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중생 불성 가지고 있듯 동물생명도 고귀

반려동물 키울 때 병이 나면
병원에 데려가 치료해 줘야하고
싫다해서 유기나 죽이면 안 돼
동물입장서 행복하도록 해줘야

먼저, 본 주제를 다루기 전에 애완동물의 하나인 고양이에 얽힌 멋진 화두가 생각나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남전참묘(南泉斬猫) 조주초혜(趙州草鞋)’라는 제목의 화두인데, 구체적인 얘기는 이러합니다.

남전스님이 고양이 한 마리를 두고 동당과 서당의 스님들이 나누어져 서로 자기들 것이라고 다투는 것을 보고는 전체 대중들에게 말하였습니다. 

“한마디 이르면 고양이를 살려주겠지만, 이르지 못하면 이놈의 목을 베겠다.”

그런데 대중 가운데 아무도 대답을 못하였습니다. 남전스님은 곧바로 고양이의 목을 베어버렸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애제자인 조주 수좌가 볼 일차 밖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오자, 남전스님은 낮에 있었던 얘기를 해주면서 한마디 일러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조주 수좌는 신고 있던 짚신을 벗어 머리에 이고는 문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이에 남전스님이 말하였습니다. 

“안타깝도다. 그대가 낮에 있었더라면 고양이를 살릴 수 있었을 텐데….”

유튜브불교대학 시청자와 불교신문 구독자 여러분이 깊이 사유해 봄직한 얘기이지요? 궁극적으로 말하려는 낙처(落處)가 무엇인지를 고민해 보기를 바라면서 본 주제 속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입장이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 사진은 필자 우학스님의 서화작품.
반려동물을 키우는 입장이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 사진은 필자 우학스님의 서화작품.

요즘 스님이나 재가자들이 반려동물을 키우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바라보는지, 경전에 입각하여 살펴보겠습니다. 계율을 가르치는 경(經)인 <범망경(梵網經)>에서는 ‘동물을 키우지 마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요즘 우리 현대문화와는 조금 다른 부분이 있음을 감안해야 합니다. 첫째로 ‘살생, 즉 잡아먹는 것을 전제로 하는 가축 사육은 안 된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나중에 식용으로 하기 위한 개 사육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다른 동물을 해치는 포악한 동물은 길러서는 안 된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쥐를 잡기 위한 고양이 사육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간접 살생을 도모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인간관계를 소원하게 하는 동물은 길러서는 안 된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의 일입니다. 어떤 비구가 원숭이를 길렀는데, 그러다 보니 자기 도반들과는 소원하게 되었습니다. 동물을 키움으로 인해 생기는 부작용의 한 단면입니다. 아무튼 경전에서는 동물을 키워서는 안 되는 이유를 이렇게 세 가지로 밝히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 생각입니다만, 위의 경우들이 아니라면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은 별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사실, 동물에 대한 생각들은 세대별로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연세 많으신 분들 중에서는 ‘동물은 동물인 게지, 동물하고 어떻게 같이 사느냐? 동물은 결국 가축 아니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요즘 젊은 사람들은 애완동물을 가족 개념으로 대접합니다. 즉 가축이 아닌, 서로 의지하고 서로 정을 나누면서 외로움을 달래다 보니 반려동물이 된 것입니다.

자료에 의하면,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이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이 자그마치 1000만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동물을 반려의 차원도 넘어서서 가족 개념으로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아예 ‘가족 동물’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니 예전에 저희들이 시골에 살 때 개, 고양이를 대하던 경우와는 많은 차이가 납니다. 한마디로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불교적으로는 이 동물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다 생명 있는 존재들이다’라고 봐야 합니다. 유정(有情), 즉 중생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습니다. 최근에 이곳 무일선원에 산 고양이들이 나타나 대중들의 무료함을 달래줍니다. 저는 이들을 유심히 관찰합니다. 감정 섞인 행동들이 우리들 인간과 매우 흡사함을 자주 느낍니다. 쓰다듬어주면 금방 정을 붙입니다.

