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월선원 동안거 결제 전 만난 자승스님

8년을 조계종 행정수반으로 지낸 자승스님은 총무원장직에서 내려온 뒤 두 번의 겨울을 인제 백담사 무문관에서 정진했다. 세 번째 겨울 스님은 설악산 대신, 노천에 천막을 치고 대중과 결사에 들어갔다. 위례 천막결사 상월선원이 그곳이다. 묵언으로, 하루 한 끼에, 옷 한 벌로 겨울을 나는 중이다. 씻는 것도 거부했다. 삭발, 면도도 하지 않고 양치질과 손 씻기 정도로 한 철을 지낸다니 걱정 반 우려 반의 시선이다. 

스님은 한국불교 초유의 천막결사를 왜 택했을까. 상월선원에 부처님을 모신 동안거 결제 일주일 전, 자승스님을 만났다. 총무원장 퇴임 후 2년만에 첫 만남이었다. 스님은 차담을 나누며 지금껏 세간에 밝히지 않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설악산 무문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불기 2563년 기해년 동안거 결제일인 지난 11월11일, 상월선원으로 향하는 전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스님의 모습. “노래하는 것도 염불하는 것도 다 용맹정진이고 결사”라고 말한 자승스님은 위례 천막법당이 누구나 찾아와 편하고 신명나게 기도할 수 있는 법석의 장이 되길 희망한다며 내년 봄에 만나자는 인사를 남기고 천막선원으로 들어갔다. 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불기 2563년 기해년 동안거 결제일인 지난 11월11일, 상월선원으로 향하는 전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스님의 모습. “노래하는 것도 염불하는 것도 다 용맹정진이고 결사”라고 말한 자승스님은 위례 천막법당이 누구나 찾아와 편하고 신명나게 기도할 수 있는 법석의 장이 되길 희망한다며 내년 봄에 만나자는 인사를 남기고 천막선원으로 들어갔다. 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백담사 무문관 두 차례 동안거
책속 어디에도 없는 깨침 얻어

자승스님은 총무원장 소임을 내려놓고 맞은 2017년 첫 겨울에 무문관으로 향했다. 조계종 행정부 수장을 지낸 8년간 여느 총무원장 스님보다 광폭 행보를 보여줬던 스님이 세상과 단절하고 무문관에 들자 사람들은 놀라워했다. 문을 걸어 잠그고, 3평 남짓한 방 안에서 스님은 홀로 침잠했다. 석 달 후 해제일 스님은 홀쭉해진 볼과 날카로운 턱선, 움푹 들어간 눈에 안광을 빛내며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많은 이야기가 오가지 않았지만, 달라진 모습을 통해 그간의 변화를 짐작할 수 있었다.

무문관에서 두 번의 겨울을 지내면서 스님은 첫해에는 철저히 소식했다. 하루 한 끼 먹는 공양인데 그마저 양을 줄인 것이다. 먹는 양을 최소화하고 정진하면서, 체중이 급격하게 줄었다. 두 번째 겨울에는 장좌불와(長坐不臥)했다. 누구 하나 지켜보는 이 없지만 홀로 눕지 않고 3개월간 정진하며 스님은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나갔다.

그 시간은 어떤 의미였을까. 스님은 누군가에게 얘기를 듣고, 글을 읽어서는 절대 알 수 없는 깨달음을 무문관에서 얻었다고 했다. 먹는 것을 최소로 하고 정진할 때 진짜 배고픔을 경험했다. 밤새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리는 날이 이어졌다. 몸이 보내는 배고픔의 신호는 이성으로 다스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식탐을 버리고 싶었지만, 허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 스님은 먹고자 하는 욕구, 식탐이 이 시대 사회문제의 시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욕망의 화신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따라가니 그 시작점에 식탐이 있었다. 스님은 현대인에게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욕망이 남보다 더 많이, 더 좋은 걸 먹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마음이 커지면, 때론 다른 사람을 음해하기도 하고,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가는 일 또한 서슴지 않는다는 비정함도 이해했다.

한편으로 스님은 스스로 지혜로우면 시비에 휘말릴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러니저러니 좋지 않다고 트집을 잡는 것도 욕망에서 비롯된 것인데, 끊임없이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들을 굳이 탓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한강의 수원은 따로 있는데, 수원은 못 보고 한강 물이 넘치는 얘기만 하는 것이나 시비 거는 사람을 탓하는 것은 모두 다 본질을 벗어났다는 의미다.

인간 숱한 욕망 ‘식탐’서 비롯
자기변명 하는 본성 알아차려

장좌불와하며 일주일 용맹정진할 때 역시 특별했다. 앉아서, 서서, 기대어 있다가 쓰러지길 수차례 반복해야 했다. 문득 앉아있다고 생각했는데 의식을 차리고 보니 자신이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눈 깜빡할 사이임에도 스님은 자신에게 ‘나는 누워있는 게 아니라 엎드려 있는 것’이라고 변명했다.

그러다 “내가 누워있든 엎드려있든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는데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끊임없이 변명하고 자신을 정당화하려 애쓰는 우리 본성을 새삼 알아차린 순간이다. 자신을 변호하고 합리화하는 본성을 다스리기 쉽지 않기 때문에 변명을 일삼는 사람들에 대한 시선도 너그러워졌다. 상대적으로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진솔하고 솔직한 사람들에 대한 평가는 높아졌다. 

