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2564년 부처님오신날 특집’
인터뷰 /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 일등공신
고(故) 용태영 변호사 부인 이경아 여사


1960년대 초 제정운동 시작
1973년 용 변호사 소송 제기
11차 변론 진행하며 여론 형성
아내로 내조하고 응원했을 뿐...

대법원 계류 중 불교입장 수용
1975년 ‘공휴일’ 국무회의 통과
온 불자와 국민들 함께 환영

청원운동 중심에 선 용 변호사
불교계 차원서 추념해 줬으면...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 운동에 앞장섰던 용태영 변호사의 10주기를 맞아 부인 이경아 여사가 5월21일 남편의 49재를 지냈던 조계사 대웅전 앞에 섰다.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 운동에 앞장섰던 용태영 변호사의 10주기를 맞아 부인 이경아 여사가 5월21일 남편의 49재를 지냈던 조계사 대웅전 앞에 섰다.

해마다 부처님오신날이 되면 잊을 수 없는 한 사람이 있다.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을 위해 헌신했던 용태영 변호사(2010년 별세)다. 1975년 1월15일 오전10시 이원경 문공부장관이 ‘석가탄신일을 공휴일로 제정한다’는 담화문을 발표하던 날 불교계는 60년대부터 주장해 왔던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지정에 관한 투쟁의 지난한 터널의 종점에 이르렀다.

이전에는 예수탄생일인 크리스마스만 종교관련 국가공휴일이 지정됐었다. 종교간 형평성은 물론 불균형까지 초래해 ‘종교편향 논란’을 일으켜 불자들의 저항을 불러 일으켰던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지정 운동’은 1975년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해소됐다.

용 변호사는 당시 불교신문과 인터뷰에서 “이 나라의 주인된 종교의 지위를 다시 찾은 역사적 조치”라고 평가했다. 그 법적투쟁의 중심에 있었던 용태영 변호사가 2010년 별세했을 때는 범불교계가 나서서 49재 봉행위원회를 구성해 조계사에서 ‘화세 용태영 변호사 49재 및 추모법회’를 봉행하기도 했다.

이후 10년이 지난 이번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용 변호사를 평생 내조했던 부인 이경아(83) 여사를 5월 21일 조계사에서 만나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 당시 용 변호사의 활동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함께 한 자리에는 당시 조계종 전국신도회 사무총장을 맡아 전국에서 올라온 불자들과 함께 투쟁의 선봉에 섰던 이건호(82) 한강 수상법당 회장이 동석해 당시 불교계 정황을 설명해 주었다.

당시 상황을 소추해 본다. 용태영 변호사는 1973년 3월24일 서울고등법원에 ‘석가탄신일 공휴권 등 확인 청구의 소’를 제기한 이후 줄곧 사건변론을 맡았다. 이 사건은 11차 변론까지 진행된 끝에 1974년 10월 30일 각하(却下) 결정이 났다. 소송에서 진 것이다. 하지만 즉각 대법원에 상고해 최종 결정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소송 과정에서 불교계는 전 국민들에게 부처님오신날에 대한 당위성과 정당성을 호소력 있게 알렸고 국민여론은 점차 불교계로 기울게 된다.

1974년 11월28일 국회 예산결산위원회에서 심흥선 총무처장관이 “불교계가 청구하고 있는 석가탄신일의 공휴 지정을 정부는 신중히 검토 중에 있다”고 밝힌다. 불교계를 대표해 대법원에 상고한 용태영 변호사는 이 소식을 듣고 소송을 취하한다. 조계종 총무원은 12월 20일 국무총리, 법무부장관, 문공부장관에게 청원서를 제출하고 해를 넘긴 1975년 1월14일 저녁 청와대에서 열린 야간 국무회의에서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지정의 건’은 통과된다.

