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70주년, 6·25와 불교] 통도사 육군병원에선 어떤 일 있었나?
[한국전쟁 70주년, 6·25와 불교] 통도사 육군병원에선 어떤 일 있었나?
  • 이성수 기자
  • 승인 2020.06.21 06:05
  • 호수 3592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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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문 창간 60주년 특별기획’
“통도사야 잘 있거라…전우들은 가련다”


대광명전 부상병 낙서, 목격자 증언
전각마다 ‘상이용사’ 머물며 요양
통도사 스님들, 군인 병수발 뒷바라지

경전을 부싯깃으로 사용 유물 훼손도
피난민 수천 명 경내 하천에 머물러
현문스님 “역사적 사실 확인한 증거”

“가노라 通度寺(통도사)야 잘 있거라 戰友(전우)들아, 情(정)든 通度(통도)를 두고 떠나랴고 하려마는, 세상이 하도 수상하니 갈 수 밖에 더 있느냐.” 한국전쟁 당시 전투에 참여해 부상을 입은 병사가 통도사 대광명전에 남긴 낙서이다. 통도사에 설치된 31육군병원분원(정양원)에서 치료 받고 퇴원하는 시기에 쓴 것이다. 나라를 위해 총을 들었던 부상병들이 머물던 통도사 육군병원의 존재를 확인하는 자료와 증언을 요약했다. 

대광명전 벽면에 있는 ‘단기 4284년 4월29일 퇴원자 출발’이란 낙서. 단기 4284년은 1951년으로. 통도사 육군병원에서 퇴원한 장병이 남긴 글이다.
대광명전 벽면에 있는 ‘단기 4284년 4월29일 퇴원자 출발’이란 낙서. 단기 4284년은 1951년으로. 통도사 육군병원에서 퇴원한 장병이 남긴 글이다.

 

○… “통도사야 잘 있거라, 전우는 가련다” “전우야 잘 있거라 나는 간다” “통도사와 이별한다” 전우들과 헤어지는 아쉬움과 더불어 통도사를 떠나는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부상병들의 낙서는 대광명전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 가운데는 ‘停戰(정전)이 웬 말?“이란 구절도 보인다.

이병길 양산 보광중 교사는 “1951년 7월에 정전 반대 궐기대회가 서울과 부산 등에서 일어났다”면서 “전쟁 상황이 아니면 ‘정전’이란 단어를 사용할 수 없고, ‘정전’과 ‘전우’라는 용어는 군인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고 통도사 육군병원의 존재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 통도사 대광명전 벽면에는 국군 부상병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이름도 적혀 있다. 이창규(李昌奎), 진기준(陳基俊), 김정례(金貞禮), 김순동(金舜東) 등이다. 부상병 자신 또는 부모 형제의 이름을 적은 것으로 추정된다. 통도사 육군병원에서는 매일 10여 명의 부상병이 치료를 받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죽음의 경계를 오가는 20대 전후의 젊은 부상병들이 사랑하는 가족이나 연인의 이름을 적었던 것이다. 누란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지키기 위해 전선에서 생명을 바쳐 싸운 청년들의 아픔이 70년 세월을 넘어 느껴진다.

○… 부상병들이 남긴 낙서 외에도 그들이 그린 그림이 다수 남아 있다. 아이 얼굴과 모자 그리고 모자 쓴 얼굴, 탱크, 트럭 등 다양한 그림들이다. 전문가 솜씨는 아니지만 전장(戰場)에서 부상을 입고 통도사 육군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부상병들이 그린 것이다. 집에 두고 온 아이를 떠올리며 그렸을 ‘아이 얼굴’은 전장에 나선 ‘젊은 아버지’의 애타는 마음과 자식에 대한 사랑이 묻어난다. 또한 대광명전 북쪽 외부벽면에 그려진 탱크와 트럭은 전투가 일상이었던 군인들의 현실을 증언한다.