그리고 한 마리에게만 관심을 가지면 다른 고양이들이 시기 질투심을 일으킵니다. 맛있는 먹이를 주노라면, 서로 먹겠다며 형제간에도 눈에 불을 켜고 설칩니다. 언어 표현력이 부족하고 지혜가 모자라는 것이 눈에 띄기는 해도 ‘생명은 다 똑같구나’ 하는 것을 충분히 느낍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일체중생개유불성(一切衆生皆有佛性)’, 즉 ‘일체 중생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금구성언(金口聖言)이 참으로 지당하고 지당함을 실감합니다. 

사는 모양, 즉 쓰고 있는 껍데기는 좀 다르다 하더라도 그 안에 든 생명의 고귀함, 그 영혼은 일반 동물이나 사람이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불성(佛性), 즉 ‘부처님 성품’이 많은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만, 그중에서도 자각성(自覺性)을 말할 때가 있는데, 모든 동물들이 다 그런 성품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고양이는 우리 인간들보다 더 이른 나이에 대소변을 가릴 줄 압니다. 대단한 자각성입니다. 개 또한 후각 등 그러한 자각성이 인간들보다 더 나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사람이라 해서 동물하고 어울리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오히려 ‘나는 동물 하고는 안 놀아. 나는 사람이지 동물이 아니야’ 하고 마음을 먹는다면, 그것은 상(相)일 뿐입니다. 경전에서 말하는 상(相), 4상(四相)은 하근기 중생일수록 더 많이 부립니다. 동물들과 차별상을 가지면서 잘난척한다면 그 자체가 다른 동물들과 별 차별이 없는 중생임을 자인하는 꼴이 됩니다. 상(相)을 내려놓고 보면, 동물이라는 큰 테두리 속에 인간이 포함돼 있을 뿐입니다.

우리 주위에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많은데, 대체로 마음이 따뜻합니다. 그리고 부드럽습니다. 이해심도 큽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한 마음, 성격들이 있으니 반려동물들을 사랑하며 키울 것입니다. 물론 마음, 성격의 차원을 떠나서 동물 키우는 것이 선천적으로 안 맞는 수도 있습니다. 또 시간적으로도 감당이 안 돼서 반려동물을 키우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반려동물을 기르고 있는 사람과 기르지 않는 사람을 두고 단순하게 옳고 그름을 차별 지을 수는 없습니다. 즉, 반려동물은 키워도 되고 안 키워도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인격이나 품성을 나타내는 잣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다만, 반려동물을 키우는 입장이라면 지금부터 제가 드리는 말씀을 유심히 들으셔야 합니다. 첫째,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합니다. 병이 나면 병원에 데려가서 나을 때까지 치료해 줘야 합니다. 그리고 좀 싫다 해서 유기하거나 죽이면 안 됩니다. 그것은 매우 큰 업을 짓는 일입니다.

둘째, 동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을 때 ‘행복한가?’ 하고 늘 살펴야 합니다. 즉, 역지사지(易地思之) 했을 때 동물이 행복하도록 해줘야 합니다. 아무리 말 못 하는 동물이라도 제 싫어하는 것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경전(經典)에 나오는 표현으로 자통지법(自通之法)을 잘 적용해야 합니다. ‘아, 이렇게 하면 이 반려동물도 좋아하겠지’ 하는 것을 해주어야 합니다. 또한 훈육의 목적이 아닌 경우에는 가혹 행위를 해서도 안 됩니다. 동물에 대한 학대 행위 또한 과보를 초래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셋째, 반려동물 때문에 가족의 화합이 깨진다면 반려동물 키우는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인간끼리의 사랑과 화합이 우선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가끔 반려동물 때문에 가족끼리 싸우고 가정이 시끄러운 수가 있는데, 그것은 절대 안 될 일입니다. 특히 동물 털에 민감한 어린아이가 있을 경우에는 애초에 반려동물을 들이는 문제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털 알레르기가 있거나 기관지가 안 좋은 사람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넷째, 호칭에 대한 얘기입니다. 반려동물을 ‘사람’으로 생각해서 호칭하는 수가 많은데, 그것은 지양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동물을 안으면서 ‘내가 너 엄마다’, ‘엄마 왔다’, ‘나는 너의 언니다’, ‘이모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큰일 날 소리입니다. 동물을 사랑하는 것은 좋으나 호칭마저 뒤섞어서 쓰면 안 됩니다. 자칫 잘못하면 다음 생에 그 동물로 태어나는 수가 있습니다.

