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보사찰 천리순례 체험기

힘 드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앞에서 이끌고 때로는 뒤에서 격려해주는 상월선원 만행결사 스님들이 있었기에 삼보사찰 천리순례가 원만히 회향될 수 있었다. 사진은 회향지인 불보종찰 통도사 금강계단에 들어선 회주 자승스님의 발. 천리길 고행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힘 드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앞에서 이끌고 때로는 뒤에서 격려해주는 상월선원 만행결사 스님들이 있었기에 삼보사찰 천리순례가 원만히 회향될 수 있었다. 사진은 회향지인 불보종찰 통도사 금강계단에 들어선 회주 자승스님의 발. 천리길 고행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우리가 가는 길이 맞다면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우리는 반드시 그 길을 가야 한다.” 불법승 삼보사찰을 걸어서 순례하는 18일간의 천릿길 대장정이 10월18일 막을 내렸지만, 이는 순례길을 새로 여는 출발점에 선 것과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423km 대장경, 순례 전 일정을 함께 한 비구·비구니 스님과 한 재가불자의 일일체험담도 잔잔한 감동을 전해준다. 

“부처님 은혜·시은 보답하고 싶었다” 

■ 서울 전등사 회주 동명스님

동명스님
동명스님

송광사에서 해인사를 거쳐 통도사에 이르는 삼보사찰 천리순례를 무사히 회향했다. 주위에서는 70세에 이른 나를 보고 그 어려운 길을 걸을 수 있을까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러나 걷다 죽더라도 끝까지 걷겠다고 결심을 하고, 의미 있는 일이라 여겼기에 삶의 여한을 두지 않았다. 

코로나로 인한 국난을 극복하고 심신이 지친 국민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고, 더구나 불교중흥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려고 흔쾌히 원력을 냈다. 60년 가깝게 출가자로 살아오면서 받은 불은(佛恩)과 시은(施恩), 그리고 은사 스님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효심(孝心)도 담았다. 대중과 함께 천리가 넘는 길을 걸으면서 스스로를 시험해 보고 싶기도 했다. 

순례기간 매일 새벽에 일어나 대중과 걸으며 많은 생각을 했다. 한 곳에 머물며 편안하게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처럼 길 위에서 걷고, 길 위에서 잠을 청할수록 정신은 더욱 또렷해졌다. 몸으로 직접 부딪히는 순간순간이 수행이고 정진이었으니, 수행자로서 이 보다 더 큰 행복이 있겠는가. 걷고 또 걸었다. 우리 국토가, 우리 사찰이 이렇게 아름다운지 미처 몰랐다. 날씨가 좋으면 좋은 대로, 궂으면 궂은 대로 마다하지 않고 걸으며 부처님 법 만난 선연(善緣)에 환희심이 일었다. 

같은 길을 가는 대중이 있어 외롭지 않았다. 비록 몸은 지치고 힘들었지만 ‘마음이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순례하는 곳 마다 따뜻하게 맞이해준 스님과 신도, 그리고 주민들을 만날 때면 피로는 저절로 사라졌다. 일일 순례자까지 200~300명의 대중을 묵묵히 인도하며 솔선하는 회주 스님이 있어 무탈하게 회향할 수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면서 우리 스님들도 이제는 ‘국민이 있는 현장’에서 움직여야 함을 새삼 확인했다. 국민에게 감동을 주는 지도자가 되고 불교인이 될 때 한국불교는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700년 역사를 이어온 한국불교가 가능하게 한 역대 선사(先師)들의 숭고한 뜻을 계승하여 후대에 온전히 물려줘야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음을 알았다. 순례를 하면서 열반에 드신지 반백년이 가까워지는 은사 해안(海眼) 대종사를 시봉하던 시절의 일화가 떠올랐다. 은사 스님께서 살아계실 때는 교통이 불편하여 웬만한 거리는 걸어서 이동했다. 내소사에서 격포까지 70리 길을 은사 스님 모시고 걸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아름다운 추억’을 회고하는 행복한 경험도 했다. 만약 큰스님께서 살아계시면 천리순례를 마치고 온 나를 보고 “그래 수고 많았다”라고 칭찬해주셨으리라.

통도사에서 천리순례를 회향하며 “해냈구나”라는 기쁜 마음이 들었던 것이 솔직한 심경이다. 그날 나는 올바른 수행자로 이번 생을 마감해야겠다고 발원했다. 지금까지 부처님과의 지중한 인연으로 출가사문이 되어 정진을 잘 하였으니, 마지막 순간까지 초심(初心)을 잃지 않겠다는 원력을 세웠다. 

