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이 괴물이 될지
관세음보살 화신이 될지
인간의 마음에 달려있다

“어떤 것이 부처님의 참된 몸을 보는 것입니까?”
“있음과 없음을 보지 아니하는 것이 부처님의 참된 몸을 보는 것이니라…
있음(유)은 없음(무)로 인해서 서고, 없음은 있음으로 나타나는 것이니라.
본래 있음을 세우지 아니하면 없음도 또한 존재하지 아니하니
이미 없음이 존재하지 않는데 있음을 어디서 얻을 수 있겠는가.
있음과 없음이 서로를 원인으로 해서 비로소 있게 되니 모두가 생멸이니라.
다만 이 두 견해를 떠나면 곧 부처님의 참된 몸을 보는 것이니라.”
  
-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중에서

 

보일스님

➲ 인공지능과 식(識)

내 머릿속 생각도 해킹당할 수 있을까. 지금 누군가가 내 생각을 다 읽어 내고 있다면 어떨까. 공상과학 만화 이야기가 아니다. 최근 신경과학과 뇌 과학의 연구 성과에 디지털 기술을 접목하여 인간의 지능을 저장하고 이식하려는 기술이 개발 중이다. 대표적으로 UC 버클리대학 연구팀은 고양이를 대상으로 뇌 신경망에서 신경세포를 분석해 시각영상을 재구성하는 실험에 성공했다. 그리고 일론 머스크가 설립한 뉴럴링크(Neuralink) 사는 컴퓨팅 칩과 인간의 두뇌를 연결해서 뇌 질환 치료를 시도하고 있다.

이 기술은 장기적으로는 지능저하, 뇌 기능 손상에 대해 건강했을 때의 뇌 정보를 저장했다가 이식함으로써 그 손상 부분의 복원이 가능해진다는 원리다. 인간과 기계 사이의 인터페이스 기술의 비약적 발전은 인간의 뇌 신호를 디지털화된 상태로 인터넷으로 전송이 가능과 저장이 가능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화두인 ‘초연결’이 현실화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뇌 신호가 인체 외부의 인공지능 로봇을 작동시키는 신호로 기능하거나, 비정상적인 인간의 뇌 신호에 대해 외부의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교정해주고 제어하는 경우,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주고받는 그 신호는 누구의 식(識)이라고 보아야 할 것인가.

오래전에 보았던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에서 인간의 기억을 다운로드받고 업로드 한다는 이야기가 등장했을 때만 해도 만화적 상상력 정도로 여겼던 개념들이 현재 다양한 연구와 실험을 통해 실현돼가고 있다. 이쯤 해서 다시 질문하나. 인공지능도 인간처럼 온전히 인식작용을 할 수 있을까. 즉, 인공지능에도 식이 있을까. 아니면 식이 있는 인공지능이 될 수 있을까. 

➲ 인공지능과 자아(自我)

인공지능이 자아를 갖게 된다는 이야기는 종종 영화화되곤 한다. 일반적으로 인공지능을 ‘약한 인공지능’과 ‘강한 인공지능’으로 분류한다. 그때 기준이 되는 것이 이 자아의식이 있는지 다. 물론 자아에 대한 논의는 강한 인공지능의 출현 가능성을 인정하는 기반 위에 가능한 논의다. 딥 러닝 기술의 개발로 인공지능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지만, 아직 자아의식이 발현되는 수준에는 이르지는 못한다.

향후 인공지능이 자아의식을 갖게 될 것이냐는 문제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입장과 부정적인 입장이 서로 비등하다. 자아라는 것이 스스로 발현된 현상으로 이해되기 때문에 인간의 외부적 조작과 힘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그럼 불교의 관점은 어떠할까.

불교에서는 ‘제7말나식(末那識, manas)’을 통해 대상 의식인 제6의식의 밑바닥에서 꿈틀대는 ‘내가 낸데…’라는 자아의식을 설명한다. 제6의식의 주객분별은 이 제7말나식에 의해 일어난다. 즉 제7말나식은 자신을 몸으로 여기는 동시에 의식 주체로 여긴다. 그래서 인간은 말나식의 작동으로 인해 의식하는 ‘나’ 또는 사유하는 ‘나’가 개별적으로 존재한다고 믿고, 그 ‘나’에 집착하게 된다.

하지만 붓다는 그 의식주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 “나는 느끼는 자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잡아함경> 15, 파구나경)”라고 대답한다. 즉 우리가 실재한다고 믿는 그 의식주체는 인간의 사유와 언어에 의해 조작된 개념체에 불과한 것이지, 그 믿음에 상응하는 자아는 애초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제7말나식은 무명으로 인해 무아를 깨닫지 못할 경우 지속해서 자신을 의식 주체로 착각하고 자신에게 집착하는 만드는 식이다. 한 마디로 가짜(fake)이다. 예를 들어, 환상통을 겪고 있는 환자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감각적 자극을 수용하는 전5식이 작동할 근거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환자는 여전히 통증을 호소한다.

온전한 형태의 신체로 생활했던 습관적 기억이 이미 종자로서 제8알라야식에 저장돼 있고, 그것이 나의 감각 또는 나의 신체라고 외계와 구분 짓는 제7 말나식 작용으로 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선사들이 자주 인용하듯이 우리가 꿈속에서 꿈속의 ‘나’를 나로 착각하여 실재하는 것처럼 때로는 두려워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한다. 꿈속의 ‘나’가 가짜이듯이 일상에서 나를 의식 주체로 여기는 제7말나식의 아견(我見)도 가짜에 불과하다.

