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訓民은 하화중생이요 正音은 상구보리”

훈민정음 창제 보급, 해인사 중창
학조대사 출가하고 입적한 고찰
주지 범종스님도 한글 홍보 헌신
창제 원리 의미 담은 그림 제작

훈민정음에 얽힌 이야기 담은
영화 ‘나랏말싸미’ 제작도 지원

안동 광흥사 전경. 훈민정음 목판을 소장하고 불상에 그 인쇄본을 담은 한글의 보고(寶庫)다.
안동 광흥사 전경. 훈민정음 목판을 소장하고 불상에 그 인쇄본을 담은 한글의 보고(寶庫)다.

2011년 10월24일 대구지방법원 상주 지원 1호 법정. 골동품 가게에서 해례본 상주본을 훔치고 은닉 훼손한 혐의(문화재보호법 위반)로 구속 기소된 배모(48)씨 재판이 열렸다. 배씨는 조모(66)씨가 상주에서 운영하는 골동품 가게에서 상주본을 훔친 혐의를 받았다. 이 날 법정에서는 문화재 도굴 일인자로 알려진 서모씨가 증인으로 출석해 상주본을 경북안동 광흥사에서 훔쳤다고 진술했다. 상주본의 원래 보관처가 드러난 것이다.

의상대사 창건 천년 고찰

안동 광흥사(廣興寺)는 신라 신문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한 고찰로 고려 중흥기를 거쳐 조선시대 왕실 원당(願堂)으로 번영을 누렸다. 왕실 원당 답게 광흥사는 500여칸에 이르는, 안동지방에서 가장 큰 사찰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산 속 암자처럼 아담하다. 1827년 큰 화재로 500여 칸에 이르는 건물이 소실 된 뒤 전쟁의 참화가 겹쳐 번성했던 당시 규모를 회복하지 못했다. 지난 1일 찾아간 광흥사는 고요했다. 잔디 깎는 기계음만 울려 퍼졌다. 그러나 이 사찰이 만만치 않은 사세를 자랑하는 고찰임은 한 눈에도 알 수 있었다. 광흥사 중심 건물 응진전 마당으로 들어서니 수 백년을 뛰어넘어 조선시대로 돌아간 듯 고색창연(古色蒼然)한 건물이 반갑게 맞이한다. 응진전에서는 사시 기도를 올리는 스님의 독경소리가 울려퍼졌다. 

재판을 받았던 배모씨는 현재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의 행방을 아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해례본을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감옥에서 풀려났지만 적반하장격으로 정부를 상대로 1000억원을 요구하며 십수년이 흐른 지금까지 국민들 속을 태우고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이 중요한 이유는 오직 이 책에서만 한글 원리가 적혀 있기 때문이다. 광흥사에서 도난당한 훈민정음 해례본은 세종 28년인 1446년에 발행된 훈민정음 해설서로 국보 제70호인 간송미술관 소장 훈민정음 해례본과 동일한 판본이다.

광흥사에서는 훈민정음 해례본 뿐만 아니라 조선왕실 어첩(御帖)과 유물(遺物) 및 훈민정음 창제 후 한글로 적은 많은 불교 경전을 간직했다. 세조는 법화 화엄 등 경전을 간행하여 봉안케 했으며 세종의 친서(親書) 수사금자법화경(手寫金子法華經), 영조의 친서 대병풍(大屛風), 어필족자(御筆簇子) 등 많은 보물이 광흥사에서 나왔다. 학조(學祖, 1431~1591)대사가 그 중심에 서있다. 그리고 잊혀진 고승과 광흥사를 현 광흥사 주지 범종스님이 이끌어냈다.

학조대사는 조선 초기 인물이다. 1431년 태어난 학조대사는 13세 때 광흥사 산내 암자 애련사로 출가했다. 신미대사가 스승이다. 학조를 본 신미대사는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단박에 알아채고 발바닥을 보니 임금 왕(王)자가 새겨져 있었다. 

신미대사는 세종과 함께 한글을 창제한 고승이다. 역사는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을 집필했다고 기록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님이 최근 연구 결과 속속 드러나고 있다. 집현전 학자들은 오히려 화장실에 앉아서 자음 모음을 맞추어 글을 다 익힐 수 있는 아주 쉬운 글이라며 ‘통시글’이라고 멸시했다. 훈민정음은 인도 산스크리트어처럼 소리 나는 대로 적는 문자다. 신미대사는 산스크리트어 전문가였다. 불교 경전을 기록한 문자이기 때문이다. 

