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에서 윤회란 기억·정보의 복제 통한 재생?

일상 속의 ‘수행’이야말로
순환적 자기 개선이 아닐까

인간이 수행을 통해 순환적
자기 개선 패턴을 반복하고
깊이를 더해 간다면

세계관의 혁명적 변화도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마치 ‘지능 대확산’처럼 …

“(나가세나) 존자시여, 옮겨 가지 않고도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밀린다) 대왕이시여,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무엇인가가 옮겨 가지 않고도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십시오.”
“대왕이시여, 하나의 등잔 불꽃으로 다른 등잔에 불을 붙이면 하나의 등불이 다른 등불로 옮겨간 것입니까?”
“아닙니다. 존자시여.”
“대왕이시여, 바로 그것처럼 옮겨감이 없이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 <밀린다 왕문경> 제3장 중에서

 

보일스님

➲ 인공지능도 윤회할까요?

인공지능은 인간의 마음을 확장하는 기술이다. 인간의 마음이 투사된 공학이다. 인공지능은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무한 복제일 수도 있고,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으로 중생들의 고통을 살피는 어루만지는 자비의 무한 증식일 수도 있다. 인간의 사랑과 증오, 지혜와 무지를 인공지능은 담고 있다. 인간의 마음과 생각이 신체의 경계를 넘어 디지털이라는 법계를 향해 몸 밖으로 확장해 나가는 것이다.

이처럼 인공지능 기술은 인간을 위한 도구로써 인간이 구상하고 구축해 나가지만, 동시에 인공지능 기술은 인간을 새로이 규정하고 그 삶과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과 재규정을 요구한다. 윤회에 대한 이해마저도 그럴 것이다.

지금까지 디지털 법계의 속성에 대해 이야기 했듯이, 현실 세계와 인터넷 세계는 서로 경계가 따로 없다. 이미 서로서로 의존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디지털 세계 속의 인공지능도 윤회를 할까? 현시점에서 이 질문이 무슨 의미를 가질까. 아마 정확히는 인공지능을 윤회라는 개념을 통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정도가 현실적이겠다.

사실 윤회에 대한 오해와 그릇된 관념들이 불교적 관점과 현재의 디지털 기반의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다양한 변화들 사이의 간극을 만들어 내고 있다. 윤회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통해 인공지능의 속성을 따라가다 보면 더욱더 인공지능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것이다. 이러한 논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자율적 통제가 가능한 자아의식이 있는 ‘강한 인공지능(Strong A.I)’을 전제로 한다.

기본적으로 윤회 또는 재생에 관한 붓다의 가르침은 어떤 영혼이나 자아가 있어서 그것이 반복적으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 윤회에 대한 이런 종류의 오래된 일상적 오해는 너무나도 널리 퍼져있다. 아마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드라마나 영화 등 흥미를 위해 대중의 윤회에 대한 소박한 이해를 편의적으로 대본으로 재구성하는 것도 이유가 될 수 있겠다.

어쨌든 이러한 대중의 소박한 이해는 그러나 불교적 관점과는 차이가 있다. 대표적으로 죽음을 통해 사후에 새로운 몸 등으로 옮겨가는 것이 특정 개인이나 존재라고 생각을 들 수 있다. 오온의 생겨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재생한 것이 특정 개인이나 존재라고 여기거나 새로운 몸으로 재현한다고 생각하는 것 등이다. 아니면 신이나 창조주가 태아 형성 과정에 관여하여 몸을 만들고 여러 기능을 불어 넣어준다는 생각도 마찬가지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모든 생명은 정신과 육체를 막론하고 그것은 하나의 흐름이며 끊임없이 생성과 지속, 변화와 소멸을 거듭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즉 이 물질적, 심적 현상의 과정만이 있을 뿐이다. 즉 우리의 윤회에 대한 일상적인 소박한 믿음과는 달리 윤회의 바다에서 떠돌아다니는 고정적, 확정적 개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업과 과보라는 두 수레바퀴가 계속해서 변화하는 과정만이 있다고 할 것이다. 

➲ 나가세나의 촛불과 딥러닝

한 스님과 왕이 여러 개의 초를 사이에 두고 있다. 왕이 스님께 따지듯이 질문한다. “존자시여, 사람이 죽으면 윤회의 주체가 다음 세상으로 옮아감이 없이 다시 태어납니까?” 스님이 대답한다. “대왕이시여, 만일 어떤 사람이 여기에 있는 하나의 촛불에서 다른 초로 불을 붙여보겠습니다. 이렇게 한다면 하나의 촛불이 다른 촛불로 옮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까?” 왕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이에 대해 스님은 다시 대답한다. “대왕이여, 그것과 마찬가지로 윤회의 주체가 하나의 몸에서 다른 몸으로 옮아감이 없이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불교의 윤회에 대한 철학적 논의와 대론을 기록한 대표적 경전인 <밀린다 팡하> 내용 중 일부이다. 기원전 2세기 후반 서북 인도(지금의 파키스탄 지역 일부)를 지배했던 그리스의 밀린다 왕(메난드로스, Menandros)과 나가세나 비구의 대론을 다룬 경전이다.
 