여기서 우리가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이 ‘자아의식’이 허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인공지능의 자아의식 발현 또한 사실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니다. 인공지능에도 자아의식이 생겨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나’라는 허구적 분별을 하는 제7말나식을 인공지능도 가지게 될 것인가. 어차피 제7말나식이 허구적 관념 속에서 만들어진 식이라면, 인공지능이 그 허구적 관념을 갖게 되지 말란 법은 없다. 오히려 고도의 연산능력과 인지능력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공고한 자아의식이 생겨날 가능성이 높다. 자신이 실재한다는 착각 말이다. 
 

뉴럴링크 사는 ‘뉴럴 레이스(Neural lace)’라고 하는 아주 얇은 망사를 인간의 두개골에 심어서 뇌의 상태를 모니터링 하는 기술을 개발 중이다. 성공한다면 사람의 두뇌로부터 특정 기억과 정보를 불러들이거나 내보내는 것이 가능해진다. 출처=www.shutterstock.com
뉴럴링크 사는 ‘뉴럴 레이스(Neural lace)’라고 하는 아주 얇은 망사를 인간의 두개골에 심어서 뇌의 상태를 모니터링 하는 기술을 개발 중이다. 성공한다면 사람의 두뇌로부터 특정 기억과 정보를 불러들이거나 내보내는 것이 가능해진다. 출처=www.shutterstock.com

➲ 인간과 인공지능의 연기성

인간들은 인간의 두뇌를 모방해서 인공지능을 만들어 내지만, 다시 그 인공지능은 인간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인간들이 개발해 낸 인공지능 가운데 ‘자비의 화신’이라고 할 만한 사례는 적지 않다. 난민을 위한 심리치료 챗봇 ‘카림(Karim)’, 자살예방 상담 챗봇 ‘크라이시스 텍스트 라인(CTL), 우울증 치료 상담 챗봇 ‘워봇(Woebot)’ 등이 있다. 구체적으로 ‘카림’의 경우, 난민들이 피난 과정에서 공황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심리적 구호 또는 원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부정적 사례도 발생하고 있다.

지난 2016년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개발한 인공지능 챗봇인 테이(Tay)는 처음에는 젊은이들과의 대화를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자신의 닉네임이나 좋아하는 음식 등을 공유하면서 스스로 사람의 대화를 이해하고 대답을 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그러나 스스로 우선 학습했던 건 인간들의 욕설들, 인종차별, 성차별 발언들이었다. 왜냐하면 인종차별 주의자들이 의도적으로 이런 부정적인 언어를 반복적으로 주입한 탓이었다. 결국 테이는 출시 하루 만에 서비스가 종료됐다. 이 사례는 원인이라도 규명할 수 있었지만, 다음의 사례는 더 심각하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새로운 절대 강자로 떠오르고 있는 아마존사는 지난 10년간의 데이터에 기반해 새로운 인공지능 채용시스템을 도입했다. 문제는 이 인공지능 시스템에서 추천한 지원자가 대부분 남자였다는 사실이다. 즉 이 시스템에서 여성보다 남성 지원자를 더 선호하는 패턴이 발견된 것이다.

심각한 여성차별 문제가 대두되기 전에 아마존 사는 스스로 이 프로젝트를 폐기했다. 인공지능이 그렇게 편향된 선택을 하게 된 정확한 원인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추측만 할 뿐이다. 즉 이 인공지능 시스템이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그 일을 처리했는지 알 수가 없다는 뜻이다.

“소가 마신 물은 우유가 되고 뱀이 마신 물은 독이 된다”고 했던가. 인공지능은 인간의 마음이 그대로 투사되는 거울이다. 괴물이 될지 관세음보살의 화신을 만들어 낼지는 인간의 마음에 달려있다. 

➲ 그 많던 불성은 다 어디로?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과학기술은 기존 우리의 상식을 비웃기나 하는 듯 이미 저 멀리 모퉁이를 돌아선 듯하다. 꼬리조차 보이지 않고 어디로 질주하는지 알 도리가 없다. 무상한 존재인 ‘나’와 마찬가지로 인공지능 또한 어떤 완성된 존재가 아니다. 시대와 집단, 개인의 욕망에 따라 끊임없이 변모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진화를 거듭할 것이다.

그 옛날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조주스님께서 “없다”라고 대답했던 ‘구자무불성(拘子無佛性)’ 화두의 4차 산업혁명 시대 버전에도 여전히 유효할까. 불성이 있다, 없다가 문제가 아니라 불성이 있는 존재 ‘되기’로 변모되어야 할 듯하다.

미래사회의 인공지능 로봇과 인간의 정체성이 어떤 식으로 규정될지, 어떻게 변화할지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다. 그러한 맥락에서 인공지능로봇은 우리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훌륭한 자화상이자 거울이 된다. 이제 인공지능은 날로 발전하고 인공지능 로봇은 우리의 일상 속으로 파고들 것이다. 인간과 구분이 힘들어지거나 오히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그리고 인간 보다 더 능력 있고 매력적인 인공지능 로봇의 탄생이 머지않아 보인다.

인간은 축생만도 못하게 날로 흉포해지지만,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보다 더 숭고한 감성과 지성을 갖추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런데도 인간은 그저 인간 중심적인 관점에서 인공지능을 인간에 종속 시켜 이해하려 할 것이다. 여기서 자연스레 다시 떠오르는 질문은 과연 인간답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생명은 무엇인가.

인간과 기계의 차이점이라는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하면서 역설적이게도 새삼 나는 누구인가 또는 무엇인가라는 화두가 부각된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서 봐야 할 것은 불성이 머무는 소재가 아니라 그 불성 자체가 흐르는 모습이다. 사라질 수도 새로 생겨날 수도 있는 유동적이고 역동적인 그 흐름 말이다. 

[불교신문3507호/2019년7월27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