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에 불교의 무아와 무상이 있다?

아카데미상 4관왕 ‘기생충’은
주연과 조연 구분 모호하면서
선악의 이분법도 보이지 않고

악당이 없는 비극, 광대 없는
희극이 오묘하게 ‘조화’ 이뤄

영원한 선악이 없다는 ‘무아’
영원한 행복이 없다는 ‘무상’
법인(法印)도 잘 실현돼 있어

동양미학 결론…‘중화’ 묘미
‘중도’ 미학 디테일하게 구현
삑사리 예술ㆍ선정의 길 닮아

봉준호 감독은 1954년 월트디즈니 이래 두 번째로 오스카 4관왕을 달성했다. 2월9일(현지시간)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감독·각본·국제영화상 등 4관왕을 차지한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미국 LA 더 런던 웨스트 할리우드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트로피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봉준호 감독은 1954년 월트디즈니 이래 두 번째로 오스카 4관왕을 달성했다. 2월9일(현지시간)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감독·각본·국제영화상 등 4관왕을 차지한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미국 LA 더 런던 웨스트 할리우드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트로피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영화, 어찌 이런 일이?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미국의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각본상, 국제영화상, 감독상에 이어 최고의 영예인 작품상을 수상하며 4관왕의 위업을 달성했다. 백인·남성 위주의 보수적인 할리우드에서 비영어권 언어로 최고상인 작품상을 수상한 것은 92년 아카데미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프랑스의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과 미국의 아카데미 작품상을 동시에 거머쥔 것은 64년 만의 일로 전 세계의 언론은 한국영화가 세계를 장악했다고 대서특필했다. 유럽과 미국의 상징인 칸과 오스카를 동시에 석권한 것은 작품성·예술성과 흥행성·대중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것으로 케이무비(K-movie)의 수준을 세계에 보여준 쾌거이다. 이는 101년 만에 새롭게 쓴 한국영화사가 그대로 세계영화사가 된 기념비적인 사건이라 하겠다.

현재 ‘기생충’은 60여 개의 해외영화제에서 170여 개의 트로피를 들어 올려 세계의 영화판을 마치 ‘도장 깨기’ 하듯 정복해 가고 있다. 지구촌 곳곳에서는 세계의 평단을 지배한 한국영화를 다시 찾아보려는 역주행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수많은 외국인들이 자막을 읽어가며 2시간 넘게 한국어로 된 영화를 보면서 웃었다가 마음 졸였다가 하는 진풍경은 상상만으로도 쾌감을 느끼게 해준다. 그렇다면 이 한국영화는 어떻게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서게 된 것일까?

한국의 특수가 곧 세계의 보편

봉준호 감독은 인터뷰에서 “가장 한국적인 것에 전 세계가 매료된 것 같다”며 “한국적 디테일과 한국적 뉘앙스를 그렸을 뿐인데 전 세계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주제가 되었다”고 했다. 이는 한국의 독자성과 특수성이 곧 세계의 보편적 코드임을 의미한다. 

‘기생충’에는 한국에 존재하는 ‘반지하’라는 독특한 공간이 등장한다. 대저택과 반지하는 인류가 공통으로 직면한 화두인 불평등과 양극화라는 현대사회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미쟝센이다. 영화 속에 끊임없이 반복되어 등장하는 ‘계단’은 계층이동이 불가능해지고 있는 극단적인 빈부격차의 메타포이며, 지하-반지하-지상-2층을 수직적으로 반복하며 이동하는 것은 현대인의 욕망과 심리적 불안·공포를 중의적으로 상징한다.

세계 각국의 영화평론가들은 ‘기생충’의 시나리오를 전혀 수정하지 않고 자국의 수도에서 촬영하기만 하면 바로 자기 나라의 현실이 된다면서 봉준호의 한국적 리얼리즘에 감탄하고 있다. 

탄허스님은 지구에 동극과 서극은 없고 남극과 북극만 있기 때문에 동양과 서양, 좌파와 우파의 갈등은 결국 해결될 것이지만,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과제상황은 상·하의 문제인 빈부격차라고 법문한 바 있다. 세계의 단전(丹田) 가운데 하나인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는 이미 세계적 보편성을 띠고 있고, 한국인의 예술혼은 만국의 보편적 소재를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최고 수준의 내러티브로 연출해 내는 경지에 도달했다. 

그럼에도 그의 수상을 두고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의 언론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비현실적인 일이 벌어졌다”며 놀라워하고 있다. 오스카상 수상 직후 기자회견에서 봉 감독은 “상을 받은 것은 팩트이나 그것이 왜인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시간을 갖고 짚어보아야 한다”며 “오히려 제가 그 이유를 기자분들께 질문해야 될 상황”이라 했다.

앞으로 다양한 분석이 있겠지만 그의 영화에는 이 에세이의 주제인 한국문화의 ‘단전성(丹田性)’의 특징들이 나타나고 있다. 
 

스토리보드와 영화의 한 장면. ‘봉테일’이라는 그의 별명에 걸맞게 정교함을 보여준다.
스토리보드와 영화의 한 장면. ‘봉테일’이라는 그의 별명에 걸맞게 정교함을 보여준다.

