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율은 모든 시작이고 과정이자 완성”
“계율은 모든 시작이고 과정이자 완성”
  • 어현경 기자
  • 승인 2019.09.20 14: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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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60주년 맞이 특별기획
‘상구보리 하화중생’ 현장 ⑪
송광사 율학승가대학원장 대경스님


도반과 송광사 율원 개원 주도
강사 없이 3년 결사하며 탁마
통도사 파계사 율원 1기 수학
출가 15년 만에 대만유학 결심
복엄불학원서 체계적으로 공부
2010년 귀국해 후학들 지도해
율사의 길을 걸어온 대경스님은 스스로에게 엄격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자비롭다.
율사의 길을 걸어온 대경스님은 스스로에게 엄격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자비롭다.

 

대경스님은 천생 율사다. 승가대학 졸업 후 도반들과 마음을 모아 조계총림 송광사에 율원을 개원한 스님은 1기생으로 3년 공부를 회향했고, 통도사 율원과 파계사 영산율원이 개원할 때도 참여했다.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출가한지 15년을 넘긴 1990년대 후반에 대만으로 유학을 떠난 스님은 복엄불학원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지금은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다. 9월3일 송광사 율학승가대학원에서 원장 대경스님을 만났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출가를 결심한 스님은 고향인 함평에서 순천 송광사까지 걸어왔다. 가을걷이를 돕고 밥을 얻어먹어가며 송광사까지 가는 길엔 우여곡절이 많았다. 젊은 청년이 머리를 빡빡 깎고 나타나자 몇 명 주민들은 동네에 수상한 사람이 왔다며 신고를 하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경찰서에 4번을 갔다 왔다.

1980년대 초반 시대적 상황 때문에 벌어진 일들이다. 마침내 송광사에 도착한 스님은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어린 나이었지만 인생 좌표를 세우고 떠난 출가의 길이라 신심을 내 걸어갔다”는 얘기를 들으니 왜소한 체격과는 달리 한 번 정하면 묵묵히 해내는 스님의 모습이 상상됐다.

출가하는 데는 돌아가신 아버지 영향이 컸다고 한다. 스님에게 아버지는 스승이자 도반이었다. 2남3녀 중 차남인 스님은 고등학교 때까지 아버지, 형과 같은 방을 썼다. 저녁때면 아버지로부터 많은 얘기를 들었다. 살아온 얘기부터 원효스님이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은 것 등 헤아릴 수 없다. 어느 때는 밤을 세우기도 했다.

“아버지는 정규교육을 많이 받지 못했지만 6.25전쟁을 겪으며 생사의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긴 분이라 주변에 덕을 쌓으라고 항상 말씀했다”며 “마음에 대한 얘기도 많이 해준 덕분에 출가를 결심했던 것 같다”고 스님은 회상했다.

둘째 아들이 출가하겠다고 말하자 아버지는 선뜻 허락하며 직접 삭발을 해줬다. 출가 후 아버지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듣고 4년 만에 집으로 가보니 앉은뱅이책상 위에 집 떠나기 전 자른 스님의 머리카락이 그대로 보관돼 있었다. 그 때 머리카락을 챙겨 돌아온 스님은 지금도 아버지가 잘라준 머리카락을 보며 늘 초발심을 잊지 말자고 스스로를 경책한다.

행자 때는 법정스님, 법흥스님 등 여러 스님에게 강의를 들었다. 당시 한 행자가 법정스님에게 도인 스님을 어떻게 알아보는지를 물었다. 법정스님은 “계정혜 계율이 청정하고 선정이 있고 경전에 의거한 지혜가 있는 스님이 도인이다. 올바로 배운 사람이 올바로 행한다. 그것으로 기준을 삼으라”고 답했다. 또 “수행자가 스스로를 용서하고 자기합리화하면 수행자로서 목숨이 다한 것”이라고 했다.

