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영화 ‘나랏말싸미’ 논란과 한글 창제의 비밀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 설정
현재 자료만으론 검증 어려워
불교가 ‘결정적 조력자’이며
가장 부각된 인물이 신미스님

이 영화 때문에 역사적 판단에
혼란이 온다는 주장은 오히려
다양한 문화적 관점을 향유할
관람자에 대한 모독이라 할까…

한글 창제의 숨은 공신인 신미스님을 조명한 영화 나랏말싸미가 지난 724일 개봉했다. 세종과 집현전 학자가 한글을 창제했다는 기존의 정설과는 다른 접근인데다가 최근 급속도로 냉각된 한일관계까지 더해지면서 영화 나랏말싸미는 역사 왜곡 논란을 빚고 있다. 중앙승가대 불교학부 교수 자현스님이 영화 나랏말싸미 논란과 한글 창제의 비밀이라는 기고문을 본지에 보내왔다. 자현스님의 기고문 전문을 게재한다. <편집자 주>

자현스님은 “신미대사가 한글의 창제자라는 영화 ‘나랏말싸미’의 설정은 현존하는 자료만으로는 검증될 수 없지만 불교가 한글 창제에 결정적인 조력자이며, 신미스님이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며 이런 점에서 영화는 다양성이 인정되는 현대 사회에서는 충분한 흥밋거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자현스님은 “신미대사가 한글의 창제자라는 영화 ‘나랏말싸미’의 설정은 현존하는 자료만으로는 검증될 수 없지만 불교가 한글 창제에 결정적인 조력자이며, 신미스님이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며 이런 점에서 영화는 다양성이 인정되는 현대 사회에서는 충분한 흥밋거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유교는 정치 철학적인 면모가 강하며, 내세관이 취약하다. 이로 인해 유교에서는 역사를 통한 심판구조가 발전하는데, 이를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고 한다. <맹자> ‘등문공공자가 역사서 <춘추>를 완성하니, 불충·불효의 난신적자들이 두려워했다는 구절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같은 <맹자>진심에는 (<서경>)의 내용을 다 믿을라치면 책이 없는 게 낫다는 말도 있다.

즉, 유교의 역사주의 속에는 필연적으로 왜곡도 존재하는 것이다. 특히 춘추필법은 객관적 사실을 그대로 적시하는 방식이 아니라, 주관적인 필터링을 하는 방식으로 적히는 역사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러한 유교의 역사 태도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일 뿐이라는 점과 더불어 역사기록을 이해하는 데 보다 세심한 주의를 요구한다.

한글의 우수성은 누구나가 아는 것처럼 독보적이다. 그러나 세종은 왜 유교를 국시로 하는 조선에서 새롭게 한글을 만들려고 했을까?’라는 의문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말이 중국과 다른 현실에 입각한 애민정신 때문이라면, 반포 후 널리 사용되는 것이 맞다. 그러나 한글은 아이러니하게도 조선 시대 내내 언문이라는 B급 문자였을 뿐이다.

조선을 건국한 것은 이성계지만, 조선의 설계자는 정도전이다. 정도전은 국왕의 나라가 아닌 사대부의 나라를 꿈꿨던 사람이다. 현대의 영국이나 일본과 같은 수상제 국가를 떠올리면 된다. , 국왕은 사대부 위의 존재가 아닌, 사대부 중 ‘NO 1’일뿐이라는 것이다. 언뜻 들으면 현대적인 관점 같지만,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이는 정도전이 통반장을 다하겠다는 의미다.

결국 정도전은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긴 이방원에 의해 척살된다. 그런데 문제는 정도전의 조선 설계가 이때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상당 부분 그대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조선은 이후 군주권이 약한 군약신강의 구조를 띠게 된다.

이방원은 무력으로 도전자들을 제거했다. 그러나 대대적인 숙청이 사람을 심복시킬 수는 없다. 또 새로운 왕조의 초기에는 언제나 왕통의 신성성에 대한 위험한 뒷담화가 존재하게 마련이다. 너희 조상이나 우리 조상이나 별 차이가 없는데, 왜 너는 왕이고 나는 신하냐?’라는 생각이다.

1445년 세종의 명으로 찬술된 <용비어천가>는 이런 뒷담화에 대한 세종의 반론인 동시에 민중을 향해 외치는 당위성의 변증이다. 또 세종 말년이 되면, 조선이 안정되면서 고려의 쿠데타 왕조라는 부담이 사라지게 된다.

때문에 문종 2(1452)에는 당시 유일한 왕 씨인 왕우지(왕순례)를 찾아내 고려 왕실의 제사를 잇도록 한다. 이 말은 왕 씨를 전멸시켰다는 뜻인 동시에, 고려의 조선에 대한 반전기회가 완전히 소멸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 한나라의 개국공신인 한신이 여태후에게 제거되면서 하는 말이 토사구팽이다. 외부의 적이 사라지면, 권력은 내부적인 정리와 투쟁이라는 2단계로 돌입한다. , 고려의 지배층과 불교에 대한 공격이 필요 없어지면서, 2라운드로 사대부에 대한 견제가 시작되는 것이다.

사대부를 견제하는 방식은 크게 2가지다. 첫째는 특권을 낮추는 것이며, 둘째는 평민을 성장시키는 방법이다. 세종의 한글 창제는 사대부라는 한자 집단의 이익을 축소시키는 동시에 평민을 일깨울 수 있다는 점에서, 두 가지 모두에 해당한다. , 한글 창제에 내포된 애민에는 왕권 강화 및 사대부에 대한 견제도 존재했던 것이다.