‘봉준호 장르’ 단전성 문화 특징

봉준호 감독의 별명은 살아있는 디테일 때문에 ‘봉테일’이다. 감독 스스로는 자신의 작품을 ‘집요한 리얼리즘’이라 표현한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편집본이 갖추어 있다고 할 정도로 완벽한 장면들을 갖고서 정교한 촬영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기생충’을 보면 주연과 조연의 구분이 모호하고, 선악의 절대적인 이분법도 보이지 않는다. 악당이 없는 비극과 광대가 없는 희극이 오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영원한 선악이 없다는 무아(無我)의 진리와 영원한 행복이 없다는 무상(無常)의 법인(法印)이 잘 실현되어 있다. 동양미학의 결론이라 할 수 있는 중화(中和)의 묘미와 중도(中道)의 미학이 디테일하게 구현되어 있는 것이다. 

봉준호 영화는 20~30분마다 장르가 변화하는 특색이 있다. 재미있는 코미디인가 하면 소름끼치는 스릴러가 되고, 멜로영화가 되었다가 갑자기 액션영화가 된다. 그의 영화들은 규정된 장르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 이러한 장르의 모호성은 거친 이분법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복잡한 현실의 사실적 연출에 기인한다. 

봉 감독은 “인간이 원래 희로애락이 다 있으니까 이를 한 영화 속에 자연스럽게 섞은 건데 해외의 기자들이 이를 희한하게 보고 ‘봉준호 장르’라는 호칭을 부쳐주었다”고 했다. ‘봉준호 장르’는 희비극이 교차하는 고락상반(苦樂相半)의 인생사를 다채롭게 표현해 온 한국형 장르들을 닮아 있다. 

한국의 이야기꾼들은 순도 백 프로(100%)의 행복과 불행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영원한 고(苦)와 낙(樂)도 없는 것이 바로 우리네 인생의 리얼한 현실이라 역설해왔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복잡한 감정들에 대한 한국적 서사는 <춘향전>·<심청전>과 같은 판소리에서처럼 눈물 콧물 다 빼고 난 뒤 다시 웃겨버리고, 고통의 극한에서 환희의 절정을 던져주는 방식을 선택하곤 했다.

이러한 다양한 감정선의 섬세한 묘사는 한국드라마(K-drama)들이 세계시장을 섭렵하게 만든 한국판 스토리텔링의 마력이자 한류(韓流)의 한 성공원인이었다.

인간의 감정들은 낱개로 떨어져 있을 수 없으며 서로 연기(緣起)의 형태로 이어져 있다. 이 감정들은 ‘단전’을 중심으로 응집되어 있다가 다시 다이내믹하게 터져 나오게 된다. 한 영화에서 희로애락을 모두 표현하여 “봉준호 자체가 장르”라는 평을 받은 것은 하나의 장르에만 치우지지 않는 ‘단전성(丹田性)’의 특징과 연관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초코파이 情, ‘삑사리’ 생력(省力)

초코파이 박스 위에 찍혀있는 ‘정(情)’이라는 한 글자는 한국인의 영원한 화두이자 상징이다.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의 한국인에 대한 첫인상은 친절하고 다정다감하다는 것이다. 정이 많고 우호적인 한국인의 특징은 희노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慾)이라는 칠정(七情)의 복합성과 관련되어 있다. 

한국의 불교와 유교의 주된 관심은 ‘심학(心學)’으로 ‘성정(性情)’에 대한 담론이 주를 이루었다. 인간의 번뇌와 욕망을 어떻게 컨트롤할 것인가와 다양한 감정을 어떻게 조절한 것인가의 문제였다.

조선의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과 호락논쟁(湖洛論爭), 그리고 현대에까지 이어진 불교의 돈점논쟁(頓漸論爭)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인간본성과 깨달음에 대한 철저한 고찰이자 처절한 탐색이었다. 한국인의 인간심리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인간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탐구는 봉준호라는 천재의 집요한 리얼리즘과 탄탄한 각본을 만나 새롭게 영화미학으로 꽃을 피우게 되었다.

장르파괴자 혹은 장르창조자로서의 봉준호는 작품 속에 코미디(喜), 액션(怒), 비극(哀), 스릴러(懼), 멜로(愛), 호러(惡), 판타지(慾)의 칠정(七情)을 총망라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이는 하나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총체적 마음’에 대한 통찰인 한국적 심학(心學)에 대한 감독의 무의식적인 오마주는 아니었을까.

특히 봉준호의 영화가 재미있는 것은 엄숙하고 딱딱한 전개방식이 아닌 풍자와 블랙코미디의 적절한 배치에 힘입은 바 크다. 어두운 현실에 대한 통렬한 비판도 익살스런 골계와 유쾌한 해학으로 인해 진지일변도로 흐르지 않게 된다. 소위 프랑스 평론가가 붙여준 ‘삑사리(Piksari)의 예술’이 바로 그것인데 이는 달리 말해 힘이 빠져 있는 ‘생력(省力)’의 유머라 할 수 있다.

선학(禪學)에 의하면 착력(着力)된 관념을 여의고 힘이 완전히 빠져 있을 때 단전에 기운이 원활히 모이고 깊은 선정에 도달한다고 한다. 삑사리를 통한 웃음은 단전(丹田)의 힘빠짐과 묘하게 닮아 있다. “힘이 빠졌을 때 도리어 힘을 얻게 된다”는 참선의 원리처럼 관객들은 웃음을 통해 집중의 동력을 얻어 화면 속으로 더욱 빨려들게 된다.

이렇듯 봉준호의 블랙유머는 힘빠짐의 ‘생력(省力)’과 집중의 ‘득력(得力)’이라는 단전성(丹田性)의 특징까지 함유하고 있었다. 

[불교신문3561호/2020년2월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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