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에 강한 한국인, 회통의 지혜 살려야”

和會로 중관ㆍ유식 대립 해소
삼국통일 실질 기반 마련한
통일신라 원효 최치원부터

고려시대 의천과 지눌스님
조선 함허 설잠 보우 서산
근·현대 경허 탄허스님까지

선ㆍ화엄 기반 대가들 만난
회통사상, ‘한국학의 특징’
가장 한국적 정신 자리매김

문광스님
문광스님

➲ 태극기, 세상에서 가장 난해한 국기

세계의 모든 국가의 국기 가운데 가장 난해한 국기를 꼽으라면 우리나라의 태극기는 틀림없이 상위에 랭크될 것이다. 인간이 남자와 여자의 두 성별만 있듯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음양(陰陽)’이라는 상대적인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이 둘은 서로를 극하는 상극(相剋)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도움을 주는 상생(相生)의 원리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공존하기도 한다. ‘태극(太極)’이란 서로 분열하려는 원심력과 서로 화합하려는 구심력의 ‘회통(會通)’을 의미한다.

‘통일(統一)’이라는 말도 <주역(周易)>의 통체일태극(統體一太極)에서 나왔다고 한다. ‘통체일태극’은 ‘전체가 하나의 태극’이라는 뜻으로 결국 세상에는 하나의 궁극적 진리가 있다는 말이다. 이렇듯 ‘태극’과 ‘회통’은 ‘통일’이라는 말과 함께 한국인에게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이름값을 해야 하듯이 우리 대한국민은 태극기라는 ‘국기값’을 해야 하는 것이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세계적으로 유행하여 팬데믹이 선언된 지금 질병의 퇴치뿐만이 아니라 정치·경제·외교에 이르기까지 세계질서의 거대한 변화가 예측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 국민들은 분열보다는 화합으로 국론을 모아 위기에 대처해야 한다. 

위기의 시대! 전 세계가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냉혹한 현실 속에서 회통학(會通學)의 역사를 간략히 돌아보고 그 속에서 지혜를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되리라 생각한다. 

➲ 통일신라와 고려의 회통학 

한국학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회통학’과 ‘회통불교’는 반드시 언급될 수밖에 없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라 하겠다. 한국사상사에서 첫 번째로 언급될 회통의 대가는 역시 원효(元曉, 617~686)이다. 원효의 ‘화쟁(和諍)’과 ‘회통(會通)’의 정신은 일심(一心)과 무애(無碍)와 함께 그의 대표적 사상으로 거론된다.

한국사상의 새벽이라고 할 만한 그의 ‘화회(和會)’의 정신은 불교 교학 안에서 중관학과 유식학의 대립을 해소하는 방법론으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삼국통일의 기반이 되었고 전쟁으로 갈라진 민족을 하나로 통합하는 중추적인 이념이 되기도 하였다.

최치원(崔致遠, 857~?)은 ‘난랑비(鸞郞碑) 서문’에서 우리 민족의 현묘(玄妙)한 도인 ‘풍류(風流)’를 언급하면서 ‘포함삼교(包含三敎)’로써 이를 설명해 내고 있다. 즉 불교, 유교, 도교가 하나로 회통하면서 ‘풍류’라는 민족적 특성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 유교에서는 동국 18현(賢)의 한 분으로 문묘(文廟)에 배향되어 있고, 한국 도교에서는 비조(鼻祖)로 추앙받고 있으며, 불교계에서는 사산비명(四山碑銘)을 남겨준 불교사학(佛敎史學)의 대가로 존경받고 있다. 

고려는 불교를 숭상하면서도 유교와 적극적으로 융합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불교계 내부에서도 의천(義天, 1055~1101)과 지눌(知訥, 1158~1210)이 선(禪)과 교(敎)를 융합하는 사상을 전개했다. 의천이 교관겸수(敎觀兼修)를 강조했다면, 지눌은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하여 한국적 통불교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중국적 종파불교는 한국적 회통불교로 확고히 변모하는 모습을 완성해갔다.
 

한국을 대표하는 회통학의 대가들. 윗줄부터 통일신라의 원효스님과 최치원, 고려시대 의천스님과 지눌스님, 조선시대 함허스님과 설잠스님, 보우스님과 서산스님, 근·현대의 경허스님과 탄허스님. 설잠 김시습의 진영은 부여 무량사의 것을 참고로 하여 최근 설악산 오세암에서 새롭게 스님의 모습으로 조성한 것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회통학의 대가들. 윗줄부터 통일신라의 원효스님과 최치원, 고려시대 의천스님과 지눌스님, 조선시대 함허스님과 설잠스님, 보우스님과 서산스님, 근·현대의 경허스님과 탄허스님. 설잠 김시습의 진영은 부여 무량사의 것을 참고로 하여 최근 설악산 오세암에서 새롭게 스님의 모습으로 조성한 것이다.

➲ 조선의 회통학 

조선은 성리학을 내세우며 불교를 억제했기 때문에 불교계의 고승들은 적극적으로 유불(儒佛)의 일치를 강조하는 사상을 전개했다. 

함허(涵虛, 137~1433)는 <현정론(顯正論)>을 지어 배불론자들이 제기한 불교비판을 하나하나 논박했다. 여기에서 “천하에 두 도가 없고 성인에게 두 마음이 없다”는 ‘천하무이도(天下無二道), 성인무양심(聖人無兩心)’이라는 회통학의 상징적인 명제를 제시했다. 이 구절은 원래 <순자(荀子)> ‘해폐(解蔽)’ 편에 등장하는 구절이었는데 조선의 함허를 거치면서 회통론의 대명사처럼 활용되었다.