○…대광명전에 낙서가 남아 있는 이유는 통도사의 다른 전각과 달리 개보수(改補修)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병길 보광중 교사는 “혹시나 하여 다른 전각을 전부 돌아 보았지만, 지금까지 대광명전을 제외하고 낙서를 발견하지 못했다”면서 “확인해보니 한국전쟁 이후 7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대광명전 벽면은 새로 보수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병길 교사는 “대광명전 낙서는 한국전쟁 당시 제31육군병원 통도사 분원(정양원)의 존재를 확인하는 증거로 낙서도 충분히 역사문화유산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부상병들이 대광명전 벽면에 그린 그림들. 위부터 탱크, 모자, 아이얼굴이다.
부상병들이 대광명전 벽면에 그린 그림들. 위부터 탱크, 모자, 아이얼굴이다.

○…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전쟁 발발 후인 1951년 2월 군의관으로 입대한 김진조 부산 김내과 원장은 “부산 제5육군병원으로 발령받아 일요일에 구하 큰스님께 인사드리러 통도사를 방문했는데, 당시 제31육군병원 분원이 주둔하면서 일반인 출입을 통제했다”고 증언했다. 김진조 원장은 구하스님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도 전했다.

김진조 원장은 “제31육군병원이 통도사에 들어와 스님들을 사찰에 머물지 못하게 하였으나, 일부 스님들은 남아있었다”면서 “산문 밖을 나간 스님들은 통원하여 부상 군인들의 각종 병 수발및 뒷바라지, 허드렛일을 하고, 사망한 군인들의 시신은 종교의식을 통해 장례를 치르는 등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군인들이 통도사 경내에서 소를 잡고 보물급 문화재가 훼손되거나 없어진 사실도 증언했다. “통도사 경내의 법당 옆 밭(지금의 설법전 자리)에서 소를 잡고 있었으며, 각 전각은 병원 사무실, 치료실, 수술실 등 상이군인들의 요양시설로 사용됐습니다. 군인들이 군화를 신고 법당을 드나들었고, 법당 안에 있는 경전은 부싯깃(부싯돌을 칠 때 불똥이 박혀서 불이 붙도록 하는 물건)으로 사용하고, 보물급 문화재 유물이 파손되거나 태워 없어졌습니다.”

○… 이병길 교사는 양산에 거주하는 보광중 졸업생을 만나 당시 상황을 청취했다. 1947년부터 1951년까지 보광중에 재학한 안정철(1932년 생)씨는 “통도사에 31육군병원 분원이 있었는데, 상이군인 가운데 위중한 환자들이 많았다”면서 “천왕문에서 불이문 사이(하로전)의 영산전, 극락전, 약사전 등 전각마다 군인들이 가득 차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어 “만세루와 보광중 건물에는 환자들이 없었다”면서 “학생들은 보광중 건물에 스님들은 군인들이 사용하지 않는 법당에 있었다”고 전했다. 보광중은 통도사에서 설립한 명신학교를 계승한 통도중학교의 후신으로 지금의 성보박물관 자리에 있었다.

○… 1951년 보광중학교를 졸업한 김학조(1933년 생)씨는 “군병원이 있는 통도사에 학생들이 출입하는 것을 금지했다”면서 “위생병들이 시신을 들것으로 가져와 (보광중)학교 앞에서 차에 실어 통도사 화장장에 가서 나무로 태웠다”고 당시 참혹한 상황을 전했다.

1948년 7월1일부터 1951년 7월7일까지 보광중학교를 다닌 김두형(1934년 생, 당시 중학교 2학년)씨는 “통도사에 ‘31육군 정양원’이 있었는데, 보광중 교실을 환자들이 차지했다”면서 “갑자기 들이닥쳐 교실을 빼앗긴 학생들은 만세루와 명월료 등에서 수업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증언했다.

증언에 차이가 있는 것은 70년이란 오랜 세월이 흘러 기억이 조금 희미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통도사에 육군병원이 설치되어 수많은 부상병이 치료받은 사실만은 분명하다.
 

