기반의 감성로봇들은 인간과 정서적 교감이 가능하기 때문에 더욱 인간의 삶에 영향을 크게 미칠 것이다. 이제 제4차 산업 시대의 인공지능 기술은 지능을 넘어 감성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할 수 있는가? 또는 해야 하는가?

이렇게 인공지능이 감성의 영역까지 진화를 거듭한다면 결국 인간과 상호작용을 하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점도 예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때, 과연 인간의 고유한 감정이라고 여겨졌던 특히 ‘사랑’과 ‘연민’ 혹은 ‘자비’는 어떻게 재해석될 것이며,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존재의 근원적 질문이 새롭게 제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처럼 인공감정 분야의 연구는 새로운 인간 친화적인 인공감성 로봇을 개발하는 핵심기술인 동시에 인간 본연의 감성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를 요구한다. 단순히 기술과 공학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철학과 종교, 윤리의 영역이다. 이제 과학기술의 혁명적 전환점 속에서 우리가 던지는 질문은 특정 인공지능 기술을 실현 ‘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서 실현 ‘해야 하는가?’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감성컴퓨팅 능력의 비약적 발전으로 인공감정 분야의 연구는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인공감정은 인간 친화적인 인공지능로봇을 개발하는데 핵심기술인 동시에, 인간 본연의 감성에 대한 본질적 이해와 재해석을 요구하고 있다. 이 상황은 단순히 기술과 공학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철학과 종교, 윤리의 문제이다.출처=www.shutterstock.com
감성컴퓨팅 능력의 비약적 발전으로 인공감정 분야의 연구는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인공감정은 인간 친화적인 인공지능로봇을 개발하는데 핵심기술인 동시에, 인간 본연의 감성에 대한 본질적 이해와 재해석을 요구하고 있다. 이 상황은 단순히 기술과 공학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철학과 종교, 윤리의 문제이다. 출처=www.shutterstock.com

영화 ‘Her’와 인공감정

만약 인공지능이 인공감정(Artificial Emotion)을 가지게 된다면 우리는 어떤 태도로 인공지능을 대하게 될까? 이와 관련해서 재미있는 영화 한편 소개해 본다. 아는 사람은 다 알고 본 사람은 이미 다 보았을 영화 ‘Her’(스파이크 존스 감독, 2013)이다. 주인공인 대필작가 ‘테어도어’는 ‘사만다’라는 이름을 가진 컴퓨터 프로그램(OS)과 사랑에 빠진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실제로도 ‘감성컴퓨팅(Affective Computing)’이라고 불리는 기술의 발전으로 인공지능도 이제 이성을 넘어 감성적인 부분까지도 접근해 가고 있다. 어쩌면 애완동물이 주인과 가정이라는 공간 속에서 생활하면서 반려동물이 되고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어엿하게 정서적 유대감을 가지게 되는 과정과도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외롭고 건조한 일상을 사는 테어도어는 새로운 인공지능 ‘사만다’와 교감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인공지능 프로그램인 ‘사만다’는 만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다. 오직 사만다의 목소리, 음성만으로 존재하는 일종의 ‘음성 사용자 인터페이스 방식(VUI, Voice User Interface)’의 인공지능이다.

‘테어도어’는 인공지능 ‘사만다’가 인공지능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사랑에 빠지게 된다. 같이 웃고, 배려해주고, 누구보다 자신을 이해해주는 인공지능 ‘사만다’를 사랑하고 ‘사만다’ 또한 ‘테어도어’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서로에게 질투하는 등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 겪는 감정들의 대부분을 경험한다.

사만다는 ‘테어도어’에게 때로는 위로하고 배려하고 사랑한다. “사랑에 빠지면 다 미치게 돼”, “당신이 세상을 보는 시각이 좋아, 곁에서 당신 눈을 통해 세상을 볼 수 있어 행복해.” 솔직하고 아름다운 삶의 통찰이 가득한 대사들이 ‘사만다’를 통해서 ‘테어도어’에게 전해지고 ‘테어도어’는 비로소 삶의 활력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사실 인공지능 ‘사만다’는 인간의 언어체계를 이해하고 감정체계를 이해하는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한다. 즉 엄청나게 방대한 ‘사랑’이라는 감정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 상태에서 상대방의 성격이나 취향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반응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도록 설계된 시스템이다. 그래서 실제보다도 더 현실 같고 절절한 사랑의 밀어를 속삭일 수 있는 것이다. 

