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다음날 아침부터 21일간 ‘금강경’ 외우세요”

독실한 불자라서 늘 기도하고
모시는 불상이나 사진 있다면
밥솥과 쌀독 들고 들어갈 때
같이 모시고 가면 좋아

한 신도님의 편지입니다. “스님, 저희 집이 흔히 말하는 ‘대장군 방’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불안하고, 찝찝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는지, 스님의 지혜를 구하고자 하오니 꼭 답변 부탁드립니다.”

예, 이런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아파트 분양 신청을 해놓고 어떻게 하다 보니까, 방향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대장군 방’, ‘삼살 방’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참, 아주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안 갈 수도 없고, 가자니 무엇인가 잘못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답니다.

“그런 것은 절에 묻는 것이 아니다”고 물리치는 것도 무책임한 일이고, “방향이 어디 있느냐? 마음 내키는 대로 가면 될 일이지”라고 말하는 것도 중생의 근기를 저버리는 악행입니다. 세속 사람들은 종교를 떠나서 수백 년 수천 년 내려온 이런 민간 신앙에 대해 초연할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이 불교의 법 안에 없다면, 세속의 법으로라도 해결해 줘야 하는 것이 불교의 법입니다.

신도가 물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사찰의 스님들이 아무 대책 없이 아무 말이나 해서 이사 후에 큰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때는 때가 이미 늦은 것이요 그 상담 스님의 무능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스님들도 세속의 민간 신앙에 관한 체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한 사실이 맞든 안 맞든 그것은 차후의 일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사를 잘못 가서 문제가 생기면 세속에서는 “동티가 났다”고 말합니다. ‘동티’는 ‘동토(東土)’라는 한자어에서 왔는데, 우리말화된 것입니다. 즉 동티가 났다고 함은 이사를 잘못해서 갑자기 가족 중에 누군가가 아프거나,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하거나, 재물에 막대한 손해를 보거나 한 경우를 말합니다.

이사 후에 이런 우환이 들면 이사를 잘못해서 그런 것인가 하고 생각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래서 이사 문제는 섣불리,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이사에는 크게 방위와 택일로 나누어집니다. 물론 불교에서는 이사 방위와 이사 택일을 논하지 않습니다. 불교 본래의 것은 아니나, 불교 신도들이 이것에 대해서 많이 따지는 것은 현실입니다.

먼저, 오늘은 이사 방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올해는 삼살 방이 어느 쪽이냐?”, “올해는 대장군 방이 어느 쪽이냐?” 하는 것을 하도 물으니 절에서 만들어내는 거의 모든 달력에서는 이것을 가장 뒷면에다 크게 표시해 두었습니다. 신도들이 항상 공부하는 도량인 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의 달력에서조차 이 점을 무시할 수 없어서 적어놓았습니다. 심지어는 동지(冬至) 시(時)조차도 기록해둘 수밖에 없습니다.

거의 모든 한국 사람들, 특히 노년층의 어르신들이 하도 그런 것을 물어오니, 지식 제공의 차원에서 서비스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식자우환일 수도 있습니다. 괜히 알아서 이것저것에 걸림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무시한 뒤 무슨 일을 당했을 때 “아이고, 내가 그걸 몰랐구나. 그 때문에 내가 그런 일을 당했나” 하는 자가당착적 후회보다는 미리 알고 있는 것이 안정적 삶에 도움이 됨을 누차 강조해서 말씀드립니다.
 

이사 후 방위에 대해 찝찝한 마음이 들 때는 ‘마하(摩訶)’나 ‘옴’자를 붙이는 것도 방편이다. 사진은 우학스님 글씨.
이사 후 방위에 대해 찝찝한 마음이 들 때는 ‘마하(摩訶)’나 ‘옴’자를 붙이는 것도 방편이다. 사진은 우학스님 글씨.

이제 본론에 들어가겠습니다. 올해가 경자년인데, 경자년의 대장군 방은 서쪽입니다. 그리고 경자년의 삼살 방은 남쪽입니다. 이쪽으로 이사를 가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도 따지는 원리가 있습니다만, 지면 관계상 생략하겠습니다.