두 번의 동안거 기간 스스로 가두고 깨달음을 얻은 자승스님은 세 번째 안거를 맞아 삶터로 내려왔다. 처음엔 겨우내 서울역에서 혼자 노숙을 하며 수천 명 노숙인과 교감하려고 했다. 계획은 단출했다. 함께 찬바람 맞으며 생활하는 스님을 찾아와 합장하고 인사하며 스님과 불교가 먼 곳에 있지 않다는 걸 알게 주는 것이다.

또 찾아온 이들에게는 따뜻한 밥 한 그릇과 부처님 법을 전하고자 했다. 처음 뜻을 밝히자, 주변 스님들은 하나 같이 만류했다. 위험하기도 했고, 혼자보다 여럿이 함께하자는 의견이 모이면서 대중이 꾸려졌다. 서울역과 탑골공원, 광화문 등이 물망에 올랐지만 어려움이 많았다. 마침내 종단이 신도시 포교에 뜻을 둔 위례를 천막결사 장소로 확정했다.

비닐로 천장을 덮은 선방에서 정진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승스님은 40여 년 전 설악산 봉정암에서 5개월을 지내며 매서운 눈바람과 추위를 벗삼아 치열하게 정진했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군복무를 마치고, 출가자로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봉정암 기도를 결심한 것이다. 그때만 해도 봉정암은 함석지붕으로 된 인법당과 산신각, 대피소, 화장실이 전부인 암자에 불과했다.

안온함 버리고 고단함을 선택
깨달음을 향해 한 발 더 나가

눈이 한 번 오면 함석집 처마까지 눈이 쌓여, 화장실에 가려면 눈을 헤치고 길을 만들어야 했다. 등산로마저 눈에 덮여 혼자 내려갈 수도 없었다. 그 시절 설악산 매서운 눈바람과 강추위를 몸으로 견디며 하루 8시간씩 정진하며 기도한 스님이기에 난방 없이 석 달을 나는 이번 상월선원에서의 추위 걱정은 하지 않는다고 스님은 말했다.

위례 천막결사 상월선원의 청규는 대중 스님들 뜻으로 정해졌다. 일반인은 엄두도 내기 어려운 청규다. 애초에 노숙할 생각이었던 스님은 난방시설을 이용하거나 옷을 갈아입지 않을 작정이었다.

게다가 천막정진 중에 아침저녁 화장실 세면대에서 세수하고, 씻는다고 대중목욕탕에 가고, 개수대에서 양말을 세탁하는 행위가 결사의 뜻을 흐릴 우려가 있다고 스님은 말했다. 선방에 흔히 있는 고급 보이차와 커피 대신 일회용 티백으로 갈증을 달래는 것도 풍요로움 속에서 간과했던 공양에 소중함을 깨달았으면 하는 마음이 담긴 청규다. 

묵언정진, 하루아침에 말문을 닫는 일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침묵 속에서 스님들은 이해와 인내를 절감할 것이다. 다행인 것은 결제에 든 대중 모두 정진력과 인욕이 몸에 뱄다고 정평이 난 수행자들이라는 점이다.

자승스님은 결제 기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배려’를 꼽았다. 대중이 함께 지내다보면 경계에 부딪힐 때도 있다. 그럴수록 서로 격려하고 탁마하며, 인내하고 정진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수행자가 자기만 생각하면 한 철은커녕, 첫날부터 석 달 내내 후회하며 지낼 수도 있다. 자승스님이 “나보다 다른 스님을 배려하는 마음을 근본으로 삼으라”고 강조했다. 

목숨 건 결사 쇄신기회 될지 
밖에 있는 대중 역할에 달려

혹자는 청규를 과연 잘 지킬까 하고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한다. 자승스님은 “자신을 속여 가며 정진할 이유가 있나? 밖에서 뭐라고 하든 말든 우리 스스로가 지키는 게 중요하다”며 “청규대로 살 뿐”이라고 말했다. 이런 스님들의 수행 생활은 CCTV로 전부 다 기록된다. 선원에 입방 순간부터, 문을 열고 나오기까지 3개월의 밤낮이 모두 담긴 영상은 외부로 공개되진 않는다. 뜨거운 성원에 힘입어 다큐멘터리가 제작되길 기대할 뿐이다.

고요함으로 점철된 여느 선방과 달리 상월선원은 동안거 내내 야단법석이 펼쳐진다.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스님과 신도들이 이곳에서 기도 정진을 이어오기 때문이다. 때로는 목탁과 북을 치며 정근하고, 때로는 신심나는 찬불가 공연이 한바탕 펼쳐지기도 한다. 자승스님은 “시끄러움 속에서 고요함을 찾는 것은 우리 몫이니, 그저 외호대중은 힘찬 기운으로 스스로 기도하고 공부하라”고 했다. 

11월11일 동안거 결제날, 자승스님은 “노래하는 것도, 염불하는 것도 다 용맹정진이고 결사다. 밴드를 불러 노래하고 국악마당을 펼쳐도 좋다. 사부대중이 어울리는 법석, 종교와 성별을 불문하고 누구든 와서 큰 마당을 만들어 달라”고 당부하면서 “내년 봄에 만나자”면서 환한 웃음을 머금고 천막선원으로 들어갔다.

선방문은 굳게 잠겼고, 이 문은 2020년 2월7일에야 비로소 열린다. 9명 스님들의 목숨을 건 결사를 쇄신의 기회로, 중흥의 계기로 만들지는 오롯이 밖에 있는 사람들의 몫이 됐다. 내년 봄, 스님들이 ‘문 없는 문’을 부수고 나오는 날. 그 날 불자들과 스님들, 한국불교는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불교신문3542호/2019년12월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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