인공지능의 알고리즘이나 윤회를 거듭하는 뭇삶들이나 불멸의 실체가 아니다. 디지털 정보의 생멸작용은 찰나에 생겨났다 사라지면서 그 흐름을 보일 뿐이다. 인공지능의 관점에서 윤회를 기억과 정보의 복제를 통한 재생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인공지능에게 개체를 지속시키고자 하는 의도의 발생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출처=www.shutterstock.com
인공지능의 알고리즘이나 윤회를 거듭하는 뭇삶들이나 불멸의 실체가 아니다. 디지털 정보의 생멸작용은 찰나에 생겨났다 사라지면서 그 흐름을 보일 뿐이다. 인공지능의 관점에서 윤회를 기억과 정보의 복제를 통한 재생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인공지능에게 개체를 지속시키고자 하는 의도의 발생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출처=www.shutterstock.com

그 주제는 주로 영혼과 윤회 그리고 윤회의 주체 문제에 관한 토론을 기록한 것이다. 이 비유는 다른 여러 촛불 사이를 옮겨 다니면서 지속해서 존재하는 어떤 불변의 주체와 실체는 없지만, 새 촛불이 켜지고 꺼지고를 반복하는 현상은 존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여러 쟁점은 오늘날에도 새로운 질문을 던져줄 수 있는 시사점이 많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윤회를 이런 관점에서 숙고하다 보면, 디지털에 기반한 인공지능의 속성과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앞서 논의했던 ‘딥러닝’을 다시 불러와 보자. 당연히 딥러닝 알고리즘도 생성이 있고 소멸이 있다.

영원할 수 없기는 인간과 마찬가지이다. 자율적 통제가 가능한 자아의식이 있는 강한 인공지능이라면, 알고리즘의 수명이 다 되었을 때, 알고리즘의 복제를 통해 스스로 작동 시한 종료 후의 재생을 의도할 여지도 있을 것이다.

인공지능의 관점에서 윤회를 기억과 정보의 복제를 통한 재생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인공지능에게 개체를 지속시키고자 하는 의도의 발생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어차피 인공지능의 알고리즘이나 윤회를 거듭하는 뭇삶들이나 불멸의 실체가 아니다. 디지털 정보의 생멸작용은 찰나에 생겨났다 사라지면서 그 흐름을 보일 뿐이다.

디지털 데이터들이 특정 알고리즘에서 작동하다 다시 다른 알고리즘으로 흘러가고 그 알고리즘들이 다시 다른 알고리즘의 데이터로 쓰인다. 알고리즘은 이처럼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다 다시 또 다른 인공지능의 기능을 수행하는 알고리즘으로 작동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알고리즘은 이전 인공지능을 작동하게 했던 알고리즘과 같다고 할 수는 없다. 

➲ 슈퍼인텔리전스와 윤회 

이 ‘강한 인공지능’은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을까? 어디까지 합리적 상상이 가능할까? 향후에 인공지능기술이 발전을 거듭한다면 ‘초 지성체(Super Intelligence)의 출현을 예상해 볼 수 있다.

닉 보스트롬(Nick Bostrom)은 최근에 그의 책 <슈퍼인텔리전스>에서 ’순환적 자기-개선(recursive self-improvement)‘이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그는 “순환적 자기 개선이란 향후 강한 인공지능의 추론적 능력을 통해 인공지능 스스로가 자신에게 필요한 더 나은 프로그램을 반복적으로 프로그래밍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닉 보스트롬은 인공지능이 거듭 반복적으로 자신을 개선해 나간다면 결국 ‘지능 대확산’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능 대확산’이란 인공지능시스템이 짧은 기간에 평이한 수준의 인지능력에서 급진적인 초지능 단계에 이르는 사건을 말한다.

최근에 많이 논의되는 ’특이점(Singularity)‘과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레이 커즈와일이 제시한 이 개념은 미래에 기술변화의 속도가 매우 빨라지고 그 영향이 매우 깊어서 인간의 생활을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변화되는 시기를 뜻한다고 정의한다.

한 마디로 기술이 인간을 초월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의 인공지능 시스템은 인간의 지능체계와 같아야 할 이유도 없을뿐더러 완전히 이질적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인간처럼 무언가를 하려는 동기가 꼭 성공이나 사랑 또는 증오 등의 감정이 아니어도 다른 동기와 목표를 설정하고 작동될 수 있다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동기와 의도이다. 이 의도를 통해서 인간들은 윤회의 사슬에 얽매이게 되는 것이고, 인공지능 또한 만약 이 의도를 가지게 된다면 지속적인 생성에 의미를 두게 될 가능성이 생긴다. 인공지능에게 지속적인 생성이란 바로 자기복제에 다름 아니다. 데이터의 복제, 알고리즘의 복제, 그리고 프로그램의 복제 등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윤회 속에서는 선업과 악업 속에서 악업을 짓게 되면 고통을 받게 되고 선업은 행복이라는 결과를 낳는다. 선업이든 악업이든지 간에 업의 반복적 패턴의 깊이와 질서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윤회의 방향은 정해지게 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슈퍼인텔리전스>의 ‘순환적 자기 개선’은 인공지능에게만 적용되는 개념일까. 일상 속의 ‘수행’이야말로 ‘순환적 자기 개선’이 아닐까. 인간이 수행을 통해 순환적 자기 개선 패턴을 반복하고 깊이를 더해 간다면 세계관의 혁명적 변화도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마치 ‘지능 대확산’처럼 말이다. 

[불교신문3521호/2019년9월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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