오늘의 주제로 돌아가서, 우리가 억지로 집을 하나 새로 장만을 했는데 안 갈 수는 없습니다. 이 광명천지의 세월에 살면서 “방향이 그래서 못간다”라고 하면, 그것은 참으로 기가 찬 일이지 않습니까? 가긴 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은, 이삿짐을 끌고 그쪽 방향으로 곧장 가지 말고, 저 바깥으로 돌아서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쪽으로 가야 한다면 오히려 북쪽이나 동쪽으로 빙 돌아서 간다는 것입니다. 한참 돌고 돌아서 새집에 들어가되, 제일 좋기로는 백 리 밖을 돌아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한 중요한 힌트는 이사 방위를 따질 때 현재 사는 시나 도를 벗어나면, 아무 관계가 없다는 이론이 있습니다. 따라서 방위가 맞지 않는다면, 시나 도를 벗어났다가 새집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이렇게 하면 본인의 현재 집에서 봤을 때는 ‘남쪽’이 되지만 차를 완전히 돌려서 백 리 바깥, 또는 다른 시나 도를 경유해서 들어가면 삼살 방이니, 대장군 방이니 하는 기분 나쁜 기운은 다 무시되고, 그런 기운을 다 떨치고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또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삿짐이 너무 많은 경우입니다. 그 많은 짐을 어떻게 다 돌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가장 중요한 물건만을 돌리면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밥솥과 쌀입니다. 쌀은 우리 가족의 기운의 원천입니다. 기운이라는 ‘기(氣)’자에도 ‘쌀 미(米)’자가 들어가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예로부터 쌀을 늘 앞장세웁니다. 쌀 담긴 쌀독을 챙기되, 재질이 플라스틱이면 버리고 항아리나 도자기로 바꾸시고, 만일 그런 쌀독이 있다면 그대로 옮기면 됩니다. 아무튼 숨 쉬는 좋은 쌀독에 쌀을 가득 넣고, 항상 밥해 먹는 밥솥을 챙기십시오. 밥솥은 옛날처럼 큰 솥이 아니라도 관계없습니다. 소형 압력밥솥이라도 늘 해먹던 밥솥이면 됩니다. 승용차에 쌀독과 밥솥을 실어서 한 바퀴 멀리, 즉 백 리 밖이나 다른 시, 도를 돌아서 이사할 새집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새집에 들어가서는 싣고 온 쌀독과 밥솥을 부엌의 동쪽에 갖다 놓으면 됩니다. 옛날부터 해오던 방식을 소개해 드리고 있습니다만, 물론 이것 또한 불교에서 나온 방책이 아니고 민간 신앙의 관습입니다. 민간 신앙이니만큼 적당히 잘 수용하시면 손해 볼 것은 없습니다.

만일, 독실한 불자라서 늘 기도하고 모시는 부처님 상이나 부처님 사진이 있다면 밥솥과 쌀독을 들고 들어갈 때, 같이 모시고 가면 아주 좋습니다.

그 다음 두 번째 방편을 소개하겠습니다. 이사 가는 날, 한 2~3일 전에 이사 갈 집에 팥을 한 되쯤 가지고 가서, 방방이 다니면서 “화엄성중, 화엄성중, 화엄성중…” 정근을 하면서 그 팥을 뿌리십시오. 거실은 물론 화장실까지 공간마다 빠짐없이 다 뿌리십시오. 만일 단독 주택이라면 집 바깥에도 뿌리면 좋습니다. 옛날부터 그렇게 해왔습니다. 절에서도 정화(淨化) 의식 때 팥을 많이 사용해왔습니다. 아무튼 2~3일 전에 먼저 가서 그렇게 팥을 뿌려두시고, 이사하기 몇 시간 전이든지, 아니면 하루 전에 팥을 깨끗이 쓸어내면 됩니다. 그리 어렵지 않지요?

