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옥진, 전하께 인사를 올립니다”

삽화=견동한
삽화=견동한

버려진 아들

비량이 불을 넉넉하게 땐 덕분에 방안은 따뜻했다. 두꺼운 이불을 덮고 누운 벽화의 얼굴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진통하면서 흘린 땀과 방안의 뜨거운 열기 때문이었다. 출산하는 내내 벽화의 곁을 지킨 비량은 이불로 단단히 싸맨 아이를 품에 안고 얼렀다. 연모하는 여인을 자신의 손으로 보살필 수 있다는 것도 행복이었다. 

“한 번 보십시오. 아기가 부인을 닮아 참으로 곱습니다.”

벽화는 아이를 보지 않기 위해 애써 고개를 돌리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되었습니다. 어차피 제 손으로 키우지도 않을 아이인데 괜히 정이라도 생길까 두렵습니다. 몸을 추스르는 대로 서라벌로 돌아갈 것입니다.”

비량은 안타까운 얼굴로 벽화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벽화의 남편이라면 함께 아이를 키울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안 될 말이었다. 기다리고 있던 유모가 비량의 손에서 아이를 받아 안았다. 정말 잘 생긴 사내아이였다. 형편이 어려워 보이지도 않은데 갓난 아들을 버려야 하는 사정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으나 유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아이의 이름이라도 지어 주시지요. 혹시 마립간께서 숨을 거두시기 전에 생각해두신 이름이 있습니까?”

벽화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이와의 인연을 조금이라도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아이를 품에 안아보고, 젖을 물리고, 눈을 맞춘다면 서라벌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독하게 버텼다. 벽화는 몸조리를 마칠 때까지 아이를 보지 않았다. 유모의 집으로 보내진 아이를 은밀하게 보살펴준 사람은 섬신도, 비량도 아니라 원종의 숙부인 아진종이었다. 벽화가 버렸다고는 하지만 어쨌거나 아이는 비처의 유일한 아들이었다. 지대로나 원종이 아이를 챙기지 않을 것을 예상한 그는 날이군으로 사람을 보냈고, 아이에게 ‘이차돈’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석 달 후, 따뜻한 봄바람을 맞으며 벽화는 남동생 위화랑과 함께 비량의 호위를 받으며 서라벌로 돌아갔다.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이차돈은 젖을 뗀 후부터 일선군에서 자랐다. 

원종의 여인들 

원종은 돌아온 벽화를 몸소 맞아주었다. 벽화의 허리는 아이를 가진 적이 없는 것처럼 잘록했다. 벽화는 원종이 마련한 처소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벽화가 웃는 모습을 본 비량은 가슴이 두근거렸으나 얼른 고개를 숙였다. 벽화는 그가 가질 수 있는 여인이 아니었다. 

“태자께 인사 올리거라. 제 남동생입니다.”

“위화입니다.”

벽화 옆에 선 소년은 여인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고운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나란히 있는 벽화와 위화를 보자 원종은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이 아이가 비처마립간께서 여러 번 말씀하셨던 위화로군. 과연 듣던 대로 대단한 미모요. 월성 제일의 미녀와 미남이 내 사람들이라니 좋구려.”

칭찬을 받은 위화가 쑥스러운 듯 싱긋 웃었다. 원종의 기분이 좋아 보이자 벽화가 그의 소맷자락을 잡으며 말했다.

“위화가 마복칠성을 따르는 낭도가 되면 태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원종은 벽화의 애교가 마음에 드는 듯 그녀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차차 생각해봅시다. 그나저나 내 얼굴을 좀 보시오. 지난 몇 달 동안 그대가 보고 싶은 것을 참느라 아주 반쪽이 되지 않았소?

엄살과 달리 원종의 혈색 좋은 얼굴에서는 윤이 났다. 벽화는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반쪽이라니요. 오히려 얼굴이 훤해지셨습니다. 제가 없는 사이 새로운 미인이라도 찾으셨나 봅니다.”

벽화의 말에 담긴 가시를 눈치 챈 원종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소. 그럼 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푹 쉬고 있으시오. 회포는 저녁에 풀어도 충분하니.”

원종의 모습이 사라지자 벽화는 시녀를 불러서 말했다.

“위화랑께서 갈아입을 옷을 가져오거라. 내 동생은 오늘 처음 월성에 왔으니 옷을 갈아입은 후 네가 모시고 다니며 구경을 시켜다오. 나는 좀 쉬어야겠다.”

위화를 보며 얼굴을 붉힌 시녀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두 시진 후 시녀와 함께 돌아온 위화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누나에게 상세히 알려주었다. 주로 원종의 여자 문제 이야기였다. 

