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안거 결제를 앞두고 위례 상월선원 야외 천막 고행 결사에 대한 사부대중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 가운데 중앙승가대 불교학부 교수 자현스님이 천막 법당에 깃든 붓다의 정신이라는 제목의 원고를 지난 2일 본지에 보내왔다자현스님은 기고문을 통해 천막 법당은 현대판 결사 운동의 계승이라며 부처님께서 최후의 유언으로 남기신 방일(放逸)하지 말라는 당부가 오늘의 위례 신도시를 맴도는 듯하다고 강조했다.

 

자현스님 중앙승가대 불교학부 교수
자현스님

며칠 후면 조계종의 수행 축제인 동안거가 시작된다. 매 안거 때마다 2000명 이상의 스님들이 서슬 퍼런 깨침을 찾아 내면의 여행을 떠나곤 한다. 예전에는 선원을 심검당(尋劍堂)이라고 했다. 마음의 검을 찾아 참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한 수행처가 선원이기 때문이다. 또 선불장(選佛場)이라고도 했는데, 붓다를 뽑는 최고의 과거장이라는 의미다.

선진화의 바람 속에 명상이 현대사회의 제1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윤리학>에서 제시한 것처럼, 인간 삶의 목적은 부나 명예가 아닌 행복이기 때문이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리는 현대인에게, 자기조절인 명상은 또 하나의 내적인 빛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것이 개인을 넘어선 이웃 및 사회와 함께 하고픈 행복이라면 단순한 명상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 위대한 명상이 필요한 것이다.

선에는 서릿발보다 엄숙하고 죽음보다도 치열한 고뇌가 묻어있다. 이것을 넘어선 이들에게만 모두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깨달음이 고이게 된다. 알을 깨고 나오는 새의 간절함과 고단한 노력이 그곳에 존재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위대하신 것은 한량없는 극기를 통해, 인류를 행복으로 인도하는 정각을 성취하셨기 때문이다. 이런 붓다의 발밑에서 또다시 2000명의 눈 푸른 수행자가 당당한 깨침에 도전장을 내민다. 이것이 바로 소리 없는 존재의 아우성, 즉 동안거다.

추위와 삭풍이 산사를 휘감는 동안거 기간은 치열한 수행에 맞춤이다. 모든 것을 거두어들이고 세상을 침묵에 잠기게 하는 겨울은 구도와 수행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겨울에 하늘을 이불 삼고 대지를 안방 삼아 안거에 드는 이들이 있다. 위례 신도시에 위치한 상월선원(霜月禪院)이 그곳이다. 말이 선원이지 불편함만이 가득한 천막 법당이 전부다. 그러나 이곳에는 가장 낮은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려는 간절함과 높은 서원이 충만하다.

원효의 <발심수행장>에는 절하는 무릎이 얼음 같더라도 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내지 말며, 주린 창자가 끊어질 것 같아도 음식을 구하는 생각을 내지 마라는 구절이 있다. 천막 법당에서 하루 14시간 참선과 벗하며, 1끼와 묵언 수행을 다짐한 이들에게는 이런 원효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천막 법당의 안거 대중에는 총무원장을 역임하신 자승스님이 눈에 띈다. 종단의 최고 수장을 지낸 분이 낮고 천한 곳에서 선불교의 이정표를 새롭게 정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왕궁의 편안함에 안주하셨다면, 불교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스스로를 버리는 낮은 실천이 있었으므로 불교라는 모든 중생의 행복은 비로소 가능했다.

노자는 바다는 낮기 때문에 모든 물의 제왕(帝王)이 된다고 했다. 또 율장에서 부처님은 낮은 리더십, 즉 존중의 가치를 역설하고 있다. 천막 법당은 바로 이것을 증명하는 실천의 장인 셈이다.

상월선원의 상월은 엄혹한 달밤의 서리를 뜻하지만, 여기에는 또 낮이 가장 짧고 어둠이 긴 동지라는 의미도 있다. 동지부터 어둠은 물러나며, 낮의 광명은 길어지기 시작한다. 해서 <주역>에서는 동지를 상징하는 지뢰복괘를 길상의 으뜸으로 여기는 것이다.

고려불교가 찌들었을 때, 지눌스님은 수도인 개경에서 가장 먼 송광사로 물러나 수행결사를 일으켰다. 이 정혜결사로 인해 송광사는 고려 말에 이르면, ‘동방제일도량(東方第一道場)’ 즉 고려 최고의 사찰이라는 영예를 얻게 된다. 이런 점에서 천막 법당은 현대판 결사 운동의 계승이라는 판단도 가능하다.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며, 노년은 안주하기 쉽고 치열해지기는 어려운 법이다. 이런 점에서 자승스님의 낮추는 실천은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을 환기한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천막 결사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그대는 자신에게 한 번이라도 치열했던 적이 있는가?’ 내적인 치열함이 없다면 그것은 이미 죽은 인간일 뿐이다. 그래서 공자는 안식처를 묻는 제자에게 무덤만이 쉴 곳임을 역설했던 것이 아닌가!

부처님께서 최후의 유언으로 남기신 방일(放逸)하지 말라는 당부가 오늘의 위례 신도시를 맴도는 듯하다.

[불교신문3533호/2019년11월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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