세 번째의 방편입니다. 이사가 끝난 뒤, 다음날부터 아침마다 <금강경> 한 편씩을 거실에서 꼭 외우십시오. 혼자 읽으시기가 힘들면 유튜브에 올려진 ‘우학스님 금강경 독송’을 틀어놓고 같이 따라 하시면 됩니다. <금강경>을 21일간 꼭 독송하시면 이사로 인한 동티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기분이 좀 찝찝하다 싶으면, 공부를 잘하는 스님께 경면주사로 ‘옴’자를 좀 써달라고 해서 붙이십시오. 위치는 현관문 열고 들어와서 바로 위, 또는 거실에 조금 더 접근한 쪽으로, 눈에 안 띄어도 관계없습니다. 범어로 ‘옴()’자를 쓰는 대신에 마하(摩訶)를 한자로 쓴 것도 괜찮습니다. 

이렇게 한다면 3중, 4중으로 삼살 방의 살 또는 대장군 방의 살을 막을 수 있습니다. 혹시 살던 집에 가정법당이 꾸며져 있었다면, 그 가정법당의 부처님 및 법구는 먼저 모시기 바랍니다. 본 이삿짐이 움직일 때라도 부처님과 관계되는 물품들은 가장 먼저 집안으로 들여놓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하면 집안에 설령 삿된 기운이 있다 할지라도 부처님의 위신력과 법력으로 다 없어지게 됩니다. 

우리 불자들은 민간 신앙을 수용하면서, 불교적인 믿음에 바탕을 둔 방법도 쓸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삼보에 대한 신심(信心)이 아주 충만한 불자라면 아무 방향으로나 이사해도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신도님들의 근기를 맞추느라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전세 포교당부터 여러 번 절을 옮기면서도 방향에 신경을 써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동티가 난 적이 없습니다. 스님들은 저의 경우를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 이 글에 대한 내용은 한국불교대학 유튜브불교대학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無一 우학 한자성어 ⑧ 蜂鬪兩滅(봉투양멸)

벌의 전쟁, 양쪽이 다 죽는다

시골의 한 신도님이 한봉 여러 통을 절 정원 한쪽에 갖다 두고는 “스님, 시주하는 것이니까 받아주십시오” 하고는 휑하니 가버렸습니다. 나는 생각에, 꿀 뜨면 포교 선물로 드리던 된장에 이것도 보태면 되겠다 싶어 ‘장상첨밀(醬賞添蜜)’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정진하다가 오후 두 시쯤 돼서, 벌통을 둘러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두 종류의 벌, 즉 꿀벌과 말벌이 전쟁을 벌여 엄청난 숫자가 죽어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봉투양멸-마봉여밀봉(馬峰與蜜峰) 발전즉양살(發戰卽兩殺)이었습니다. 옆에 섰던 사람이 ‘참으로 어리석은 벌들’이라고 혀를 내둘렀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인간들이 하는 짓도 별반 차이가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부부, 형제간에 싸워서 가정이 망하는 수가 왜 없습니까. 당파 싸움이나 하다가 조선이란 나라가 일본에 잡아먹힌 일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남과 북이 전쟁이라도 벌이길 바라는 망발을 해대는데, 이는 전쟁의 속성을 모르는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어부지리(漁父之利)란 말도 결국 싸움판에서 나온 고사성어(故事成語) 임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쟁, 싸움에 대한 저의 철학을 말씀드립니다.

첫째, 가능하면 싸우지 마라! 둘째, 싸우더라도 적당히 싸워라! 즉 박 터져 가면서까지 싸우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무가치한, 쓸데없는 일로 싸우지 마라!

넷째, 좌우 돌아보면서 싸워라! 즉 내 주위에 형제가 있는지, 자식이 있는지, 부모가 있는지, 스님이 있는지를 보고 싸워야 합니다.

다섯째, 시도 때도 없이 싸우지 마라! 싸움은 진심(嗔心)의 표출입니다. 불자(佛子)라면 분노심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불교신문3618호/2020년9월30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