“오도에게 눈독을 들인단 말이지. 하긴 뻣뻣하기만 한 보도공주에 비하면 오도가 훨씬 예쁘긴 하지. 네가 보기엔 어떠냐?”

벽화의 물음에 위화의 목이 잠시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원종의 여자 문제에 몰두한 벽화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위화야, 잊지 마라. 네 누이는 이 월성의 진정한 주인이 될 것이다. 나는 태자의 아들을 낳을 것이고, 태자가 마립간이 되는 것을 볼 것이며, 내 아들이 마립간이 되는 것을 볼 것이다. 그래야 버린 자식에게 할 말이 있지 않겠니.”

위화는 벽화의 비장한 다짐에 숙연해졌다. 오도에게 첫눈에 반했으나 연정과 같은 달콤한 감정을 품을 때가 아닌 것 같았다. 위화는 누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누나.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서라도 누이를 도울 것입니다.”

“그래. 이 월성 안에서 내가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위화 너뿐이다.”

벽화는 남동생 위화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직 어린 동생이었으나 곁에 있으니 천군만마처럼 든든하고 의지가 되는 것 같았다. 

어긋난 사랑

514년, 지증왕이 승하했다. 지대로는 재위 4년째 되던 해, 국호를 신라(新羅)로 정하고 마립간 대신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신국도 마침내 고구려나 백제처럼 왕이라는 칭호를 쓰게 된 것이다. 지대로는 신라 최초의 왕이 되었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 왕위에 오른 지증왕은 여든을 두 해 남겨둔 채 15년간의 재위를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지증왕의 재위 기간 내내 국정을 운영해온 태자 원종이 왕위에 올랐다. 

원종은 왕위에 올랐을 때 보도 왕비 외에 이미 두 명의 정식 후궁을 두고 있었다. 후궁 중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여인은 벽화였고 두 번째는 나라와 신분을 버리고 사랑의 도피를 감행하며 원종을 찾아온 백제 동성왕의 딸 보과 공주였다. 보도 왕비의 이부자매이자 선혜 부인의 딸인 오도는 원종의 눈을 피해 위화와 사랑에 빠졌으나 결국 들키는 바람에 월성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위화를 아꼈던 원종은 그가 오도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을 알자 불같이 화를 냈고 위화의 월성 출입을 금지했다. 벽화는 자신의 연적이자 남동생 위화의 정인인 오도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편이라고는 없는 월성에서 버티기 위해 위화를 불렀건만 그가 오도와 연인이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위화를 만날 수 없게 된 오도는 시들은 꽃처럼 생기를 잃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총애했던 원종은 분노하여 그녀를 마복칠성 중 한 명이자 자신의 심복인 아시공과 혼인시켰다. 미리 벽화로부터 소식을 들은 아시공은 오도를 여동생처럼 대했고 그녀에게 안채를 내주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오도가 위화와 만나는 것을 눈감아주었다. 오도는 위화와의 사이에서 옥진과 금진, 두 딸을 낳았다. 옥진과 금진은 자랄수록 미색이 빼어나 원종이 즉위할 무렵에는 서라벌 청년들의 혼을 빼놓았다. 하지만 일부러 오도의 소식을 멀리했던 원종은 이를 전혀 알지 못했다. 

한편 벽화는 원종과의 사이에서 삼엽공주 한 명만 두었을 뿐 원하던 아들을 끝내 낳지 못했다. 아시공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 있던 벽화는 자신의 딸 삼엽공주를 그와 혼인시켰다. 너그럽고 과묵한 아시공과 금지옥엽 응석받이로 자란 삼엽공주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버지와 딸처럼 보였으나 부부 사이가 좋았다. 혼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랑하는 딸 삼엽공주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은 원종은 기뻐하며 늦은 밤을 틈타 아시공의 집을 찾아갔다. 수줍은 얼굴로 아버지 원종을 맞이한 삼엽공주는 한 집에 살고 있는 자신의 사촌이자 오도와 위화의 딸인 옥진과 금진을 소개했다. 

“소녀 옥진, 전하께 인사를 올립니다.”

옥진과 금진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원종은 선녀와 같은 두 여인을 보자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원종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옥진은 대담하게 고개를 들어 원종과 눈을 맞추며 입가를 살짝 올렸다. 옥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아버지 원종을 보면서 삽엽공주는 미소를 지으며 남편 아시공의 손을 잡았다. 옥진과 원종을 만나게 하려던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불교신문3576호/2020년4월22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