어른 스님들이 늘 계정혜를 강조하다보니 대경스님 역시 율을 공부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리고 10대 존자 중 지계제일인 우바리 존자와 같은 수행자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송광사 승가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스님은 율원으로 진학했다. 송광사 조계총림 율원 1기인 스님은 율원 설립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당시 총림 중에는 해인사에만 율원이 있었고, 송광사에서는 율원의 필요성이 제기되던 때다. 더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컸던 대경스님은 도반인 일귀, 원순, 원종스님과 지금 율학승가대학원 자리인 부도전에 모여 율원을 시작했다.

부도전은 부휴선사 이후 조선시대 스님들 부도를 관리하는 전각으로, 당시에는 부휴문중 노스님들이 기거했던 곳이다. 젊은 스님들이 발심하자 노스님들은 선뜻 방사를 내어줬다.

“율원이라고 했지만 결사정신이 강했다. 번역된 율서도 없었고 강의해줄 스님도 없어 우리끼리 아침저녁으로 참선하고 108배를 올리며 논강을 했다. 3년 동안 같이 공부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정화스님, 지운스님도 참여했고, 호진스님도 와서 강의를 해줬다.”

율원을 마친 후에는 선원에가 3년 정진을 했다. 결제 전에 5대보궁을 참배하자고 마음먹고 봉정암에 올랐을 때다. 가사와 장삼 발우를 짊어지고 산을 오르다 4명의 보살들을 만났다. 걸망이 무거워 짐을 나눠지고 싶다는 생각을 속으로 하고 있는데 가만히 보니 저마다 과일과 초, 쌀 등 공양물들을 잔뜩 짊어지고 있었다.

“내 걸망 안에는 다 내 짐이고 부처님께 올릴 공양물이라고는 향이 전부였다. 반면 불전과 스님들에게 공양 올리기 위해 무거운 가방을 지고 올라가는 신도들 모습을 보며 스스로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어느 날 계단위원으로 있는 종진스님과 성우스님, 철우스님이 곡성 태안사에서 계율특강을 한다고 해서 참가했다. 그곳에서 법광스님이 대경스님에게 통도사에 율원을 만드니 같이 가서 처음을 함께 하자고 권유했다.

통도사 수도암 율원으로 가 2년간 공부하자고 마음을 먹었는데 스님이 둘뿐이라 수월하지 않았다. 인연이 무르익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던 차에 성우스님과 철우스님이 파계사에서 영산율원을 개원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철우스님에게 강의를 들으면서 영산율원에서 3년간 공부다운 공부를 했다.

좀 더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싶은 마음에 스님은 출가한 지 15년 만에 대만유학길에 올랐다. “자의반 타의반 율사라 불리며 단일계단 수계산림 때 인례사, 습의사로 강의도 했지만 내 살림살이를 속일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 강의할 실력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공부가 필요했다.”

대만을 택한 이유는 송광사 율원시절 순례경험 때문이다. 당시 율주였던 전 방장 보성스님은 해외순례를 안가겠다고 한 대경스님에게 “젊은 스님이 안목을 넓혀야지 방구석에만 있으면 되냐”며 비행기 표를 손수 끊어줬다.

덕분에 대만으로 간 스님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대만 불광사 도서관을 가니 고려대장경, 남전대장경 등 7종류 대장경이 있었다. 시청각실과 출판사까지 갖춰져 있었고 불교사전을 만든다고 작업을 하고 있었다. 송광사에는 지금도 없는 도서관이 불광사에는 7개나 더 있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책임지고 또 사부대중이 함께 하는 대만불교를 보고 놀라울 다름이었다.”

그 기억으로 대만유학을 간 스님은 처음엔 중국어를 못해 혜일강당에서 언어를 배웠다. 그곳서 대학승으로 추앙받는 인순스님도 만났다. 구순이 넘은 스님에게 “비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물으니 “요달생사(了達生死, 생사를 벗어나라)” 하고 답해줬다. 다시 생사를 해탈하는 방법을 묻자 인순스님은 “단탐진치(斷貪瞋癡, 탐진치를 끊으라)”고 일러줬다. 인순스님의 가르침은 단순명쾌해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계율도량으로 유명한 정각정사에서 2년 반 정도 머물던 스님은 복엄불학원에 입학했다. 많이 듣고 많이 보자는 생각에서 신청할 수 있는 학점만큼 수업을 들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일은 쉽지 않아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다.

