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당 집터’도 결국은 마음작용에 달려 있다

본래 악터, 흉터는 없습니다
마음이 환경의 주인이니
佛心 갖고 자신있게 살면
명당 아닌 곳이 없습니다

불교 풍수지리 두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양택, 즉 집터에 대한 얘기를 해드리겠습니다. 양택 풍수에 대한 이론은 음택 풍수만큼이나 아주 분분합니다. 두 가지로 압축하면 하나는 이론을 내세운 ‘이기론(理氣論)’이고, 또 다른 하나는 형세로 판단하는 ‘형기론(形氣論)’입니다. 이기론과 형기론은 둘 다 나름 의미가 있습니다만 불교적 입장에서는 조금 참고만 할 일이고, 진짜 중요한 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제가 풍수지리에 없는 용어를 만들었으니 ‘심기론(心氣論)’이라는 것입니다. 심기론은 ‘환경에 맞추어서 생각을 하고, 또 생각대로 환경을 만들어 간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집터를 잡을 때 또는 이사를 하여 새집을 잡을 때,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리는 심기론을 잘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명당도 결국은 마음작용에 달려 있다. 사진은 낡은 흉물 건물의 악터에서 대가람이 된 한국불교대학大관음사 대구 큰절 전경.
명당도 결국은 마음작용에 달려 있다. 사진은 낡은 흉물 건물의 악터에서 대가람이 된 한국불교대학大관음사 대구 큰절 전경.

저희 절의 경우입니다. 포교당 개원 당시 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는 법당이 아주 협소했습니다. 월세를 낀 전셋집이었습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상당한 부채를 지고 지금의 대구 큰절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아주 낡은 3층짜리 창고 건물이 있었습니다. 각 층 70평에 낡고 허름하였으나 우리 신도님들은 ‘우리절’이 생겼다며 너무도 환희심이 가득했습니다.

전세 포교당 시절에는 다른 절처럼 부처님 오시는 날, 땅 위에 줄을 치고 연등을 한번 달아보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전세 포교당이 5층에 있었기 때문에 오르내리기에도 엄청 불편한 점이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땅을 밟을 수 있는 우리절이 생기니, 신도님들 전체가 나와서 도량을 만들었습니다. 건물을 수리하고 외관 벽에 직접 페인트칠을 하였습니다. 한창 리모델링 공사 중에 동네 터줏대감 몇 분이 찾아와서는 걱정 아닌 걱정을 했습니다.

“아이구 스님, 아직 젊으신데 여기 오신 것은 환영합니다만, 절이 잘 안될 것입니다. 이 건물 보십시오. 이미 30년 된 건물인데 여기 건물 주인이 사흘이 멀다 하고 바뀌었습니다. 망해서 나간 사업체가 한두 개가 아닙니다. 지금까지도 창고로 쓰이면서 방치되다시피 하였습니다. 이곳은 터가 안 좋습니다. 예전에 큰 물웅덩이가 있던 곳이라 무슨 일을 하던 다 물에 빠지는 형국입니다. 이기론으로 보나 형기론으로 보나 악터가 분명하니 잘 판단하십시오.”

동네 사람들의 기분 찝찝한 방문이 있고 난 후, 5~6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우리절은 엄청난 발전을 했습니다. 공부하려고 몰려드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입학하는 날이 되면 입학원서를 써서 제출하려고 몇 백 미터(m)나 줄을 서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모든 신도님들의 적극적인 신행활동과 포교활동 덕분이었습니다. 일치단결하니 안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도량 내외의 모든 사람들이 활화산처럼 일어나는 기적의 절이라고 칭송할 정도였습니다. 그렇듯이 절이 잘되어 가는 중에 또 그때 왔던 터줏대감 동네 주민들이 방문했습니다. 수년 전과는 전혀 다른 얘기를 하는 것을 듣고 ‘양택 풍수도 맞지 않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스님, 여기는 터가 아주 좋은 것 같습니다. 여기는 원래 큰 물웅덩이가 있었습니다. 자연 저수지였지요. 앞산에서 두 갈래로 물길이 내려오다가 이 지점에서 같이 만났습니다. 그러니 스님 하시는 모든 일이 잘 될 수밖에 없지요.”