한글 창제와 관련해 오늘날 확인되는 핵심인물은 세종과 세자(문종) 그리고 수양과 안평대군 및 당시 불교통이었던 효령대군 등이다. , 집현전이 배제되고 세종 패밀리에 의해서 주도되는 구조다.

이는 왜 한글이 1446년에 반포되었음에도 조선이 끝날 때까지 제대로 사용되지 않았는가?’라는 의문과 맞닿아 있다. 한글이 합리적이고 쉬운 문자면 뭐 하겠는가? 주류의 현실에서는 사용되지 못하는데 말이다. 합리적이고 쉽다는 장점이 있음에도 상형문자에서 출발한 원시 문자인 한문을 이기지 못했다는 것은, 거대한 이익집단이 문자시장을 왜곡시켰기 때문이다. 이런 왜곡의 주체는 당연히 한문 지식계급인 사대부 즉 양반이다.

<세종실록> 103에 수록된 1443년 최만리의 한글에 대한 반대 논리는 한자는 대국의 참 글자며, 독립된 문자를 가진 나라는 오랑캐일 뿐이라는 것이다. 당시 최만리는 집현전 부제학이었는데, 이는 최만리의 관점이 집현전의 공론이었음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세종은 분노하며,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와 같은 막말을 하면서, 국왕의 권위로 찍어 누르려는 모습까지 보인다. 그러나 결국 세종의 훈민정음 반포를 이긴 것은 최만리와 같은 생각을 가진 조선의 양반들이었다.

한국사와 국어를 전공한 내가 조선조 500년을 통틀어 가장 안타깝게 여기는 일은 반포된 훈민정음이 사용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만일 한글이 이때부터 사용되었다면, 합리성과 수월성으로 인한 파급력으로 오늘날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의 주류가 한글을 사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종이 처음부터 사대부와 함께 협업했다면 한글의 유통이 막혔을까? 1446년 훈민정음이 반포된 후 가장 먼저 제작되는 책은 1447년 총 24권으로 구성된 부처님의 생애, <석보상절>이다. 1449년에는 세종이 친히 부처님을 찬탄하는 <월인천강지곡>을 짓기도 한다.

이외에도 세조 때의 간경도감에서는 많은 불교 경전이 언해되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글 역시 국보 제292호인 <상원사중창권선문>이다. 이는 한글 창제가 불교와 관련되며, 세종이 불교 언해를 통해 민중을 끌어안고 사대부를 견제하려고 했다는 점을 분명히 해준다.

위대한 발명에는 역량 있는 주체와 함께 능력 있는 조력자가 필수적이다. 세종은 스스로 음운에 능했던 탁월한 분이다. 그러나 새로운 문자의 창제란, 제아무리 천재라 해도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또 당시 세종은 집현전을 동원할 수 없었고, 집권 후반기에 따른 노쇠현상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실무를 감당할 수 있는 지식층은 불교의 승려밖에 없다.

한자와 체계가 완전히 다른 새로운 문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당연히 다양한 언어와 문자에 대한 연구가 필수적이다. 이런 점에서 전파경로를 통해 다양한 언어유산을 가지고 있던 불교는 유교에 비해서 보다 맞춤했다.

신미대사가 한글의 창제자라는 영화의 설정은 현존하는 자료만으로는 검증될 수 없다. 그러나 불교가 한글 창제에 결정적인 조력자이며, 신미스님이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영화는 상업적 산물이다. 이런 점에서 흥행을 위해 감독이 선택한 인물이 바로 신미스님이다. 한글 창제라는 스토리가 밋밋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반전과 이슈 거리마저 없다면 흥행은 요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혹자들이 제기하는 나랏말싸미때문에 역사적 판단에 혼란이 온다는 주장은 수긍하기 어렵다. 우리 국민은 전 세계 최고의 학력 수준을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주장은 관람자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다양한 관점의 문화를 향유할 권리가 있으며, 결과물에 대한 판단은 감독이 아닌 관람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즉 대한민국 국민은 이런 정도의 우려 따위는 넘어서 있다는 말이다.

닫힌 결말과 하나의 정답만을 말하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는 악덕이다. 한글은 세종이 주도해서 만들었다. 그러나 한글의 위대성은 세종 한 사람의 천재성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다. 이런 점에서 다양한 시각에 대한 환기는 다양성이 인정되는 현대 사회에서는 충분한 흥밋거리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한다.

나는 류성룡이 <징비록>을 남긴 것이 신의 한 수였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책을 통해서 류성룡은 자신에게 면죄부가 부가되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글 창제의 조력자였던 승려들은 아무도 이렇다 할 글을 남기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추측만으로 역사는 재구성될 수 없다. , 이는 불교의 과실인 셈이다.

그렇다면 왜 류성룡은 책을 남겼는데, 신미스님은 남기지 않았을까? 그것은 현실을 실재로 인식하는 유교의 역사주의와 현실은 매트릭스 같은 허상일 뿐이라고 판단하는 인도문화인 불교의 관점 차이 때문이다. 또 같은 이유로 충무공은 <난중일기>를 남긴 반면, 사명대사에게는 아무런 기록물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부분도 함께 이해한다면, ‘나랏말싸미에서 촉발된 역사논쟁은 소모적인 입씨름을 넘어 우리 사회를 좀 더 풍요롭게 장식할 수 있을 것이다.

자현스님 중앙승가대 불교학부 교수
자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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