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오늘 밤 당장 월성으로 가자!”

삽화=견동한
삽화=견동한

사랑에 빠진 비처

비처는 무슨 정신으로 섬신의 집을 나와 일선으로 갔는지, 일선에서 서라벌까지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종일 멍한 정신으로 몸을 바삐 움직이다가 잠자리에 들자 비로소 벽화의 꽃다운 얼굴이 떠올랐다. 

“세상에, 이게 무슨…. 다 늙은 나이에 가슴이 뛴단 말인가.”

찬바람이라도 쐴까 싶어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비처는 자꾸만 달아오르는 몸을 진정시키며 달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오히려 역효과였다. 둥근 달이 벽화의 고혹적인 얼굴로 보였다. 술에 취하면 얼른 잠이 올까 싶어 술상을 들였으나 술잔에 비친 얼굴도 벽화요, 달을 닮은 둥근 떡도 벽화였다. 

“하아…”

뛰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던 비처는 잠시 숨을 고른 뒤 호위대장을 불렀다. 

“찾으셨습니까?”

“당장 가장 빠른 말을 대령하라. 말을 가지고 곧바로 월성 문 앞으로 오거라. 지금 바로 날이군으로 갈 것이다. 섬신공의 집으로 갈 것이니 따르거라.”

비처의 목소리와 표정에는 조급함이 서려 있었다. 호위대장의 눈에 의아함이 스쳤으나 비처는 서둘러 옷을 차려입고 월성 문 앞으로 달려갔다. 호위대장이 말을 가져오자 비처는 곧장 말에 올라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달린 끝에 날이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삼경이 지나 있었으나 비처는 조금도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호위대장은 섬신의 집 문을 작게 두드렸다. 몇 번을 두드리고 나서야 방에 불이 켜졌다.

“뉘십니까?”

“섬신공, 마립간께서 오셨습니다.”

마립간이라는 말에 섬신은 깜짝 놀랐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벽화는? 그대의 딸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섬신이 문을 열자마자 비처는 다급하게 물었다. 

“낮에 마립간께서 돌아가신 후 상심하여 밥도 먹지 않고 내내 방에 있습니다. 마립간께서 이렇게 와주셨으니 어서 모실 채비를 하라 이르겠습니다.”

벽화에게 기별을 하겠노라며 섬신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비처는 불타는 눈으로 벽화가 머무는 방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섬신이 나오자 비처는 얼른 그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이제 들어가도 되겠는가?”

“예, 어서 드시지요.”

섬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비처는 벗어 던진 신발이 뒤집힌 것도 모른 채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방안에는 온종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벽화가 속옷만 입은 채 얌전히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감격한 비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벽화를 와락 껴안고 이불 위로 쓰러졌다. 천 마디, 만 마디 말이 필요치 않았다. 벽화의 입술은 꿀보다 달았고, 그녀의 몸은 복숭아처럼 말랑거렸다. 비처는 황홀함에 몸서리치며 벽화를 품고 또 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벽화와 벽화의 숨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이제 돌아가셔야 합니다.”

어느새 날이 희끄무레하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호위대장은 방 밖에서 비처를 불렀다. 이제 돌아가야 한다는 신호를 준 것이 벌써 네 번째였다. 하지만 비처는 방 밖으로 나올 기미가 없었다. 벽화를 품에 안고 있던 비처는 못내 아쉬운 얼굴로 일어났다가 다시 쓰러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만 돌아가시지요. 마립간께서 여기 계신 것을 알면 사람들이 소녀를 욕할 것입니다.”

비처는 벽화의 부드러운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속삭였다.

“너는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니라. 감히 누가 너를 욕한단 말이냐?”

“제가 마립간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누가 안단 말입니까?”

벽화의 말에 비처는 움찔했다. 그는 몸을 일으킨 후 벽화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내 곧 너를 궁으로 들일 것이다. 그대가 나의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할 것이다.”

말을 마친 비처는 벽화에게 뜨거운 입맞춤을 퍼붓고는 말에 올랐다. 차마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으나 그의 마음과 달리 말은 나는 듯이 달려 진시가 막 지날 무렵 서라벌에 도착했다.