내가 서울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도심포교의 원력을 세운 은사 스님 뜻을 받들면서, 전등사 불사에 물심양면으로 힘을 보태며 고생한 신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천리순례도 크게 응원을 해주었다. 모두 고마운 인연들이다. 

혼자라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삼보사찰 천리순례 동참 대중과 함께 ‘국난극복 불교중흥’을 속성취(速成就)하여 사바세계가 불국정토로 화현되길 발원한다.
 



“예수교인도 감응”…장엄한 순례 ‘환희심’

■ 고창 마하사 주지 정혜스님

정혜스님
정혜스님

행자와 같은 긴장감과 환희심과 참회와 발원과 원력이 교차하는 삼보사찰 천리순례였다. 송광사의 이끼 낀 고색창연한 목우자 지눌스님의 감로탑 앞에 서니 평생 산속에서만 사시면서 청정한 승가와 불교중흥을 위해 애쓰시던 그 원력이 우리 천리순례단의 가슴에도 전해졌다. 순례단도 각자의 자리에서 능력을 개발하여 지극한 정성으로 중생에게 다가가 한국불교 중흥의 초석이 될 것을 서원했다.

새벽 3시 도량석 소리에 일어나 짐을 정리하고 허둥지둥 텐트를 열고나오니 회주 스님께서 벌써 준비 다 하고 나와서 뒷짐 지고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 산같이 우뚝하고 자애로운 모습에 화들짝 놀라 단정히 화두를 챙기며 순간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지고 텐트를 정리하며 정성스러운 묵언정진이 시작된다.

총도감 스님의 수행정진을 알리는 죽비 소리에 사부대중은 칠흑같이 어두운 새벽길에 각자의 화두를 들고 그 옛날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하셨던 것처럼 순례의 발자국을 옮긴다. 사부대중의 맨 앞에서 한 번의 흐트러짐 없이 한결같은 걸음으로 그림같이 우릴 이끌어 주시는 분이 있다. 끝없는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끝없이 펼쳐진 가을 하늘 길을 사부대중은 각자의 힘대로 빠르게 느리게 걷고 뛰고 쉬면서, 아프고 결리고 부르튼 곳을 그저 바라보면서 무념무상절일체(無念無想絶一切)의 경지가 되어 걷고 또 걸었다.

길 위에서 먹고 길 위에서 잠자면서 환희심과 참회와 고통과 격려를 함께 나누고 같은 원력을 세우면서 서로의 몸과 마음속으로 녹아들어간 순례단은 어느 순간 하나가 된다. 뛰어난 사람보다 잘 견디며 정진하는 모습이 훌륭해 보였고, 순례단 모두가 53선지식이 되어 깨우침을 주시고 화엄세계를 장엄하심을 느꼈다.

순례단 발자국 소리에 천지가 감응했다. 곳곳마다 지방단체장들이 순례단을 더욱 빛나게 해 주었고 또는 회사 직원 전체가 나와서 환영해 주고, 마을회관 어르신들의 끝없는 자비심에 감사했다. 종단과 교구본ㆍ말사 소임자 스님들, 지역 사암연합회 스님들, 불자님들의 격려의 박수와, 물결치는 현수막의 법문은 불보살님들의 큰 가피력이었다. 이렇게 받은 큰 사랑을 코로나로 힘들어하는 국민들에게 회향하겠다고 순례단들은 자신과 약속을 한다.

순례단의 장엄한 행렬은 예수교인도 감응시켜 새벽에 일찍 일어나 자신들의 방앗간을 쉼터로 내주었다. 빗속을 걸으니 온몸이 젖고 신발이 젖어 발이 부르트고 추위는 뼛속까지 타고 들어온다. 그래도 순례단의 장엄한 행렬은 계속되었다. 부처님께서도 1250인의 제자들과 이렇게 걸으셨겠구나 생각하니 환희심이 나면서도 그 당시에는 얼마나 더 힘드셨을까 빗물과 함께 효심의 눈물도 흐른다. 불교중흥과 국난극복의 장엄한 순례단을 이끌어가는 분들의 고심은 또 얼마나 클까. 정진을 더 잘해야겠다는 비장한 각오가 선다.

“밝고 밝은 백 가지 풀끝에 밝고 밝은 조사의 뜻이다”라고 방거사가 법문을 하니 딸인 영조가 “그것도 법문이라고 하십니까”하고 반박을 한다. “그럼 네가 한번 해보라” 하니 영조가 방거사와 똑같은 법문을 한다. 명명백초두(明明白草頭) 명명조사의(明明祖師意)!

