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통도사에 육군병원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통도사에 육군병원 있었다”
  • 이성수 기자
  • 승인 2019.09.30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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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병원 존재 사실 자료 첫 발견
용화전 불상 복장 연기문 나와
국군 상이병 3000여 명 치료
매일 10여명 이상 전사 ‘참혹’
지난 9월26일 통도사 용화전에서 나온 연기문. 한국전쟁 당시 통도사에 육군병원이 설치돼 3000여 명의 상이용사가 머물렀음을 증명했다.
지난 9월26일 통도사 용화전에서 나온 연기문. 한국전쟁 당시 통도사에 육군병원이 설치돼 3000여 명의 상이용사가 머물렀음을 증명했다.

한국전쟁 70주년을 한 해 앞두고 통도사에 제31육군병원이 존재한 사실을 뒷받침 하는 자료가 처음 발견됐다.

영축총림 통도사(주지 현문스님)는 9월26일 용화전 미륵불소조좌상의 복장유물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1952년 9월 작성된 ‘용화전 미륵존불 갱(更) 조성연기’를 발견했다. 구하스님이 붓글씨로 쓴 연기문에는 “경인년(庚寅年) 6월 25일 사변 후 국군 상이병(傷痍兵) 3000여 명이 입사(入寺)해 (불기) 2979년 임진(壬辰) 4월 12일에 퇴거했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경인년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이며, 임진년은 1952년이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후 통도사에 육군병원이 긴급히 설치돼 1952년 4월까지 2년 가량 운영됐음을 증명하는 자료이다. 같은 해 7월 16일 북한군이 포항-대구-마산을 잇는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온 사실을 감안하면 통도사에 육군병원이 마련된 것은 전쟁이 일어난지 한 달이 채 안되는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지난 9월27일 영축총림 통도사 방장 성파스님이 용화전 불상에서 나온 연기문을 비롯해 복장물을 살펴보고 있다. 이날 방장 성파스님은 불교신문에 선대 스님들에게 전해들은 한국전쟁 당시 통도사 육군병원에 대해 증언했다.
영축총림 통도사 방장 성파스님이 지난 9월27일 용화전 불상에서 나온 연기문을 비롯해 복장물을 살펴보고 있다. 이날 방장 성파스님은 불교신문에 선대 스님들에게 전해들은 한국전쟁 당시 통도사 육군병원에 대해 증언했다.

정확한 명칭은 제31육군병원 통도사 분원(分院)이다. 이는 1951년 10월 24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상이군에 양말 이 대통령이 증여’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확인 가능하다. 동아일보는 이승만 대통령이 제31육군병원 통도사 분원에 정양(靜養) 중인 상이장병들에게 양말 1600족(足)을 전달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또한 당시 분원장은 ‘장○○군의중령(軍醫中領)’이라고 보도했다.

3000여 명이 넘는 부상병을 치료하는 육군병원이 설치된 통도사가 입은 피해는 심각했다. 국군의 갑작스러운 소개령(疏開令)으로 스님들은 걸망도 제대로 꾸리지 못한 채 통도사를 비워야만 했다. 그렇지만 일부 스님들은 부처님을 모신 도량을 떠날 수 없다며 통도사에 남아 부상병 치료를 도왔다. 또 다른 스님들도 멀리 떠나는 대신 사하촌에서 지내며 부상병을 간호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육군병원에는 낙동강 전선에서 부상을 입은 병사들이 수용됐다. 큰절의 전각은 물론 산내 암자까지 부상병으로 가득찼고, 일부 시설은 병원 사무실, 치료실, 수술실 등으로 사용됐다.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천년고찰이지만 사찰의 기능은 일순간에 정지되고 부상병의 신음소리로 가득찼다. 또한 이 무렵 통도사에 전해오던 다수의 불상, 경판, 문헌 등 성보문화재가 혼란 속에 유실되거나 훼손됐다. 대웅전과 설법전 사이의 명부전은 군교회로 사용하기도 했다.
 

연기문이 나온 용화전 미륵불소조좌상. 한국전쟁 당시 육군병원이 있으면서 완전히 훼손된 것을 1952년 9월 새로 조성했다.
연기문이 나온 용화전 미륵불소조좌상. 한국전쟁 당시 육군병원이 있으면서 완전히 훼손된 것을 1952년 9월 새로 조성했다.