왜 인간의 몸 받아 살고 있으면서 짐짓 동물이 되려고 합니까? 동물을 보고, ‘내 딸아’, ‘아들아’, ‘내 막내야’, ‘내 남편이야’ 하는 게 말이나 됩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오는 세상에 업으로 작용할 수 있는 말씨들은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고양이든 개든 상대에게는 이름을 지어주어서 부르면 되고, 본인은 ‘주인이야’, ‘집사야’라고 하면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에 대해서 아주 좋게 생각합니다. 반려동물은 정서적으로 의지가 된다고 합니다. 우울증, 고독증이 있는 분들이 반려동물을 통해서 위로를 받고 힐링이 된다는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대신, 반려동물 때문에 오히려 속상하고 스트레스를 받아서 애초의 그 자비심을 내동댕이쳐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너무 정이 깊어져서 며칠만 보지 못해도 병이 날 정도라면 그것은 애착이요, 애욕이니 스스로 마음 단속을 잘해야 합니다. 동물로 인해서 마음의 병을 얻는 일이 없으시길 바랍니다. 다음 주에는 ‘반려동물이 죽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관세음보살! 

* 한국불교대학 유튜브불교대학에서는 다양한 불교이야기를 시청할 수 있습니다.
 

無一 우학 한자성어 ⑬ 惡風試慈(악풍시자)

나쁜 바람이 자비를 시험한다

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에서 무의탁 노인 무료급식을 시작한지가 27년 정도 됩니다. 전세 포교당 시절부터 했으니 꽤나 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초심(初心)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때의 초심이란 ‘이웃들을 위해서, 우리 불교도 무엇인가 해보자’였습니다.

현재 7개 기관을 가지고 있는 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의 사회복지법인 무일복지재단도 그때의 원력이 바탕이 되어서 건립되었습니다. 그런데 무의탁 노인들을 위해 무료급식을 베푸는 모임 이름이 ‘자비회’입니다. 자비회가 1박2일 동안 이곳 B.U.D 세계명상센터에서 명상힐링캠프를 하겠다고 날을 잡아두었는데, 하필이면 이날 ‘다나스’라는 태풍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비회 회원들은 태풍의 바람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대구에서 감포까지 달려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사자성어 ‘惡風試慈(악풍시자)’를 만들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봉사 단체입니다. 저녁시간에 자비회를 상대로 간단한 소참 법문도 하게 되었는데 내용은 이러합니다.

“여러분은 바람을 이기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혹시 주위에서 시기하거나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굳건하게 버텨야 합니다. 그래야 대보살입니다. 욕을 얻어먹지 않는 봉사자는 없습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바람을 여덟 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그 여덟 가지 바람은 ‘이(利)·쇠(衰)·훼(毁)·예(譽)·칭(稱)·기(譏)·고(苦)·락(樂)’입니다. 뜻으로 새기면 이익, 쇠약, 추락, 명예, 칭찬, 비방, 고통, 오락입니다. 우리 불자들이 인격 수양, 마음공부를 함에 있어서는 늘 이 8풍을 조심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바람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강한 면역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내공을 튼튼히 하는 정진을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참선, 기도 등 수행을 매일처럼 해야 합니다. 대승보살의 봉사는 불심(佛心)으로 충만할 때 바라밀이 됩니다.

[불교신문3628호/2020년11월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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