한국전쟁 당시 통도사 경내에 있던 보광중학교. 1953년 제5회 졸업앨범에 수록된 사진이다. 지금의 통도사 성보박물관 자리이다. 제공=이병길 보광중 교사
한국전쟁 당시 통도사 경내에 있던 보광중학교. 1953년 제5회 졸업앨범에 수록된 사진이다. 지금의 통도사 성보박물관 자리이다. 제공=이병길 보광중 교사

○…1949년 9월 1일부터 1952년 3월 23일까지 보광중에 다닌 류득원(보광중 4회 졸업생)씨는 “지금의 박물관 자리에 있는 학교에 어느날 갑자기 군인들이 와서 환자들로 꽉 찼다”면서 “학생들은 보광전과 감로당 등에서 공부를 했고, 법당 안에는 전부 환자들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어 “통도사와 무풍교까지 하천에 함안에서 온 피난민 수천 명이 있었다”고 증언해 통도사가 군인뿐 아니라 민간인들의 피난처로 활용됐음을 전했다.

○… 1952년 출가한 통도사 전 방장 원명스님은 이병길 교사를 만난 자리에서 “당시 통도사 원주실 근처 외양간에 머슴들이 자는 방에 일암스님과 만암스님이 계셨다”면서 “군인들이 다른 스님들은 절에서 나가게했다”고 전했다. 이어 스님은 “군인들이 사망하면 한꺼번에 화장터에서 태웠는데, 전쟁이 끝난 후에 법당 바닥 아래에 군인들이 자른 머리카락이 수북해서 치운다고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밝혔다.

○…통도사에 분원(分院)을 운영한 제31육군병원(육군정양병원)은 1950년 12월 대전에서 창설한 부대이다. 1951년 1·4후퇴 때 부산으로 이전한 것으로 보인다. 정양원(靜養院)은 몸과 마음의 안정이 필요한 부상병을 치료하는 병원이다. 제31육군병원(정양원)은 1951년 1월 25일 부산 동래 들판에 국방색 천막을 치고 운영됐다.

이후 부상병이 증가하면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양산 통도사와 부산 범어사에 정양원을 설치했다. 1951년 1월25일자와 3월3일자 동아일보에는 동래 정양원 개소 소식과 이승만 대통령이 방문해 위문품을 전달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 … 영축총림 통도사 주지 현문스님은 “한국전쟁 당시 통도사에 육군병원이 설치된 사실을 정부에서 인정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있다”면서 “정부에서 이같은 사실을 인정받은 후에는 국가에 생명을 바친 전몰장병과 유주무주 고혼을 위해 위령재를 지낼 예정”이라고 밝혔다.

현문스님은 “구하 큰스님이 직접 쓴 용화전 복장물 연기문에 나와 있듯이 한국전쟁 당시 통도사는 ‘형언할 수 없이 처참한 상황’이었다”면서 “이번에 나온 자료와 증언 등 역사적 사실에 국민들도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통도사 대광명전 어떤 건물인가?

3구역으로 나뉜 통도사의 가람 배치 가운데 중로전(中爐殿)의 중심 건물로 1827호이다. <통도사약지(略誌)>에 따르면 창건 당시 지어진 전각이다. <대광명전삼성공필후현판(大光明殿三成功畢後懸板>에 의하면 1756년 10월 화재로 전소된 후 1758년 9월 중건했다. 대광명전 내부 좌우측에는 화재를 막기 위해 화마진언(火魔眞言)이 적혀 있다.
 

통도사 육군병원 건물의 하나로 사용된 대광명전. 부상병들의 낙서가 다수 발견됐다.
통도사 육군병원 건물의 하나로 사용된 대광명전. 부상병들의 낙서가 다수 발견됐다.

통도사=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불교신문3592호/2020년6월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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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수 2020-06-22 00:04:36
지적 감사합니다. 고쳤습니다. 이성수 합장

문영선 2020-06-21 18:43:24
전생 상황이 아니면 ‘정전’이란 단어를 사용할 수 없고,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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