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광화문을 천안문과 바꾸지 않는다

통일제국이 형성될 때마다
중국은 야욕을 멈춘 적 없다
수·당, 원·청나라가 그랬고

6·25전쟁 때도 중공군이
우리 산하대지를 짓밟았다
친일만큼 親中도 위험하다

중국사·동양학 바탕으로
그들 심리 제대로 파악해야

문광스님
문광스님

➲ 중국은 ‘논어’가 필요한 나라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하던 1992년, 나는 중어중문학과 2학년 대학생이었다. 수교 1년 전부터 대만으로 어학연수를 가던 관례를 깨고 북경어학연수가 생겨서 큰 변화가 있을 것을 짐작했지만, 갑자기 성사된 한·중 수교에 모두가 놀랐고 모든 것은 급변해 갔다. 나는 출가할 때까지 대학원 석사과정을 포함하여 총 10년간 중국학을 전공하면서도 중국연수를 한 번도 다녀오지 않은 보기 드문 중문학도였다. 스스로 ‘국어중문학과’라는 농담을 할 정도로 도학(道學)과 문학(文學)에만 골몰했던 것이다.

방대한 동양학의 보고(寶庫)를 간직한 위대한 나라 중국은 많은 인구와 넓은 면적, 유장한 역사와 심오한 전통을 가진 대국임에 틀림없다. 중국학을 전공하는 연구자들은 중국의 그 방대함에 놀라고, 시간이 흐를수록 겁을 먹다가, 결국 두 손을 들고 존경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 중국을 찬탄하는 ‘유사 사대주의(類似 事大主義)’에 빠져 여타의 한국인보다 중국을 많이 안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우월함을 자랑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이들도 있다. 

중국과의 수교 이후 나는 자유롭게 대륙의 중국인들을 접하고 현실 중국의 상황을 유심히 관찰하다가 스스로 하나의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중국은 <논어(論語)>의 나라가 아니라 논어가 필요한 나라구나. 공자가 다시 살아 돌아와 천하를 떠돌며 유세를 한다 해도 여전히 중국 땅에서 뜻을 이루긴 어려울 것이다. 공자는 중국인을 제도하기 위해 중국 땅에 태어났을 뿐이며, 중국보다 한국이 오히려 논어의 나라에 가깝다.” 

내 눈에 비친 중국인은 공적(公的)인 관계에서 ‘꽌시(關係)’를 중시하고 사심(私心)과 탐욕에 의해 일을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고, 자비보다는 무지막지한 약육강식을 선택하고, 도(道)와 진리보다는 현실적 이익에 탐닉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지면상으로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실망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그런 속된 욕망을 표현하면서 ‘실용주의’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물론 이런 나의 성격 때문에 출가까지 하게 되었을 것이지만 중국은 확실히 문제가 많아 보였다.

중국에 대한 환상은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고, 동양학 전공자들이 중국이라는 아편에서 빨리 헤어나야 한다는 막연한 신념을 갖고 입산했다. 출가한 뒤 한국불교사를 공부하기 시작하며 한국고승들의 수승한 면모를 접하면서 중국학에서 한국학으로 신나게 전환할 수 있었다. “그래! 한국은 중국보다 못하지 않다.” 나는 ‘한국학’이란 말이 좋아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박사과정에 입학했고, 한국학대학원의 승려 박사 1호가 되었다. 
 

한국의 광화문. 사진=crowdpic
한국의 광화문. 사진=crowdpic

➲ ‘아큐’와 ‘아비’: 중국은 변하지 않았다

중국을 대표하는 대문호 노신(魯迅)은 중국인들의 병을 고치겠다는 일념으로 일본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길거리에서 일본인에게 맞고 있는 중국인을 같은 중국인들이 둘러싸서 구경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 사건 이후 노신은 중국인의 육체를 치료할 게 아니라 정신을 뜯어 고쳐야겠다고 결심하고 귀국하여 문학가가 되었다.

지금도 중국인들은 ‘웨이꽌(圍觀)’이라 하여 에워싸서 구경만 하기를 즐기는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얼마 전 투신자살하려는 여성을 말리지 않고 있다가 그녀가 떨어지자 ‘나이스 샷’을 외치는 중국인들의 모습을 담은 동영상이 전파를 탄 적도 있었다. 우물에 빠지려는 아기를 구하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외쳤던 중국인 맹자의 말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이러한 부정적인 중국인들의 폐습을 개조하기 위해 노신이 쓴 첫 번째 소설이 <아큐정전(阿Q正傳)>이다. ‘Q’는 변발한 중국인의 모습을 상징하고 ‘아(阿)’는 이름을 친근하게 부를 때 쓰는 용례로 우리가 홍길동을 ‘동아’라고 부르는 것과 유사하다. ‘아큐(阿Q)’는 혼란과 무기력에 빠져있는 부정적인 중국인의 상징이자 신해혁명 뒤에도 여전히 봉건적이고 미몽에 허덕이는 중국을 표상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지금의 중국문명은 이를 극복했는가? 민주화를 거치지 않은 경제성장과 정보화, 그리고 4차 산업혁명의 성과물은 중국 인민을 감시하고 억압하여 인권의 사각지대를 만드는 방면에 활용되고 있다. 최근 무력으로 홍콩인들을 강력하게 제압하는 장면에서 거대국가의 목표만 발견될 뿐 인의(仁義)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왕가위(王家衛) 감독이 제작한 1990년의 영화 ‘아비정전(阿飛正傳)’에는 배우 장국영이 ‘아비(阿飛)’라는 인물로 등장한다. 이 인물은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방황하는 홍콩 젊은이의 상징이었다. 이미 서양문화에 익숙해져 버렸는데 머지않아 다시 중국대륙으로 반환된다고 하니 당시 홍콩 청년들의 정체성은 극도로 흔들렸을 것이다. 그들의 이러한 복잡한 심리가 ‘날다(飛)’라는 이름으로 승화된 것이다. 

