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헌신 나눔의집, 누가 비난할 자격 있나”
“30년 헌신 나눔의집, 누가 비난할 자격 있나”
  • 이경민 기자
  • 승인 2020.05.29 10:49
  • 호수 358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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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피해자 故김순덕 할머니 아들의 증언
故 김순덕 할머니의 작품, '끌려가는 날'.
나눔의집에서 생활하다 별세하신 故 김순덕 할머니의 작품, '끌려가는 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故) 김순덕 할머니는 ‘나눔의집’이 마포 서교동에 처음 문을 연 때인 1992년 입소한 초창기 멤버다.

흩어져 살고 있던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위해 월주스님 등이 참여하는 ‘나눔의집 건립추진위원회’가 정부 지원 하나 없이 피해 할머니들의 터전을 마련하고 이후 명륜동, 혜화동을 거쳐 1995년에서야 지금의 경기 광주 퇴촌면에 자리를 잡기까지, 모든 과정을 옆에서 지켜봤다.

생활관 하나로 시작한 나눔의집이 규모를 키우고 2004년 비로소 노인양로시설로 인가를 받아 정부로부터 처음 운영비 지원을 받기 시작한 때, 할머니는 그보다 앞서 반년 일찍 세상을 등졌다. 

김순덕 할머니를 가장 가까이서 모셨던 아들 A씨는 “내가 두 눈으로 직접 나눔의집 역사를 지켜본 산증인”이라며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의 일은 잘 모르지만 할머니들에게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하나 해주지 않았다는 말은 믿을 수도 없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고 말했다.

A씨는 “지금이야 사람들이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관심도 크고 정부 지원도 많지만 그때만 해도 재정적으로 굉장히 어렵게 시작했다”며 “스님들과 개인 후원자를 비롯해 좋은 사람들이 합심해 겨우 마련한 쉼터였다”고 했다.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에게도 위안부 피해 사실을 말하지 못했던 김순덕 할머니는 뒤늦게 아들에게 과거를 이야기할 수 있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위한 생활시설, ‘나눔의집’ 존재 이유가 컸다. 김 할머니는 나눔의집에 들어오고 나서 새 삶을 찾았다고 했다.

그림을 배우며 묻어뒀던 아픔을 조금씩 덜었다. 용기를 내 숨겨뒀던 이야기도 밖으로 꺼냈다. 전시를 열고 수없이 증언을 하며 과거 상처를 조금씩 지웠다. 김순덕 할머니는 살아 생전 말했다. “당시 받은 고통과 설움이 억만금을 준들 보상이 되겠냐”고. 

아들 A씨는 “어머니에게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가장 큰 위로가 돼 준 건 나눔의집”이라며 “우리 어머니와 피해 할머니들이 월주스님을 ‘큰스님’이라 부르며 잘 따랐다”고 했다.

그는 “설립 초창기, 그 어려운 시절에도 할머니들이 한복을 입고 싶다고 해서 월주스님이 기꺼이 한복을 사 준 기억이 난다”며 “가난하고 힘들어도 스님이 할머니 용돈 뿐 아니라 가족들 차비까지 챙겨줘 가며 애 많이 쓰셨던 것이 지금도 참 고맙다”고 했다.

A씨는 “나와 다른 할머니 가족들은 나눔의집에 대해 딱 한 가지, 좋은 인상만 가지고 있다”며 “언젠가 월주스님을 찾아 뵙고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덧붙였다. 

아들 A씨는 마지막으로 꼭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다. “어느 누구 하나 위안부 피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았고 금전적으로도 도와주지도 않았을 때 가장 먼저 나서준 게 나눔의집이다. 그 세월이 무려 30년이다. 지난 2~3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솔직히 잘 모른다. 우리 어머니도 늘 좋지만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24시간 생활하며 충돌도 있었다. 다만 이것만큼은 말하고 싶다. 어느 누가 지금에 와서야 나눔의집을 비난할 자격이 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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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불자 2020-05-29 19:02:10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