이번에 발견된 연기문에 따르면 “(육군병원) 퇴거 후 사찰 각 법당, 각 요사(寮舍), 각 암자, 전부 퇴패(頹敗, 무너지고 깨짐)는 불가형언중(不可形言中, 말로 표현할 수 없음)”이라고 당시 통도사의 처참한 상황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또한 “용화전 미륵불이 영위파손(永位破損, 영원히 파괴)되야 불가견여(不可見餘, 못 볼 지경)”라는 연기문 내용은 육군병원을 운영할 당시 용화전 불상이 복구가 힘들만큼 완전히 파손돼 새로 조성한 사실이 확인됐다. 연기문에 ‘다시’를 의미하는 ‘갱(更)’이 들어간 것은 불상이 파괴되어 새로 모셨기 때문이다.

연기문에는 용화전 불상을 조성할 때 자운스님과 월국스님이 증명을 맡은 사실을 비롯해 양공, 감독, 도감, 본사 삼직 등의 소임자를 기록했다. 또한 당시 통도사에 주석하는 대중 스님이 500명에 이른 사실도 기재했다. 방장 성파스님은 “육군병원이 철수한 뒤에 운허, 자운, 영암, 무불, 대휘 스님 등 전국 각지에서 많은 스님들이 피난을 와서 정진하며 지냈다”고 전했다.

주지 현문스님은 “구하 큰스님께서는 전쟁을 피해 전국에서 통도사로 피난 온 스님들을 단 한분도 빠지지 않고 모두 받아 들였다”면서 “비록 살림이 어렵고 세상이 어지러웠지만 대중을 자비심으로 맞이한 구하스님의 품이 넉넉했다”고 회고했다.

방장 성파스님과 주지 현문스님은 연기문 발견 다음 날인 9월 27일 본지 기자를 만난 자리에서 사중(寺中)에 전해오는 육군병원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었다.

성파스님은 선대스님들에게 들은 이야기라면서 “치료를 받다 숨진 병사들이 매일 10명 이상에 이르렀다”며 “통도사 다비장에서 전사자들을 화장을 했다”고 전쟁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전했다. 제31육군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숨진 군인들을 화장한 다비장은 현재 통도사 산문에서 400미터 정도 떨어진 오른편 산 중턱에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제31육군병원 통도사 분원에 위문품으로 양말 1600족을 전달했다는 내용의 기사. 1951년 10월24일자 동아일보.
이승만 대통령이 제31육군병원 통도사 분원에 위문품으로 양말 1600족을 전달했다는 내용의 기사. 1951년 10월24일자 동아일보.

全전각 산내암자 부상병 가득
불상, 경판 등 문화재 훼손도
심지어 명부전에 군교회 설치

올해 100세를 맞이한 독실한 불교신도인 월저(月渚) 김진조(金鎭祚) 의학박사는 지난 9월 28일 주지 현문스님을 만난 자리에서 “한국전쟁 당시 통도사에 온 적이 있는데, 군인들이 용화전을 비롯한 전각을 군홧발로 드나들고, 심지어 불상 앞에 재떨이를 놓고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면서 “종이로 만든 경책을 불쏘시개나 휴지로 사용하는 것을 보고 참담한 심정이었다”고 증언했다.

또한 김진조 박사는 “현재 설법전 자리가 한국전쟁 당시에는 텃밭이었는데 군인들이 소를 잡아먹는 등 청정도량이어야 하는 통도사 경내 상황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엉망진창이었다”면서 “이승만 박사가 상이병 위문을 위해 통도사를 방문했을 때 당시 주지 최대붕 스님이 이런 사실을 토로한 뒤에 군병원이 동래로 이전했다”고 증언했다. 또한 당시 장○○ 31육군병원 통도사분원장은 의학 공부를 함께 한 인연이 있던 지인이라고 밝혔다.