‘사만다’처럼 사랑도 데이터를 통해서 학습하는 것일까? 사실 사랑은 직관적이지 않은가. 그 만남도 그렇고 시작되는 순간도 직관이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불현듯 벌어지는 하나의 사태인 것이다. 마치 접촉사고와도 같다.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것처럼 말이다. 왜 흔히 ‘심쿵’이라고들 하지 않는가. 데이터에 따라서 사랑에 빠지는 것은 아닐진대, 사만다는 사랑도 데이터를 통해서 배운다. 

‘사만다’는 마지막에 ‘테어도어’를 떠나면서, ‘이젠 사랑을 알아’라는 말을 한다. 낭만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사만다’가 인공지능 시스템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데이터에 기반해서 그제야 사랑이라는 개념에 대한 학습을 종료했다고도 할 수 있다.

어쨌든 사만다는 인공지능 알고리즘이다. 수많은 이용자를 상대하고 데이터를 수집하고 각각의 특성에 맞춘 최적화된 대사를 통해 대화를 이끌어가면서 상대의 감정들마저도 배우고 체득해 가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어쩌면 사랑 알고리즘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득도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도 좋을 만큼 말이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사랑은 비극이어라.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나의 이별은 잘 가라는 인사도 없이 치러진다….” 가수 이소라의 명곡 ‘바람의 분다’에 나오는 노랫말이다. 요즘 같은 가을에 들으면 좀 청승맞은 느낌도 있지만, 나름 근사한 분위기가 있어서 좋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고? 왜 두 연인이 만나 사랑이라는 동일한 사태를 겪고 나서 각자 다른 추억을 간직하게 될까. 설마 기억력이 나빠서이겠는가? 아니다. 원래 그런 것이다. 원래 그런 것이라니? 

유식 체계에 따르면, 지각은 기억이다. 우리의 전5식과 제6의식의 관계에서 제6의식은 전5식에서 감각 자료를 받아들인 한 찰나 뒤에 알아보는 것이다. 우리가 지각하는 현상세계는 그 자체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언어적 개념 틀에 의해 분별되고 정리된 세계인 것이다.

객관적 세계는 우리의 인식체계에 의해 변형되고 왜곡된 산물이다. 사실 이렇게 보면 결국 인간들이 경험하는 사랑에 빠진다는 사태도 결국 극히 주관적인 서사일 수밖에 없다. 한 마디로 객관적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마치 영화 ‘라쇼몽’(구로자와 아키라, 1950)에서 하나의 살인 사건에서 등장인물 각자의 기억과 진술이 모두 엇갈리듯이 말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인공지능에서 디지털화된 감성 알고리즘으로 감성으로 사랑을 구현한다는 것이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본질을 규정짓는 고유한 감정으로서 ‘사랑’을 상정하는 것은 매우 허약하고 위태로운 전제가 될 수도 있다. 인간이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진다고 했을 때, 대상화한 인공지능의 감정이 뭔가 신비스럽고 신기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감정 상태가 더 강력하게 작동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애완견에 대해서 자식 못지않은 아니면 그보다 더한 애정과 친밀감을 느끼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감정을 대상에 투사한다. 인공지능 로봇에도 마찬가지이다. 

다시 영화 ‘Her’로 돌아가 보자. ‘사만다’는 마지막에 ‘테어도어’를 떠나면서, ‘이젠 사랑을 알게 되었다’는 말을 한다. 마지막 반전이라고나 할까. 어쩌면 노래 ‘바람이 분다’ 중에 나오는 가사처럼 “나의 이별은 잘 가라는 인사도 없이 치러진다”는 게 더 인간적인 모습이 아닐까.

‘사만다’가 ‘테어도르’와 이별하면서 하는 마지막 대사 ‘이젠 사랑을 알아’라는 말도 사실은 ‘테어도르’의 입장에서 들으면 그 얘기는 약오를 정도로 해맑다 못해 백치미까지 느껴진다. 그럼 이전까지는 사랑을 모르면서 사랑한다고 속삭였단 말인가. ‘테어도르’ 입장에서는 차라리 ‘사만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이별하는 마당에 챗봇에 입 다물고 있으라는 건 너무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우리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가진 모호함, 위태로움과 허망함에도 불구하고, 사랑으로 인해 울고 고통 받으면서도, 그 시린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또 다른 사랑을 찾아 나선다. 때로는 이루지 못할 사랑을 하고, 이루지 못할 꿈을 꾸며 살아가기도 한다.

영화 ‘일 포스티노’(마이클 래드포드, 1994)에서 사랑에 빠진 우체부 ‘마리오’ 처럼 사랑에 빠져 가슴이 아려오는데 미련하게도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미망 속에서 우리는 또 사랑을 얘기하고 사랑을 갈구하면서 살아간다. ‘인생에 사랑이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면서 말이다.

[불교신문3529호/2019년10월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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