담화문 발표 후 곧바로 조계종 총무원은 환영의 뜻을 밝히는 대국민메시지를 발표했다. “정부당국과 그동안 성원을 보내준 전 국민에게 감사를 드리고 이 기쁨을 함께 하고자 한다. 비록 때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이로써 민족문화사에 새로운 계기가 이룩될 것임을 확신한다.”

그렇게 45년 여가 훌쩍 지나갔다. 세월을 비껴갈 수는 없었다.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지정’을 외쳤던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人傑)은 간 데가 없었다. 그래도 살아남은 인걸을 찾아보니 용태영 변호사 부인과 당시 투쟁현장을 진두지휘했던 이건호 회장이었다. 코로나 사태로 어수선한 시기에 이 회장은 건강검진을 갔다가 이태원 확진자가 병원을 다녀가는 바람에 2주 동안 감금 아닌 감금을 당한 후 5월 20일에야 풀려났다.

곧바로 다음날 조계사 대웅전 앞에서 두 명과 만남의 약속이 이루어졌다. 두 명의 인사를 만나는 날 뜻밖의 만남이 있었다.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지정 행정소송이 한창이던 시절 투쟁에 동참했던 목승권(83) 전 중앙승가대학교 교수를 만났다. 마스크를 착용했지만 단박에 서로를 알아 본 이건호 회장은 목 교수와 뜨거운 재회의 악수를 나눴다. 자리를 신문사로 옮겨 이경아 여사에게 요즘 근황을 물었다.

“남편이 작고한 지 벌써 10년이나 지났네요. 올해는 10주기라 추모행사를 열고 싶었는데 코로나19로 인해 어쩔 방법이 없네요. 남편을 기억하는 자그마한 추모자리 마련해 보고 싶었는데 불교신문에서 연락이 와서 감사했어요. 매년 부처님오신날이 돌아오면 제 남편이 큰 일을 하고 갔다는 생각에 자랑스러운 생각이 듭니다.”

용 변호사와 결혼 후 종로구 삼청동 청와대와 담벼락을 사이에 둔 집에서 세 들어 살다가 1960년 초에 인근에 부지를 매입해 직접 집을 지어 지금도 그곳에서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이경아 여사는 ‘세월이 유수같이 지나감을 실감한다’고 했다. 남편은 별세하기 10여 년 전부터 자서전을 집필하는데 몰두해 8권을 발간했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궤적에 대한 기록을 남기려는 의지의 표출이었다.

1975년 부처님오신날 제정에 관한 소송이 한창이던 당시 상황은 어땠을지가 궁금했다.

“법조인인 남편은 돈에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수임료도 어려운 사람들이 오면 다른 변호사의 절반도 안되는 돈을 받고도 변호해 주었으니까요. 대신 사회적 정의에는 상당히 관심이 있어 당신이 옳다고 생각한 바가 있으면 어떤 고난을 뚫고라도 성취하는 분이었죠.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 소송 때는 많은 불교관계자를 만나면서 부당한 문제를 바로 세우려는 노력으로 일관했어요. 아내 된 도리로 그저 묵묵히 내조하며 응원해 드렸을 뿐입니다.”

가정을 돌보는데 소홀했던 남편으로 인해 자녀교육과 집안살림을 도맡아 왔던 이 여사는 남들이 보아도 번듯했던 변호사 가정에서도 자녀들 등록금 걱정까지 했다고 했다. 그래도 억척같은 생활력으로 아들과 딸 3명을 모두 서울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를 졸업시킨 ‘장한 어머니’가 됐다. 북한 평양에서 태어나 해방 후 월남한 이 여사는 “북한 출신의 부모님으로부터 배운 철저한 삶의 철학 덕분에 어려운 난관을 지나올 수 있었다고 본다”고 말했다.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에 관한 소송 당시 불교계 현장에 있었던 이건호 회장이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불교계의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했어요. 처음 공판에는 조용했는데 횟수를 지날수록 전국에서 불자들이 버스를 타고 상경하기 시작했고, 4∼5대였던 인원이 나중에는 10대, 20대로 늘어났고 법정 인근에 인파로 가득했어요. 울산, 경주, 부산, 대구 등 영남지역 불자는 물론이고 전라도 광주에서도 서울로 서울로 올라왔어요.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은행장의 80대 모친도 직접 올라와 투쟁할 정도였어요. 그만큼 불교계가 불공정과 불합리에 대해 분노했고 마침내 폭발했다고 볼 수 있었지요.”

