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상담의 세계 ‘어엿한 그대’] ② 차가운 그대에게 “자판기 뒤에 사람 있어요”
[불교상담의 세계 ‘어엿한 그대’] ② 차가운 그대에게 “자판기 뒤에 사람 있어요”
  • 임인구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상담학 초빙교수
  • 승인 2020.05.21 11:12
  • 호수 358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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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상담은 사람들의 일상생활 이야기다. 임인구의 새 연재물 ‘어엿한 그대’는 사람들이 일상에서 체험하는 마음이, 또 그 마음을 체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온전한지를 묘사함으로써, 우리가 이미 어엿하게 서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연기법에 근간하여 역설과 상호관계성의 원리로 안내한다. 마음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그리고 마음 자체를 친구처럼 또는 연인처럼 대하는 직접화법으로 구성된다.

임인구
임인구

그대가 전할 수 있는 것은 그대의 말이나 행위가 아니다. 그대가 전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그대의 상태뿐이다. 그대는 그대가 아닌 것은 결코 줄 수 없다. 그대는 오직 그대인 것만 줄 수 있다. 그대 자신만을 줄 수 있다.

내가 그대에게 받은 것은 차가움이다. 나는 그대가 차갑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안다. 자신이 받아야 할 마땅한 것을 받지 못한 것처럼 이글거리던 그대 눈빛의 격렬함이, 바로 그대 가슴의 이 차가움에서 비롯했다는 것을.

사람들은 그대로부터 약탈해가기만 하는 듯 싶었다. 그대는 사람들로부터 이용당하기만 하는 듯 싶었다. 사람들은 그대의 호의를 무시하며 적의로 대답했다. 정당한 그대의 권리를 짓밟았다. 그대가 받아야 할 것을 결코 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대는 화가 났다.

그것은 정당한 화였다.

그것은 정당한 자판기의 화였다. 

그대는 자판기였다.

사람들은 그대에게 동전을 넣지 않고, 그대를 발로 차 콜라캔을 약탈해갔다. 공정거래법을 위반했다. 공정거래법에 대한 신뢰의 상징인 무인자판기를 무시했다. 바로 그대를 무시했다.

나는 영원한 자판기의 편이다. 나는 자판기의 정당한 분노를 이해한다. 신뢰는 지켜져야 한다. 콜라캔을 내준 댓가로 자판기는 반드시 동전을 받아야만 한다. 그것은 자판기의 신성한 권리다.

그러나 나는 묻는다.

그대여, 그대는 왜 자판기인가?

그대는 왜 그대가 자판기라는 사실에 동의하는가?

그대는 왜 스스로가 자판기인 것처럼 행위하고, 또 그에 따라 분노하는가?

나는 이제 그대가 왜 차가운지를 안다.

그대가 자판기이기 때문이다. 그대의 몸은 딱딱하고, 

단단하며, 견고하다. 피가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차갑다.
 

삽화=손정은
삽화=손정은

그대의 몸은 단지 자판기라는 역할과, 그 역할에 따라 수행해야 할 기능으로서만 존재한다. 그대는 단지 기능이다. 그대는 단지 기능적인 무인자판기다. 무인자판기라 거기에는 사람이 없다. 그대는 사람을 잃었다. 사람을 잃고, 단지 기능으로만 남은 것을 우리는 도구라고 부른다. 사람이 사람을 잃고, 사람이 아닌 도구가 된 이 비극의 사건에 우리는 소외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리고 나는 이제 다시 안다. 그대가 차가운 이유는, 바로 그대가 소외되었기 때문이다. 차갑게 소외되었기 때문이다. 차갑게 소외된 도구였던 그대가 이토록 차갑다. 이토록 춥다. 세상이 너무 춥고, 사람들이 너무 차갑다.

그대는 사람들을 잃었고, 사람들의 세상을 잃었다. 곧, 사람을 잃었다. 그대가 사람을 잃게 된 이유는, 사람을 기대했던 까닭이다. 여기에 사람 없고, 거기에 사람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까닭이다. 그래서 그대는 그대라는 사람을 잃었다. 그대를 잃은 그대는 사람에서 도구로 추락했다. 사람에서 도구로 축소되었다. 소외는 바로 축소다. 그대는 원래의 그대의 크기를 잃고, 아주 작은 크기로 축소된 것이다.

그대여, 그래서 그대는 다시 이해해야 한다. 그대가 화가 나는 이유는, 자판기로서 정당한 댓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아무리 큰 댓가를 받을지라도 미묘하게 남아 있는 그대의 짜증은, 여전히 무언가를 받지 못한 것만 같은 불만족은 해소되지 않는다. 화는 가시지 않는다.

그 화는 바로 그대가 작은 크기로 축소되어 있기에 경험하는 답답함이다. 사람이 아닌 도구로, 전체가 아닌 기능으로 축소되어 있기에 생겨나는 갑갑함이다. 자신을 로봇 앵무새라고 생각하는, 새장 속의 알바트로스가 느끼는 부자유다. 

때문에 아무리 그대가 자판기의 권익을 위해 투쟁할지라도, 충혈된 눈으로 자판기의 분노를 표명할지라도, 잘 다듬어진 목소리로 자판기의 서러움을 노래할지라도, 그대는 결코 회복되지 않는다. 그대가 그대를 자판기라고 믿고 있는 한, 그대가 자판기이기를 그만두지 않는 한, 그대는 결코 회복되지 않는다. 회복은 특정 부분을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다. 특정 부분을 회복시키려고 하는 한, 이미 부분으로 소외된 한 상태만을 다루게 될 뿐이다.

소외가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소외가 극복되는 것이 바로 회복이다. 회복은 언제나 전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모든 회복은 분절되어 소외된 것이 전체에 안기는 것이다. 전체로 회복되는 것이다. 때문에 그대의 회복은 오직 그대 자신의 전체의 크기를 회복함으로써만이 가능하다. 

따라서 그대여, 나는 이제 그대가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말한다.

그대가 분노하고, 절규하며, 서러워할 때, 그렇게 그대가 소외된 자판기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대는 분명 자판기를 보고 있었다. 그대는 분명 알고 있었다.

그대는 자판기 뒤에 있던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차가운 자판기를 위해 울고 있었다. 추운 겨울의 공터에 홀로 버려진 고장난 자판기 위에 손을 얹고 체온을 전하고 있었다. 온 몸으로 자판기를 끌어안고, 울고, 또 울었다. 고요하게 눈이 쌓여갔다.

그것이 그대의 크기다.

그대의 크기는 언제나 사람이다. 

자신을 자판기로 알고 있던 그대여, 그대는 사람이다.

그대가 찾아 헤매던 바로 그 사람이다.

가장 추운 겨울날에도 그 따듯함이 결코 잃어질 수 없음을 스스로의 눈물로 증거하는 바로 그 사람이다. 가장 소외된 차가움을 온화한 눈물로 완전하게 녹이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 가장 아픈 상처를 하얗게 감싸주기 위해 살포시 하늘에서 내려온, 가장 상냥한 바로 그 사람이다.

그대는 언제나 사람으로 다시 깨어난다.

그대는 언제나 사람이다.

모든 소외 뒤에 언제나 그대가 있다. 그리고 그대가 있어서, 소외가 없다. 그렇게 그대는 언제나 그대 자신만을 전부 줄 따름이다. 그대가 전부이기에 소외가 없다. 단지 그대뿐이다. 보고 또 보고픈 그대뿐이다. 가득한 그대의 이름, 사람이다.

[불교신문3583호/2020년5월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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