신미대사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창제 주역이라면 신미의 제자 학조와 세종의 아들 수양은 훈민정음을 대중화하고 널리 퍼뜨린 인물이다. 학조는 세조의 왕사였다. 조선 중기에 보우대사가 있었다면 초기에는 학조대사가 있었다. 광흥사가 왕실 원당으로 수많은 왕실 보물을 간직한 연유도 학조대사를 배출했기 때문이다. 
 

훈민정음의 원리와 불교 교리를 접목해 도상으로 만든 안동 광흥사 주지 범종스님이 그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훈민정음의 원리와 불교 교리를 접목해 도상으로 만든 안동 광흥사 주지 범종스님이 그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수많은 한글 불경 펴내 

세조와 함께 훈민정음 보급에 매진했던 학조대사는 조선 초기 불교를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수많은 한글 불경이 대사의 손에 의해 나왔다. 초기의 ‘지장경언해(地藏經諺解)’, 수양대군이 완성한 ‘금강경삼가해언해(金剛經三家解諺解)’의 교정 인출, ‘천수경(千手經)’ 언해 교정, 세종 때부터 시작되었다가 중단된 ‘증도가남명계송(證道歌南明繼頌)’ 완역이 모두 대사의 작품이다.

학조대사의 발문이 첨부돼 있는 ‘오대진언(五大眞言)’ ‘불정심다라니(佛頂心陀羅尼)’ ‘진언권공(眞言勸供)’도 그의 번역으로 추정한다. 이외 두 번에 걸쳐 해인사 대장경을 간인(刊印)하고 발문을 지었다. 그래서 당대에 학덕이 뛰어나고 문장과 필력이 출중한 문호로 칭송받았다. 

세조 이후 중종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대형불사도 학조대사의 지휘 아래 이루어졌다. 1467년 왕명으로 금강산 유점사를 중창하고 1488년 (성종 19)에는 인수대비의 후원 아래 해인사를 중수하고 대장경판당을 중창했다. 경기도 남양주 광릉의 봉선사도 학조대사가 창건하고 이름 붙였다. 1469년 예종 1년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세조의 능침을 모시고 광릉이라 하고 고려 시대 사찰 운악사를 자복사로 삼았으니 곧 봉선사다. 이를 주도한 인물이 바로 학조대사다. 해인사를 중수하며 직지사도 중수했다. 

학조대사로 인해 직지사는 그 때부터 조선 8대 사찰로 부상했고 학조는 황악산인(黃岳山人)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직지사 중창하고 ‘황악산인’ 

그러나 불교를 억압하던 조선에서 그 많은 대형불사가 순조롭게 진행될 리 만무하다. 비록 왕실 후원이 있었다 해도 보통의 강단과 추진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해인사와 대장경 판당을 중창할 당시 이야기다. 강화도 대장경 판당에 보관하던 팔만대장경은 태조 7년 해인사로 옮겨졌다. 그런데 판당이 너무 비좁고 누추하여 세조는 즉위 4년인 1458년 경상감사에 명하여 비좁고 허술한 판당을 50여 칸 증축했다. 

그런 뒤에도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비가 새고 서까래가 썩어 몇 년 지나지 않아 무너질 지경에 이르자 정희왕후는 판당의 중수를 위해 학조를 주지로 임명하고 공사를 주관하도록 했다. 그런데 몇 해 동안 장마와 가뭄이 연달아 겹쳐 공사를 채 시작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정희왕후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정희왕후로부터 약속받은 조정의 지원이 내려지지 않자 학조는 성종 18년(1487) 조정에 나아가 판당을 고쳐주지 않는다면 주지 직을 사임하겠다는 엄포를 놓는다. 성종이 지원을 지시했지만 대간들이 반대하고 나서 결국 왕실 재산으로 판당을 증개축하고 해인사를 중창했다. 지금의 해인사가 그 때 중창한 모습이다. 