폐를 끼친 것 같지만 선지식을 만나 가르침을 받고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어 스님은 정말 좋았다. 출가해 대만까지 와서 부처님 경전을 배우는 것으로 무량한 복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타지에서 공부하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치아를 여러 개 잃을 정도였지만 스님은 불법을 익힐 수 있어서 기뻤다.
 

한자가 익숙하지 않은 기자에게 판서를 해가며 친절하게 설명해주기까지 하는 스님을 보니 수업시간에 열정적으로 강의하는 모습이 상상된다.
한자가 익숙하지 않은 기자에게 판서를 해가며 친절하게 설명해주기까지 하는 스님을 보니 수업시간에 열정적으로 강의하는 모습이 상상된다.

2010년경 돌아온 스님은 송광사 승가대학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다가 2015년부터 율학승가대학원장 소임을 맡았다. 스님은 학인 스님들에게 늘 신구의(身口意) 삼업을 청정히 하라고 강조한다.

한 생각 의업이 발동해서 구업이 나오고, 구업이 싹터서 신업으로 나온다. 신업들이 습관이 되고 습관들이 성격을 만든다. 성격이 바로 운명이고 업보다. 의업을 언제나 관조하고, 말 한 마디 행동이 다 연결되기 때문에 조심하라는 의미다. “가능하면 부처님을 가까이 하며 108배라도 하고, 부처님 경전을 독송하고 스스로를 관조하라”고 스님은 당부했다.

또 스님은 “대만유학시절 일화를 전하며 승가가 청정하면 신도들은 자연스럽게 따른다”고 했다. 아침7시 버스를 타고 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70대 할머니가 스님을 보고 반갑게 인사를 하며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공양했다. 스님이 자신의 말을 못 알아듣는다고 생각한 할머니는 중국어, 영어, 일어로 얘기를 했는데, 돌아가는 비행기 값에 보태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가던 길을 되돌아와 다시 공양을 한다며 돈을 건넸다. 뜻하지 않게 공양을 받은 스님은 놀랍기도 하고 고마웠다. 그러다가 버스정류장에서 할머니를 또 만났다. 물건 사고오던 할머니는 거스름돈까지 스님에게 공양했다. 잠깐 사이 세 번을 만났는데 세 번 다 보시하는 할머니를 보며 스님은 참괴심과 함께 대만스님들이 닦아놓은 공덕이 자신에게까지 왔다는 걸 느꼈다.

“남한 인구 절반인 대만에 불교대학도 많고 방송도 7개가 넘는다. 결국 스님들이 청정하게 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스님은 “출가자가 공부하면 9대가 승천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흐르는 물 한 방울도 소화시키지 못한다는 말처럼 현전승가의 최선은 계율 지키며 공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계는 부처님 몸이고, 율은 부처님 행이고, 선은 부처님 마음이고 경은 부처님 말씀”이라며 “계율은 모든 시작이고 과정의 기쁨이고 완성이다. 깨달음도 계율로써 증명돼야 하니 깨달음과 계율이 어긋날 수 없다”며 지계를 당부했다.
 

대경스님은…
1983년 계룡스님을 은사로 송광사에서 출가했다. 1984년 해인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87년 범어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송광사승가대학 졸업 후 율원 1기로 3년 결사를 마친 스님은 수선사 선방으로 갔다. 산철결제도 그 때 만들었다고 한다. “3년 결사를 하자고 했는데 해제 때 다른 절로 옮겨가지 말고 수선사에 남아 같이 공부하자는 생각에서 산철결제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강원과 율원, 선원에서 10년간 공부한 스님은 그간의 공부한 은혜를 갚기 위해 송광사 원주 소임과 인월암 교화(현 포교국장)를 맡아 포교를 했다. 이후 통도사 율원과 파계사 영산율원에서 공부한 스님은 대만으로 유학 가 복엄불학원, 호주 정공학회서 공부하고 2010년 귀국했다. 송광사 승가대학 강사를 지냈으며, 현재 송광사 율학승가대학원장이다.

송광사=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이준엽 광주전남지사장 maha0703@ibulgyo.com

[불교신문3520호/2019년9월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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