그렇다면 30년 전의 홍콩과 지금의 홍콩은 과연 얼마나 변한 것이 있는가? 홍콩의 젊은이들은 아직도 힘겨워하고 있고, 위정자들은 그들에게 여전히 완전한 자유와 평화로운 삶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중국은 과연 노신이 말한 아큐(阿Q)의 ‘중국병’을 치유하고서 ‘중국몽(中國夢)’을 말하고 있는지, 왕가위가 제시한 홍콩청년 ‘아비(阿飛)’의 정체성을 해결하고서 ‘일대일로(一帶一路)’를 구상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세계1위라는 원대한 꿈에 부풀어 사람들의 마음은 어루만지지 못하고 영향력의 확장에만 전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 볼 일이다. 맹자의 말처럼 늘 통일과 분열이 반복된 ‘일치일난(一治一亂)’의 나라 중국, 항상 위대함과 위태로움이 교차해 온 나라 중국, 우리는 그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까.
 

중국 과학출판사가 출간한 ‘동북고대민족 역사편년총서’. 왼쪽부터 부여, 고구려, 백제, 발해, 거란. 편년총서로 백제사도 중국사에 포함시키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중국 과학출판사가 출간한 ‘동북고대민족 역사편년총서’. 왼쪽부터 부여, 고구려, 백제, 발해, 거란. 편년총서로 백제사도 중국사에 포함시키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끝나지 않은 동북공정과 역사왜곡

중국은 지금 중국-중앙아시아-유럽을 육상과 해상으로 연결하는 ‘실크로드 경제벨트’인 ‘일대일로(一帶一路, One Belt One Road)’라는 국가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여러 국가들의 경제적 실리가 확보된다는 구상이지만 실은 중국이 미국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고 G2에서 원톱이 되고자 하는 야심을 담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한쪽에서는 무력적인 영토 확장이, 한쪽에서는 경제적인 영향력 확대의 전략이 동시에 가동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 한국은 중국과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동반자 관계를 형성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하지만 <역학(易學)>에 능했던 탄허스님은 항상 중국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말 것을 강조했다. 역학적으로 진방(震方)에 위치한 중국은 간방(艮方)에 위치한 우리 한국에 대해 항상 나이 많은 장남(長男)이 막내인 소남(少男)을 다루듯이 갑질과 꼰대짓을 하려 든다는 것이다. 

중국에 대한 경계의 필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중국의 역사왜곡이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추진하며 한반도의 역사를 왜곡하고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노력을 지속해 왔는데, 그 정도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러서 고구려와 발해에 이어 백제사(百濟史)마저도 자신의 역사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2017년에 중국 과학출판사가 펴낸 <동북고대민족 역사편년총서>에는 신라를 제외하고는 우리의 모든 역사가 중국사로 편입되어 있다. 우리는 이러한 중국의 집요한 동북공정에 대해서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새겨 보아야 한다. 

중국은 통일제국이 형성되었을 때마다 한반도에 대한 야욕을 멈춘 적이 없었다. 수(隋)나라와 당(唐)나라가 그러했고, 원(元)나라와 청(淸)나라가 그러했다. 우리 한반도에서 벌어진 가장 최근의 전쟁인 6·25 한국전쟁에도 중공군이 뛰어들어 우리의 산하대지를 짓밟았다. 중국은 통일제국이 되어 강력한 힘을 가진 공룡이 될 때마다 한반도로 덤벼들곤 했다. 

따라서 우리는 중국과 거리를 두고 늘 실리외교를 추구하며 면밀하게 그들의 욕망을 들여다보고 있어야 한다. 유사 이래 중국과의 외교담판에서는 기세가 꺾이는 순간 그 게임은 끝이 나고 위험천만한 사태가 벌어지곤 했다. 한국에는 옹골찬 차돌맹이 같은 사람들이 응집되어 있어서 무시할 수 없는 나라라는 인식을 심어주어야 하며 그런 대차고 강인한 인상을 늘 남겨주어야 한다. 중국을 대할 때면 과도한 의존과 지나친 배타가 아닌 균형 잡힌 실리와 굴욕적이지 않은 호연지기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위정자와 외교관은 중국사와 동양학을 바탕으로 중국인의 심리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무리 친한(親韓)관계가 조성되었다 하더라도 중국의 야욕에 대한 경계를 놓아서는 안 되며, 친일(親日)만큼 친중(親中)도 위험하다는 사실을 망각해선 안 된다. 
 

중국의 천안문. 사진=crowdpic
중국의 천안문. 사진=crowdpic

➲ 광화문과 천안문의 차이 

중국을 대표하는 자금성 앞의 천안문과 한국을 대표하는 경복궁 앞의 광화문은 하나의 큰 차이가 있다. 천안문은 1989년의 천안문 사태가 보여주듯이 민주화되지 못한 공산당 일당독재의 상징이지만, 광화문은 지혜로운 집단지성인 한국 국민들의 자유·민주와 평화의 상징이다. 천안문 광장에서 묵살된 민주화의 요청은 지금도 탄압받고 있으나, 광화문 광장은 여전히 자유로운 시민들의 정의로운 외침의 공간으로 이어지고 있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우리 국민들은 절대 광화문을 천안문과 바꾸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만 보아도 “중국은 대국이고 한국은 작은 나라”가 아니라는 것은 증명되고 있지 않은가.

[불교신문3591호/2020년6월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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