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을 위해 오신 분이 태어나셨구나, 나무…”

삽화=견동한
삽화=견동한

500년, 서라벌 월성

벽화는 초조한 얼굴로 지대로의 즉위식을 지켜보았다. 지대로는 서라벌에서 보기 드문 8척에 가까운 거구였으나 이미 환갑이 넘은 나이라 피곤해 보였다. 지대로의 아내인 연제부인 역시 7척 거구로 부부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마치 금강역사 같았다. 여자다운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연제부인은 역대 마립간의 부인 중 가장 박색이었다. 큰 체격과 못생긴 얼굴은 임신한 여인을 그토록 탐했던 비처마립간이 연제부인을 품지 않은 이유였다. 지대로와 연제부인 뒤로 태자 원종과 그의 동생 입종이 나란히 서 있었다. 원종은 지대로와 연제부인의 장점만을 닮아 훤칠한 체격과 영민한 두뇌를 자랑했으나 입종은 체구를 제외하면 부부의 단점만 닮아 졸린 듯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대로의 장남이자 비처마립간의 사위인 원종은 누가 보아도 눈이 부시게 당당한 태자였다. 벽화는 늠름하게 빛나는 태자 원종 옆에 서 있는 보도공주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비처마립간과 선혜부인의 딸인 보도공주는 원종의 아내였다. 비처마립간의 후비였던 자신은 결코 원종의 아내가 될 수 없으리라 생각하니 가슴이 쓰라렸다. 벽화의 눈썹이 질투로 일그러진 그때, 귀족들을 향해 돌아선 지대로가 원종에게 눈짓을 보냈다. 원종은 손에 들고 있던 교지를 펼쳐 큰 소리로 읽었다.

“오늘 당장 하늘의 부름을 받아도 아쉬울 것이 없는 나이에 마립간의 자리에 앉게 된 것은 오직 비처마립간의 뜻을 받들기 위함이다. 하여, 명하노니 앞으로는 왕족과 귀족은 물론 모든 장례에서 순장을 금지한다. 나는 나의 무덤에 삶을 아쉬워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가 함께 눕기를 원치 않는다. 이를 어기거나 반발하는 자가 있다면 지금 당장 비처마립간의 무덤에 함께 순장시킬 것이다. 반대하는 자가 있다면 말하라.”

원종의 말이 끝나자 귀족들이 술렁거렸다. 당시 왕족의 장례에는 최소한 남자와 여자를 각각 다섯 명씩 순장했고, 귀족의 장례에는 적어도 세 명씩 순장했다. 처음에는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던 순장은 어느 순간 신분의 위상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바뀐 지 오래였다. 왕실의 경우, 순장되는 사람이 많을수록 성군이라 불리었고 귀족들은 순장을 통해 왕실 못지않은 위세를 뽐낼 수 있었다. 순장이 악습으로 변질된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으나 이는 곧 신분제 사회에서 지배층의 위상과 직결되는 풍습이었기에 왕실과 귀족들은 금지할 생각이 없었다. 애당초 이들은 순장 대상이 아니었기에 희생되는 백성들의 고통을 알 리가 없었다. 그런데 지대로가 마립간에 오르자마자 태자를 통해 순장 금지를 명한 것이다. 이는 장차 지대로의 통치가 태자를 통해 이루어지게 될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귀족의 반발이 있더라도 개혁을 강행할 것임을 말했다. 술렁대던 귀족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와 입을 열었다. 

“화백회의도 아닌 즉위식에서 법령을 바꾸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옵니다.”

원종은 예상했다는 듯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띤 채 그에게 되물었다.

“마립간께서 즉위하신 후 처음 내린 명이신데, 그대는 반대하는 것인가? 이는 그대의 의견인가 아니면 지금 그대와 귓속말을 나누었던 귀족들 모두의 의견인가?”

원종의 목소리와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웠으나 귀족들은 순간 몸에 한기가 돌았다.

“내 분명히 반발하는 자는 지금 당장 비처마립간의 무덤에 함께 순장시키겠다, 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곧바로 반대하는 소리를 들으니 정신이 번쩍 나는군. 월성에 비처마립간의 충신들이 이토록 많았던가. 마복칠성은 들라!”

원종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시와 영실, 이사부, 수지, 비량, 융취, 이등이 그들을 따르는 젊은 낭도들을 거느리고 대전으로 들어왔다. 쟁쟁한 귀족 가문의 자제이자 비처마립간의 마복자였던 이들의 눈빛은 결연했고 행동은 과감하고 거침이 없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긴 소매가 달린 비단옷을 입고 잘 관리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거들먹거리는 귀족들을 힘으로 제압할 기세였다. 비처마립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마복칠성은 원종의 수하가 되면서 왕실을 지탱하는 커다란 세력으로 성장한 것이다. 순식간에 귀족들을 제압한 원종을 보며 벽화는 흐뭇한 미소와 함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월성에 기댈 곳이라고는 비처마립간밖에 없던 그녀는 순장 대상이었다. 다행히 비처마립간이 세상을 떠나기 전, 원종과 깊은 사이가 되었기에 귀족들의 술수에서 자유롭게 될 수 있었다. 