별 수가 없다. 선지식은 말의 방망이를 짊어지고 들어간다. 왜 방망이를 짊어지고 들어가는 걸까? 아 선지식의 무아대자비심(無我大慈悲心)이여! 
 



성지순례에서 깨달은 부부의 길

■ 구본철 동국대 경주캠퍼스 교수 불자회장

구본철
구본철

상월결사의 불교중흥 프로젝트로 삼보사찰 천리길 성지순례 일정에 아내는 들떠있었다. 아내가 성지순례의 일일 참가자로 부부동반을 제안했다. 주말부부로 서로 근무하는 대학이 달라 날짜를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미적거리는 나를 밀쳐두고 아내는 먼저 길을 나섰다. 아내는 성지순례 10일차 해인사 순례길을 택했다. 10월9일 밤 조계사에서 버스를 타고 해인사에 도착해 고령을 잇는 길을 아내는 걸었다. 해인사의 새벽 공기가 너무도 맑았고, 별이 머리 위에 가깝게 떠 있었다 한다. 길은 전반적으로 완만한 내리막이었지만, 앞서 가는 스님들의 걸음이 너무 빨라 쫒아가기 힘들었다 한다.

아내는 며칠간 몸살을 했다. 신체적 고통보다 정신적 만족감을 느낀 아내는 나의 순례일정을 확인한다. 불교종립대학의 교수불자회장으로서 나의 의무감마저 캐묻는다. 나는 수업이 없는 일요일인 10월17일 일일참가자로 신청했다. 밀양 표충사에서 출발하여 사자평에 올라 배내골을 지나는 길이었다. 알고 보니 성지순례의 모든 일정에서 가장 힘든 길이었다.

17일차 순례길은 이야깃거리가 많다. 갑작스레 영하로 떨어진 추위에 출발시간이 1시간 늦춰졌다. 새벽 4시 아침예불을 마치고 순례가 시작되었다. 첨부터 오르막이었다. 묵언(默言)이라 쓴 팻말을 목에 걸고 어두운 길을 나서는 데 장갑을 낀 손끝이 시렸다. 손전등을 더듬이삼아 사방이 캄캄한 산길을 오르다보니, 경허선사의 구도적인 삶을 그린 <길없는 길>이란 최인호의 소설 제목이 문득 떠올랐다. 해인사 순례길에서 아내가 보았다던 별이 내 머리위에도 떠 있었다.

가파르게 이어진 산 능선을 넘어서니 아침 햇살이 해발 1000m 사자평에 펼쳐진다. 사명대사께서 승병을 훈련시켰다던 사자평의 넓은 억새고원은 때마침 절경이었다. 황금색 억새물결을 허리에 두룬 푸른색 소나무가 저 멀리 우뚝 서서 순례행렬을 맞는다. 흰색 두루마기를 입고 순례단을 찬양하는 장사익 선생의 노랫가락이 억새 숲을 휘감아 돈다. 아침 공양장소인 사자평에서 지게에 진 찐방을 건네는 스님의 모습도 감동을 준다. 휴식도 잠시, 1시간 늦게 출발했기에 내리막길에 접어들자 하산속도는 빨랐다.

회향길로 향하는 순례행렬에서 큰 의미를 찾는다. 앞에 선 상월선원 만행결사 회주 큰스님과 선두의 스님들이 엄숙하게 길을 만들어 간다. 승가대학 학인 스님들이 그 길을 경건히 뒤따른다. 재가불자가 묵묵히 따라 걷는다. 동국대 청년불자와 상월청년회가 씩씩한 걸음걸이로 그 길을 받혀준다. 이것이 불연(佛緣)으로 맺어진 사부대중의 길일 것이다.

이렇듯 길은 이어져야 한다. 길은 또 서로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 천리로 이어진 이 길을 열어가는 스님들의 결사에 단 하루 참가자로서 부끄러움이 생긴다. 불교중흥과 국난극복의 큰 원을 세워 18일간의 대장정을 앞장서 이끈 큰스님들의 불력(佛力)에 고개가 숙여진다. 회향장소에 도착해 점심공양을 끝으로 17일차 나의 일일순례는 끝났다. 역시나 아내의 불심은 나보다 깊었다.

아내는 18일차 순례일정에 다시 동참했다. 아내는 서울에서 내려와 울산캠핑장에서 통도사로 들어오는 마지막 순례길을 걸었다. 아내는 내가 마무리 못한 마지막 회향순례를 이어주었다. 우리는 서로 출발하는 길은 달랐지만, 그 길은 하나로 이어졌다. 우리부부는 길을 함께 이어가는 도반이 되었다.

[불교신문3689호/2021년11월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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