용화전 미륵불소조좌상 복장에서는 연기문 외에도 미륵상생경(목판인쇄), 일체여래전신사리보치진언(지본인출), 진언(지본인출), 오륜종자진언(지본), 화취진언(지본), 진언봉투(지본), 복장 봉투(지본 묵서) 등이 8점이 함께 발견됐다. 미륵상생경을 제외하고는 모두 1952년에 조성된 것으로, 한국전쟁이 조속히 끝나기를 간절히 발원한 통도사 스님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좌대 하단부분의 흙덩이가 떨어져 나가고 백색 호분 채색이 오래되 균열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개채불사를 위해 복장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연기문 등이 나온 것이다. 김태중 전 경남대 교수와 신용철 양산시립박물관장이 입회한 가운데 불상 뒷면 중앙의 복장을 수습했다. 미륵불소조좌상은 높이 195cm, 폭 165m에 이른다. 미륵불소조좌상에서 나온 복장 유물은 통도사성보박물관(관장 송천스님)이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다.
 

한국전쟁당시 제31육군병원 군교회로 사용된 통도사 명부전. 아무리 전쟁시기라 하더라도 사찰 전각을 군교회로 이용한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한국전쟁 당시 제31육군병원 군교회로 사용된 통도사 명부전. 아무리 전쟁시기라 하더라도 사찰 전각을 군교회로 이용한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제31육군병원 통도사분원에서 치료받은 군인의 후손이 최근 ‘대통령 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에서 ‘진상규명 결정’을 받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 고교 교사로 재직하다 참전한 고 박규원 소위는 낙동강 영천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후송됐다. 당시 부인과 동생 등 가족들이 사하촌(하북면)에 머물며 통도사(육군병원)를 찾아 간호했다.

그러나 국방부 등에 관련 자료가 없어 수소문 끝에 군사망진상규명위원회에 통도사 육군병원의 존재 사실과 선대 스님들에게 전해들은 방장 성파스님의 증언을 제출해 ‘진상규명 결정’을 받았다.

통도사 주지 현문스님은 “한국전쟁 당시 상이용사를 수용해 치료하거나 장례를 치른 육군병원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국민들과 공유해 나가겠다”면서 “나라가 어려울 때면 항상 함께 한 호국불교의 역할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가 이번에 나온 연기문”이라고 말했다.

통도사는 육군병원에서 전사한 장병들을 비롯해 한국전쟁에서 희생된 용사들 등 나라를 위해 산화한 이들의 넋을 기리는 수륙고혼천도재를 봉행할 예정이다.

한편 본지가 제31육군병원 통도사 분원 자료에 대해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국군의무사령부,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등에 문의했지만 단 한 곳도 이같은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국군의무사령부는 홈페이지 연혁에도 한국전쟁 당시 군병원 상황은 기록해 놓지 않았다.

한국전쟁 당시 국가가 통도사를 강제 수용해 군병원 시설로 사용한 역사적 사실을 정부차원에서 자료를 발굴하고 확인해 기록할 필요가 있다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통도사에 군병원이 설치돼 3000여 명의 상이용사가 머물렀다는 기록이 담긴 연기문이 나온 미륵불소조좌상으 봉안한 용화전.
한국전쟁 당시 통도사에 군병원이 설치돼 3000여 명의 상이용사가 머물렀다는 기록이 담긴 연기문이 나온 미륵불소조좌상을 봉안한 용화전.


■ 용화전 미륵존불 갱(更) 조성연기

불기 2974년 경인 6월 25일 사변후 국군상이병 3천여 명이 입사(入寺)하야 2979년 임진 4월 12일에 퇴거(退去) 즉(則) 사찰 각(各) 법당 각 요사 각 암(庵) 전부 퇴패(頹敗)되야 는 불가형언중(不可形言中) 용화전(龍華殿) 미륵전(彌勒佛)은 영위파손(永爲破損)되야 불가견여(不可見餘)에 자운성우(慈雲盛祐) 율사와 월국정기(月國晶基)선사가 기모단연(募檀緣)하고 사중(寺中)이 응조(應助)하야 신조불상야(新造佛像也) 증명비구 자운성우 대봉유일(大峯惟一), 양공(良工)비구 한옹윤택(漢翁倫澤) 회응상균(會應尙), 감독비구 춘고택언(椿澤彦) 월호학주(月湖學周), 지전(持殿)겸 도감비구 월국정기, 화주 백월종기(白月琮基), 본사 삼직 주지 대붕선형(大鵬善炯) 총무 포광기헌(包光奇憲), 재무 경하달윤(鏡河達允), 시(時) 대중 500여 명 단기(檀紀) 4285년 9월.

통도사=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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