벽화, 왕비가 되다

밤새 한잠도 자지 않았지만 비처는 기력이 왕성했다. 벽화를 떠올리면 없던 힘도 솟구치는 것 같았다. 그녀를 부인으로 맞을 생각을 하면 밥을 먹다가도 웃음이 났다. 비처는 전에 없는 단호함으로 선혜를 폐했다. 선혜궁을 폐쇄하면서도 선혜의 지위는 건드리지 않았던 비처였기에 귀족들의 놀라움은 컸다. 하지만 선혜의 지난 행적을 알기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그저 비처의 인내심이 마침내 동이 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인의 자리를 비워두실 것입니까?”

은밀히 비처를 찾아온 선혜의 아버지 이벌찬 내숙이 물었다. 

“아니, 오래 비워둘 수는 없지.”

“그럼 김씨 일족의 여식들을 알아보리까?”

“그럴 것 없네.”

비처는 황급히 손을 저었다. 비처와 눈이 마주친 내숙이 재차 물었다.

“혹시 생각해 두신 여인이 있으십니까? 신께 귀띔해주신다면 신이 혼인을 주관하겠습니다. 선혜를 폐하신 것은 제 여식이 부덕한 탓이니 아비인 제가 이번 혼사를 주관하면 다른 귀족들에게서 말이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저에게 이 일을 맡겨주십시오.”

비처는 내숙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벽화 앞에서는 호기를 부렸으나 이숙에게 차마 손녀뻘 되는 벽화를 맞겠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그리하겠네.”

비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숙이 물러난 후 비처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오늘 당장이라도 벽화를 데려오고 싶었으나 정식 부인으로 맞으려니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아, 그냥 섬신의 딸이라고 할 것을 괜히 체면을 생각하는 바람에 하루가 또 늦춰졌구나.”

한숨을 쉬던 비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미 비처의 명을 예상한 호위대장이 준비된 말을 가져왔다. 비처는 어둠이 내리기가 무섭게 말을 달려 날이군으로 갔다. 그렇게 비처와 벽화의 비밀스러운 만남이 한 달 넘게 계속되자 서라벌에서는 비처의 잠행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비처는 섬신의 집 대문이 굳게 닫혀 있는 것을 보고 당황하였다. 

“벽화야, 나다. 어서 문을 열어다오. 벽화야, 어서 문을 열어다오.”

비처가 다급하게 속삭였으나 문은 열리지 않은 채 벽화의 목소리만 들렸다.

“성군께서 어찌 늦은 밤 소녀의 누추한 집을 찾으십니까? 다른 백성들이 알까 두려우니 돌아가시지요.”

냉랭한 벽화의 목소리가 비처의 가슴을 후벼 팠다.

“벽화야, 어찌 그러느냐? 내가 다 잘못했다. 얼굴이라도 보여다오.”

비처의 애원에도 벽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소녀는 마립간의 사랑을 감당하기 어려우니 이만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앞으로는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마십시오. 마립간께서 이곳에 드나드는 것이 알려지면 소녀의 혼사도 어려워집니다.”

벽화의 입에서 혼사라는 말이 나오자 비처의 눈이 커졌다.

“혼사라니, 나를 두고 누구와 혼인을 한단 말이냐? 그놈이 누구냐?”

벽화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것을 떠올리자 비처는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

“문을 열어라. 당장 나와 함께 월성으로 가자. 너를 진작 부인으로 맞이해야 했는데 다 나의 잘못이다. 용서해다오. 제발 문을 열어다오. 벽화야, 너 없이 어찌 내가 살 수 있단 말이냐?”

떨리는 목소리로 용서를 빌던 비처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섬신의 집 앞에 쪼그리고 앉아 아이처럼 엉엉 울던 비처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벽화야!”

벽화를 발견한 비처는 생명줄이라도 본 것처럼 그녀를 부둥켜안았다. 그리고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녀를 말에 태웠다.

“가자, 오늘 밤 당장 월성으로 가자! 내 오늘 밤은 월성에서 너를 품을 것이다.”

비처의 품에 안긴 벽화는 말 위에서 바람을 느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불교신문3570호/2020년4월1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