제가 말했습니다. 
“여기가 큰 자연 저수지, 물웅덩이였다는데 뭐가 그리 좋겠습니까?”

동네 어른들은 어디서 들은 바가 있는지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스님, 물웅덩이에 절이 들어섰다는 것은 큰 연꽃이 한 송이 핀 것과 같은 것이지요.”

우리가 그런 말을 하지요? ‘꿈보다 해봉이 좋다’고. 불사(佛事)가 잘 되니까 그렇게 좋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다 마음 작용입니다. 결국은 심기론(心氣論)만이 유용합니다. 양택 풍수에 있어서 명당도 결국은 마음 작용에 달려있습니다. 마음먹기에 따라서 명당이 되기도 하고, 흉터가 되기도 합니다.

명당터가 되는 것은 인간이 하기 나름입니다. 이기론이나 형기론은 이미 결론을 내놓고 ‘이 터는 된다, 안 된다’ 하지만, 심기론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유동적입니다. 이는 불교적 생각과도 맞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신심과 구도심이 얼마나 절실하고 큰가’를 봅니다.

저희 한국불교대학大관음사가 이렇게 해를 거듭할수록 발전을 하는 것은 수많은 신도님들이 구도심으로 마음을 모아주시고, 또 ‘정법을 펴겠다’라고 하는 신심이 어우러졌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힘이 이 절터를 아주 튼튼하고 견고하게 한 것이지,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다 망해서 나갔다”라고 하는 악 터에서 신심과 구도심을 내고 응집력을 보이니까 모두가 부러워하는 명당터가 된 것입니다. 

심기론(心氣論), 즉 마음의 기운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불자들은 집터의 문제에 있어서도 ‘신심을 다부지게 견지(堅持) 하고 있으면 문제없다’는 생각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지금부터는 좀 다른 각도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약 어느 집으로 이사를 가려고 하는데, ‘그 집의 기운이 별로이다. 집이 왠지 스산하고 들어가서 살면 꼭 병날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면, 전통방식의 기준에 그 집이 비록 명당이라 하더라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만약에 어쩔 수 없이 입주를 해야 할 경우라면 결심을 단단히 해야 합니다.

‘그래, 나는 정법을 믿는 불자니까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지하겠다’라는 신심으로 조석으로 금강경 등 대승경전을 유튜브의 음향으로 크게 틀어놓고 따라 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공부 잘하는 스님 중에 아는 스님이 있으면 모셔다가 안택(安宅) 기도 한 번 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그 스님한테 부탁해서 ‘마하반야바라밀’ 등 경전 말씀을 경면주사로 쓴 경문(經文)을 현관 입구와 큰 방에 붙여 두시면 좋습니다. 오시는 스님이 붓글씨를 쓰는 분이면 그 스님 작품 하나 걸면 ‘만사 OK’입니다. 경면주사로 사경(寫經)한 작품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이렇게만 하면 그 집터로 인한 우환은 없습니다. 평소에 살면서도 가정이 연이어 시끄럽고 가족들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기는 경우에도 위의 방법대로 하시면 금방 괜찮아지는 수가 많습니다. 불자들은 문제가 생기면 이상한 곳을 기웃거리는데, 그러면 안 됩니다. 불교적 방법을 찾아야 하고, 불교적 방편대로 하면 반드시 해결이 됨을 확신해야 합니다. 

풍수에는 ‘비보풍수(裨補風水)’가 있습니다. 옛날에 도읍을 정할 때도 ‘비보사찰’이라 해서 그 기운을 보완하는 사찰을 지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처럼 이사를 하면서 그 집의 약한 부분 때문에 도움을 받는 좋은 방법, 즉 비보의 방편은 가정법당을 하나 꾸미는 것입니다. 가정법당은 작은 부처님 상이나 부처님 사진 한 분을 모시고 ‘불(佛)’ 자(字) 하나 걸어두시면 됩니다. 옛날식의 양택 원리에는 장풍득수(藏風得水)니, 배산임수(背山臨水)니, 전저후고(前低後高)니 하는 말이 있습니다. 