학식이 뛰어나고 문장이 출중한 학자요 큰 배포와 추진력을 지닌 지도자 자질도 겸비했으니 유학의 나라를 만들려는 관료들 입장에서는 그가 얼마나 밉고 두려웠겠는가? 조선실록은 그를 희대의 요승(妖僧)로 격하시켰다. 그럼에도 학조의 출중한 학식과 문장력만은 거짓으로 기록할 수 없었던지 뛰어난 학승이라는 사실도 함께 적었다.

홍길동에게 무예를 전수했다는 이야기도 전하니 그의 재주가 어디까지인지 가늠키 어렵다. 학조대사는 출가사찰인 애련사에서 입적했다고 전한다. 부도는 스승인 신미대사 곁에 함께 모셨다. 속리산 복천암 높이가 3미터에 이르는 학조등곡화상탑이다.

대사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학조대사는 안동김씨 집안 장남으로 출가해 아래 동생이 맏이 역할을 했다. 둘째가 아들이 없어 막내 동생의 자식을 입양했는데 김번이다. 장동김씨라고 부르는 안동김씨 장동파의 시조다. 김번이 죽어 부인 남양홍씨가 친정에 머물며 시름을 달래는데 학조대사가 그 집 방앗간이 명당이니 김번의 묘로 쓰면 후대(後代)에 금관자(金冠子) 옥관자가 서말이라고 했다. 당상관 이상의 고위 관직에 오른 인물이 수없이 나온다는 뜻이다.

대사의 예언처럼 조선이 망할 때까지 영의정 등 수많은 고관을 배출했다.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김상헌이 김번의 증손자이다. 김조순, 김좌근, 김병기로 이어지는 3대 60여년 안동김씨 세도가 김번의 직계다. 처갓집에 썼다는 명당이 경기도 남양주 와부리 덕소 석실마을이다. 
 

절 곳곳에 걸린 훈민정음 안내도.
절 곳곳에 걸린 훈민정음 안내도.

훈민정음 보급 전파 기지 광흥사

광흥사는 훈민정음의 보급기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25 때까지 광흥사에 훈민정음 목판이 남아 있을 정도로 광흥사는 한글과 밀접하다. 간송미술관과 광흥사에서 나온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이 그 목판으로 인쇄했다. 목판은 그러나 전쟁 중 소실됐다. 

묻혀있던 광흥사와 훈민정음 학조대사 인연은 광흥사 주지로 부임한 범종스님의 노력에 의해 다시 역사의 현장으로 나왔다. 스님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광흥사에서 훔쳤다는 서씨의 재판 증언을 예사로 넘기지 않았다. 재판기록을 꼼꼼히 살폈다. 언론에서는 서씨가 대웅전에서 훔쳤다고 했지만 검찰 조서에는 명부전 시왕상이었다.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범종스님은 달랐다. 절도범이 털지 않은 다른 시왕상 복장에도 훈민정음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문화재 전문가를 불렀다. 

스님의 생각은 적중했다. 비록 훈민정음은 나오지 않았지만 훈민정음 창제 당시 한글로 적은 수많은 불경이 들어 있었다. 고려 말에서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전까지 간행된 고문헌이 다수 발견됐는데 그 중 <월인석보>와 <선종영가집언해> 등은 훈민정음 창제 초쇄본으로 추정하는 보물이었다. 

범종스님은 학조대사가 그랬던 것처럼 한글 홍보에 적극 나섰다. 훈민정음의 창제원리와 불교 교리를 담아 그림으로 그렸다. 발음기호, 한글에 담긴 뜻을 도상(圖上)으로 표현한 ‘훈민정음도’는 범종스님의 창작품이다. 스님은 훈민정음을 이렇게 정의한다. “훈민(訓民)은 하화중생(下化衆生)이며 정음(正音)은 상구보리(上求菩提)다. 불교의 가르침과 한글 창제 의미가 같은 것이다.” 

스님의 한글 사랑과 보급 열정이 훈민정음에 10년간 매달렸던 영화감독과 만났으니 오는 7월24일 개봉하는 영화 ‘나랏말싸미’다. 영화는 세종과 신미스님이 만나 백성을 위해 뜻을 모아 나라 글자를 만드는 한글 창제의 숨겨진 이야기를 담았다. 범종스님이 연구한 훈민정음 신미 학조대사 이야기가 고스란히 영화에 담겼다.
 

광흥사 모습.
광흥사 모습.

안동=박부영 상임논설위원 chisan@ibulgyo.com

[불교신문3500호/2019년7월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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