소송 당시 이건호 회장이 보았던 용태영 변호사의 모습도 생생하게 설명했다.

“개인적으로 용태영 변호사님은 저의 고등학교(경성공업학교) 동문 선배님이셨어요. 소송을 하시면서 동문 후배인 저와 자주 만나 많은 일을 상의했고 추진해 나갔어요. 변호사님은 ‘우리 민족에게 불교는 주된 사상이다. 오랜 역사를 통해 토착화 된 불교는 우리의 전통사상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기독교의 크리스마스는 국가공휴일이 되고 부처님오신날은 안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불공정하고 불합리한 일’이라며 소송에 열정을 불태우셨어요.”

박정희 정권의 서슬 퍼런 정치상황에서 종단의 중요위치에 있던 인사들조차 정부와 다투는 일을 꺼려했던 당시였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용 변호사는 이런 사건을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워낙 청렴결백한 변호사였기 때문이었다. 소송이 계속되자 용 변호사는 상당한 강압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남편은 소송을 맡은 이후 중앙정보부에 2번 불려갔다가 나왔어요. 변호사라서인지 고문은 받지 않은 듯 몸은 성성해서 나왔지만 상당한 정신적 압박은 받을 듯해요. 워낙 성격이 강직하고 결백해서인지 정부에서도 탄압할 빌미를 잡지 못한 것 같았어요.”

올해로 부처님오신날 공휴일이 시행된 지는 45년이 흐르고 있다. 공휴일 지정을 위해 애썼던 용태영 변호사가 별세한 지도 10년이다. 이 시점에서 이 여사는 부처님오신날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고 싶어했다.

“국가공휴일로 지정된 부처님오신날은 이제 불교신자들만 축하하는 날이 아니게 됐어요. 온 국민이 경축하는 날이 된 거죠. 기독교인들이 부처님오신날을 축하하고, 크리스마스가 되면 조계사에서도 아기예수 탄생을 축하드리잖아요. 부처님오신날은 이제 다종교 국가인 우리나라에서 종교 간의 화합을 다지는 날로 자리 잡았고, 나아가 민족의 평화와 인류의 평화를 기원하는 국경일이 되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남편이 남기고 간 족적은 더 커 보입니다.”

이건호 회장도 한마디 부언했다.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지정에 앞장 선 용태영 변호사를 추념하는 모임이나 단체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단순히 한 사람의 개인의 업적을 선양하는 것이 아니라 용 변호사님이 불교계의 의지를 담아 성취한 국가공휴일인 부처님오신날의 의미를 되새기자는 것이지요.”

올해는 코로나19 사태로 부처님오신날 제등행렬도 취소된 상태다. 하지만 4월 30일 부처님오신날 국가지정 공휴일에는 온 국민이 부처님오심을 마음 속으로 경축했다. 또 한달 미뤄진 5월 30일에는 저마다 사찰을 찾아 봉축연등을 밝힐 것이다. 그 연등 불빛에는 부처님오신날이 있기까지 노력한 용태영 변호사와 당시 관계자들의 노고도 함께 빛이 날 것이다.
 

이경아 여사가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운동에 앞장섰던 이건호 한강 수상법당 회장(사진 왼쪽)과 목승권 전 중앙승가대학교 교수를 조계사에서 만났다.
이경아 여사가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운동에 앞장섰던 이건호 한강 수상법당 회장(사진 왼쪽)과 목승권 전 중앙승가대학교 교수를 조계사에서 만났다.

여태동 기자 tdyeo@ibulgyo.com
사진=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불교신문3586호/2020년5월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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