복잡하게 그 의미를 설명할 필요도 없이 무시해도 좋을 시대가 오고 말았습니다. 단독주택을 지을 때는 다소 참고는 해야겠지만 집단 다세대 주택에는 소용없습니다. 공동묘지를 밀어버리고 아파트를 짓는 시대에 살고 있음을 자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물을 구하는 일이 큰 문제였습니다. 제가 지금 기거하고 있는 무일선원도 초창기 때는 물 때문에 불편함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지하수를 하나 팠더니 전 대중들이 그 물의 20%도 쓰지 못할 만큼 넉넉합니다. 

그래서 장풍득수(藏風得水)의 득수는 기계 문명이 해결하였습니다. 장풍, 즉 바람막이도 그러합니다. 30층, 40층, 100층에 살면서도 우수한 방풍 재료와 단열재 덕분에 바람 걱정이 싹 없어졌습니다. 고층 아파트의 실내 온도가 얼마나 잘 유지되는지 겨울에도 속옷만 입고 살 정도 아닙니까? 그러므로 이제는 집터를 구할 때나 주택을 구할 때는 현실성만 따지면 됩니다. 현실성이란 것이 교통 좋고, 주위 환경 쾌적하고, 용도에 맞으면 됩니다. 현실성이 중요하지 재래식의 양택 풍수 이론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물 건너갔다고 봐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재차 강조하는 것은 그 집을 다스리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마음이 가장 큰 관건이지 다른 것은 부차적입니다. 심기론(心氣論)만이 중요합니다. 불심(佛心) 갖고, 자신 있게 살면 명당 아닌 곳이 없습니다. 정법(正法) 불자가 있는 곳이라면 처처(處處)가 불토(佛土)입니다. 마음이 환경의 주인이고, 마음이 모든 환경을 만들어 냅니다. 심시조주(心是造主)입니다. 본래 악터, 흉터는 없습니다. 수행 정진하고 살면 다 좋아집니다. 관세음보살! 

*한국불교대학 유튜브불교대학에서는 다양한 불교이야기를 시청할 수 있습니다.
 

無一 우학 한자성어 ⑪ 無犧未得(무희미득)

희생 없이는 얻지 못한다

‘희생 없이는 얻지 못한다’ 너무도 당연한 얘기입니다만, 현실적인 삶에 있어서는 간과하는 수가 많습니다. 특히, 현재 우리 한국불교의 포교 상황을 살펴보십시오. 우리 불교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도 대부분 사부대중이 별생각 없이 태무심하고 있지 않습니까?

탈종교화 시대라고 하지만 한국의 종교 실태는 좀 다릅니다. 저 기독교가 많은 말썽을 피우면서도 지난 10년간 300만 신도가 늘어났습니다. 700만 신도가 거의 1000만에 육박했습니다. 반면에 불교는 그 기간에 근 1000만의 신도가 700만 대로 주저앉았습니다. 다음번에 이루어지는 종교 인구 조사가 어떻게 나올지 아주 조마조마할 지경입니다.

무희미득(無犧未得)! 이 글은 누가 준 토종벌을 제가 직접 관리하면서 만든 말입니다. 꿀을 신도들에게 포교상으로 주면 좋겠다 싶어 시간을 내서 열심히 살피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말벌이 토종벌을 공격해 왔습니다. 그래서 말벌을 퇴치하는 중에 토종벌들이 나를 적으로 오인하고 그대로 얼굴로 날아와서 여러 방 쏘았습니다. 그때 제가 헛웃음 지으면서 중얼거렸습니다. 

“그것참, 희생 없이는 안 되는구나.” 

그렇습니다. 우리가 ‘불법(佛法)이 좋다’고 늘 말을 하면서, 이 부처님 법을 내 이웃에 전하려는 노력은 조금이라도 하고 있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이 불교가 쇠잔해가는 사실을 자각은 하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봐야 합니다. 하기 싫더라도 기본적인 희생, 즉 억지적인 노력의 흉내라도 내야 합니다.

저 신라의 이차돈 성사(聖師)의 순교는 아닐지라도, 부처님 당시의 부루나 존자의 전법(轉法) 정신에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우리들이 부처님께 지고 있는 은혜는 갚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용수보살의 전법게입니다.

“부처님을 머리에 이고 오랜 세월 지내며 몸이 의자가 되어 삼천대천세계에 두루 하여도, 만약에 법을 전하여 중생을 제도하지 못하면 끝내 부처님의 은혜는 갚을 길 없도다.”

[불교신문3624호/2020년10월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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