열반을 위해 태어난 아이

벽화는 출산일이 다가오자 고향 날이군으로 향했다. 마복칠성 중 한 명인 비량공이 벽화의 호위를 맡았다. 만삭의 몸을 한 벽화의 얼굴은 수심으로 가득했는지 그녀를 바라보는 비량공의 얼굴은 종종 붉어졌다. 흔들리는 가마 안에서 어지러움을 느끼면서도 벽화는 수시로 잠이 들었다 깨기를 반복했다. 잠이 들 때마다 벽화는 같은 꿈을 꾸었다. 천지가 진동하고 온갖 동물들이 뛰노는 가운데 하늘에서 꽃비가 쏟아지는 꿈이었다. 벽화는 이것이 좋은 꿈인지 나쁜 꿈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날이군으로 향하는 길에 벽화는 가마를 막고 시주를 청하는 스님을 세 번이나 만났다. 벽화는 그때마다 금목걸이와 금팔찌, 금귀걸이를 차례대로 시주했다. 그녀는 알뜰하게 챙겨온 금붙이를 스스럼없이 시주하는 자신에게 스스로 놀랐다. 시주를 받은 스님들은 벽화에게 합장을 하며 고개를 숙였고 배 속의 아이에게 축원하며 말했다. 

“이제 신국에도 부처님의 가르침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울 날이 올 것입니다. 시주님의 아드님께서는 불국토의 씨앗이 되실 분입니다. 참으로 귀한 분을 품으셨습니다.” 

스님들에게 신비롭고 영험한 능력이 있다는 것은 벽화도 잘 알고 있었다. 선혜부인을 유혹한 죄로 묘심스님이 처형된 후 다들 쉬쉬하고는 있었으나 왕실 아녀자들은 대부분 불교를 믿었다. 월성에서도 왕실 여인들이 은밀히 스님을 청하여 기도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벽화는 좋아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배 속의 아들이 귀한 자식인 것은 확실했으나 비처마립간이 살아있을 때의 일이었다. 골품이 없는 벽화는 원종의 총애가 있어야만 월성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런 벽화에게 비처마립간의 혈육인 배 속의 아이는 짐이나 다름없었다. 누구보다 귀한 혈통이지만 아버지가 없는 이상, 태어난 순간부터 천하게 자랄 수밖에 없는 박복한 운명을 가진 아이였다.

“아가야, 스님들께서 네가 아들이라고 하시는구나. 딸이었다면 어미와 함께 월성으로 갈 수도 있고, 태자의 총애를 받는 잉첩이 될 수도 있으련만 아들이라니, 어미는 널 감당할 수가 없구나.”

벽화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배를 쓰다듬었다. 이윽고 날이군에 도착한 벽화가 친정에 들어서자 어머니 벽아와 아버지 섬신이 어두운 얼굴로 그녀를 맞아주었다. 벽화가 비량공에게 고갯짓을 하자 비량이 비단과 곡식이 가득 담긴 상자들을 내려놓았다.

“마립간의 아이냐? 아니면 태자의 아이냐?”

섬신의 어리석은 질문에 벽화는 웃음이 나왔다.

“태자의 아이라면 제가 뭐 하러 이 먼 날이까지 몸을 풀러 왔겠습니까?”

섬신과 벽아가 어두운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얼굴에 검버섯이 피어오른 늙은 마립간에게 이 딸을 바칠 때, 이런 날이 올 것까지는 생각하지 않으신 겁니까? 마립간에게 저를 바친 것은 아버지이지만 태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오로지 저의 의지였습니다. 몸을 풀고 나면 저는 월성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니 마립간의 핏줄은 아버지께서 책임을 지셔야겠습니다.”

열다섯 벽화의 얼굴은 마치 온갖 풍파를 다 겪은 쉰 살 할머니가 들어앉은 것처럼 보였다. 벽화는 흙빛으로 변한 섬신의 얼굴을 보면서 차갑게 말했다. 

“아, 오는 길에 우연히 세 분의 스님을 만났습니다. 세 분 다 이 아이가 아들이라 하더군요. 스님들의 말씀이 맞다면 아마도 이 아이는 마립간의 유일한 아들이겠지요. 그러니 지금의 마립간과 태자에게 얼마나 눈엣가시이겠습니까. 허니 아버지께서는 마음을 단단히 하셔야 할 것입니다. 아이가 아들이라면 저는 아버지처럼 제 자식을 팔아치울 수가 없을 테니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르겠군요. 안 그렇습니까?”

말을 마친 벽화는 비량공의 부축을 받으며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방안에 들어선 벽화는 긴장이 풀린 듯 주저앉았다. 비량은 무너지듯 쓰러지는 벽화를 부축했다. 벽화는 눈물이 가득한 얼굴로 비량의 팔을 잡으며 속삭였다.

“독하게 말했으니 아이를 낳을 때까지 쓸데없는 짓은 안할 것입니다. 그러니 제 걱정은 마십시오. 비량공께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벽화는 비량의 귀에 입을 바짝 대고 한참을 속삭였다. 아흐레 후인 음력 2월15일, 늦은 밤 진통을 시작한 벽화는 새벽별이 떠오를 무렵 아들을 낳았다. 벽화와 비처의 아들이 첫울음을 터트린 순간, 일선군에 있던 비구니 사씨와 아도화상의 제자 무심스님은 삼매 속에서 한 청년을 보았다. 목에서 하얀 피를 흘리던 청년은 점차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변했고, 청년의 목에서 흘러나온 하얀 피는 천천히 신라 전체를 적셨다. 삼매에서 깨어난 비구니 사씨는 벽화가 있는 날이군을 향해 합장하며 중얼거렸다.

“열반을 위해 오신 분이 태어나셨구나. 나무아미타불.”

[불교신문3574호/2020년4월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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