설잠(雪岑, 1435~1493)은 매월당 김시습으로 더욱 잘 알려진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유가의 선비로 산 인생보다 불교의 승려로 산 세월이 더 길었다. 그는 유불선(儒佛仙) 삼교에 종횡무진했는데, 우리 국민들이 <금오신화>에 대해서는 잘 알아도 의상의 <화엄일승법계도>에 대한 주석인 <화엄일승법계도주병서(華嚴一乘法界圖注幷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조선조 화엄학 연구의 한 획을 그은 이 저술은 그가 설악산 오세암에 머물며 저술한 것이다. 그의 초상은 부여 무량사 산신각에 유가 선비의 모습으로 모셔져 있으나 조만간 오세암에 삭발염의한 스님의 영정으로 모셔질 예정이다. 이제야 처음으로 승려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다.

보우(普雨, 1515~1565)는 문정왕후를 도와 봉은사에서 승과를 부활시키는 등 조선의 불교부흥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스님은 불교와 유교가 둘이 없다는 유불무이관(儒佛無二觀)을 펼치며 불교의 명맥을 잇는데 기여했으나 유생들에게 요승으로 몰려 제주도로 유배되어 순교하는 비운을 겪었다.

하지만 그가 승과를 부활시키지 않았다면 임진왜란 당시 서산과 같은 고승이 팔도도총섭이라는 공직을 맡지도 않았을 것이며, 사명과 같은 승병의 활약도 기대하기 힘들었을지 모른다. 보우의 문집인 <허응당집(虛應堂集)>은 20세기에 와서야 일본에서 발견됨으로써 그의 유불회통의 정신이 영원히 역사 속에 묻힐 뻔한 위기를 모면했다.

서산(西山, 1520~1604)은 조선을 대표하는 선사(禪師)로 그의 <선가귀감(禪家龜鑑)>은 지금까지도 선불교를 연구하는 이들의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하지만 이 텍스트는 원래 <유가귀감(儒家龜鑑)>, <도가귀감(道家龜鑑)>과 함께 <삼가귀감(三家龜鑑)>의 일부였다.

<유가귀감>과 <도가귀감>은 아주 짧은 글이지만 유교와 도교의 핵심종지가 요약된 명저로 스님의 유교·도교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깊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동양학에 관심 있는 이들은 반드시 읽어봄직한 필독서이자 회통학의 보고라 할 수 있다.

➲ 근·현대의 회통학

잠자던 한국선(韓國禪)을 다시 일깨운 경허(鏡虛, 1846~1912)는 제자 한암에게 <장자>를 천독했다고 말한 바 있다. 조선말에서 일제강점기로 넘어가는 암흑기를 살아가며 할 바가 없었던 경허는 선도(仙道)를 선지(禪旨)에 결합하여 대붕(大鵬)의 무애(無碍)를 실천해 보였다. 그는 근대 한국선의 중흥조이자 장자(莊子)의 해탈이라 할 수 있는 ‘현해(懸解)’를 몸소 보여줌으로써 20세기 한국적 회통학에 있어서 바둑판의 천원(天元)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경허의 ‘허(虛)’는 탄허(呑虛, 1913~ 1983)로 계승되었는데, 오대산에서 <장자> 강의를 일주일 들은 양주동 박사는 “장자가 다시 살아 돌아와도 탄허를 당해낼 수 없을 것”이라고 극찬했다.

불교에서 탄허보다 나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유교에서 탄허보다 나은 선비가 있을 수도 있으며, 도교에서 탄허보다 나은 이가 있을 수도 있지만 유불선을 회통해서 총체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탄허가 단연 최고였다. 탄허는 회통사상이야말로 가장 한국적인 정신이라고 역설했다. 그의 회통사상은 선(禪)과 화엄(華嚴)을 기반으로 했는데 불교를 만나 그의 회통학은 정점에 도달하게 되었다. 

➲ 역사적 과오, 되풀이 할 것인가

조선의 붕당정치는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양당에서 시작됐다. 이후 동인은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서인은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분열되어 4색 당파로 정착되었다. 조선이라는 하나의 태극은 음양을 거쳐 사상(四象)으로 고착하게 된 것이다. 

지금 한국 국민에게 여론조사를 하여 조선조의 네 당파 가운데 어디를 지지하느냐고 물어본다면 국민의 7할 내지 8할은 그 어떤 당파도 지지하지 않는다고 할 것이 자명하다. 국가 전체를 돌보지 않고 당리당략에만 빠져 결국 나라를 망하게 한 장본인이 바로 위정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200년 뒤에 우리 자손들이 21세기의 대한민국을 평가한다면 우리는 과연 어떠한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될까? 첨예하게 대립하고 처절하게 반목하여 조선시대의 과오를 다시 되풀이했다고 비난받지는 않을까? 결정적인 순간마다 분열하여 발전의 기회를 놓치고 외세의 침입과 국난을 반복했다고 지탄받지는 않을까?

위기에 강한 한국인! 그러나 위기에 닥쳤을 때만 강해져서는 안 되겠다. 우리 역사의 소중한 자산인 ‘회통(會通)’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집단지성의 지혜로 이 난국을 타개해 나가야 하겠다. 

[불교신문3573호/2020년4월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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