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종공을 모셔 오거라, 어서 서두르거라”

삽화=견동한

벽화가 품은 아이 

한밤중에 벽화를 품에 안고 월성으로 돌아온 비처는 그날부터 해가 뜨고 지는 것을 잊었다. 비처는 벽화궁을 마련하라 일렀으나 궁이 준비된 후에도 벽화를 보내지 않았다. 비처가 거처하는 대전이 그녀의 궁이었다. 지도공주는 자신보다도 한참 어린 벽화의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라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였다. 벽화는 지도공주를 보고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고, 선혜 앞에서도 딴청을 부리는 등 무례하게 굴었으나 비처는 처자식이 있다는 것이 미안하여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벽화의 눈치를 살폈다.

벽화는 날이군에서 나고 자랐고 부유해본 적도 없으며 평민이나 다름없는 반쪽짜리 귀족이었으나 신기하게도 처음부터 월성에서 살아온 것처럼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같은 비단옷도 벽화가 걸치면 더욱 빛이 났고, 비처가 선물한 화려한 장신구들을 한꺼번에 걸쳐도 천박하거나 촌스러운 느낌이 없었다. 오히려 월성에서 나고 자란 귀족 처녀들도 벽화 옆에만 가면 성긴 무명처럼 투박하고 거칠게 보였다. 기품을 타고난 지도공주나 인물이 빼어난 오도 역시 벽화를 본 순간 자신의 얼굴을 부끄러워하게 되었다. 

“마립간 전하, 원종 들었사옵니다.”

“들라 하라.”

마복칠성의 우두머리인 원종은 비처의 조카이자 차기 마립간이 될 지대로의 아들이었다. 아들이 없던 비처는 육촌 아우 지대로를 후계자로 삼았고 그의 아들 원종을 태자로 대우하고 있었다. 비처와 지대로는 이미 머리카락에 서리가 내린 나이였고 반면 원종은 젊고 능력과 야심도 빼어났다. 원종은 마복칠성을 수하에 두고 월성을 드나들며 정치에 싫증을 내기 시작한 비처를 대신하여 국무를 처리하곤 했다. 그날도 원종은 비처가 며칠째 조회조차 거르자 귀족들과 국정을 논의하기 위해 입궁한 것이었다. 

“원종아, 고개를 들어라. 여기는 네 백모가 될 벽화부인이다. 인사하거라.”

궁으로 오는 길에 원종은 비처가 손녀뻘 되는 젊은 처녀에게 미쳐 노망이 났다며 궁녀들이 소곤거리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갸웃했었다. 비처는 선혜의 배신 이후 오래도록 여색을 멀리했었고 한동안은 유부녀에게 특히 아이를 가진 여인을 총애했었다. 마립간이 된 이후 어린 처녀가 비처의 총애를 받은 것은 한 번도 없었다. 소문이 과연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천천히 고개를 들던 원종의 눈이 벽화와 마주쳤다. 순간 원종은 숨이 턱 막히면서 몸이 굳어버렸다. 

“참으로 아름답지 않느냐? 벽화는 하늘이 내게 주신 선물이다.”

비처는 살구 같은 벽화의 볼에 입술을 문지르며 껄껄 웃었다.

“부인, 저 아이는 원종이라 하는데 장차 내 뒤를 이어 마립간에 오를 예정이라오.”

벽화는 말없이 원종을 바라보았다. 벽화의 시선이 닿자 원종은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원종아, 좋은 소식이 있단다. 네 백모가 지금 아이를 가졌느니라. 참으로 기특하지 않느냐?”

행복을 주체하지 못한 비처는 주책맞은 얼굴로 벽화의 배를 어루만지며 원종에게 재차 물었다. 순간 원종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벽화의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아들이라면, 아버지 지대로는 물론이요 자신이 어떤 처지가 될지 알 수 없었다. 원종은 비처의 딸인 지도공주와 정혼한 사이였다. 마립간의 자리를 계승하기 위해 비처의 사위가 되긴 했으나 지도공주에게 연심을 느낀 적은 없었다. 그래도 장차 아버지 지대로가 마립간에 오르면 태자의 신분으로 얼마든지 지도공주보다 미색이 수려한 여인을 취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연심 따위는 상관하지 않았다. 원종은 그런 자신이 꽤 영리하고 똑똑하며 대담하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언제까지나 벽화를 보기 전의 일이었다. 벽화는 세상을 발아래 두고 군림할 수 있는 여인이었다. 

복잡하게 돌아가는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원종과 눈이 마주친 벽화가 한쪽 입술 끝을 살짝 들어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살짝 부풀어 오른 벽화의 배를 본 원종은 벼락을 맞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떨었다. 

갑자기 뜨거운 정념이 솟구쳐 온몸이 타버릴 것 같았다. 서둘러 돌아가는 원종의 뒷모습을 보던 벽화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두 젊은 남녀가 순식간에 눈이 맞은 것도 모른 채 비처는 그저 벽화가 곁에 있는 것이 좋아 연신 허허 웃기만 했다. 


비처의 몸이 굳고 손발이 
차가워지는 것을 확인한 
벽화 목소리에 위엄이 넘쳤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원종은 
상황을 알아차렸다 
비처의 시신 앞에서 
예를 갖추어 절을 올린 후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벽화의 손을 꽉 잡았다

“내가 왔으니
아무 걱정 하지 마시오”
곧 날이 밝으면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리라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비처의 죽음

비처는 벽화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땀 내음조차 향긋한 이곳이 부처님이 말한 극락이고, 평안이었다. 평생을 살면서 이렇게 행복했던 적이 있는가 싶은 나날이 계속되었다. 비처의 소원은 이제 단 하나였다. 신국의 백성들이 전쟁의 두려움 없이 잘 살아갈 수 있게 군사를 키우고 방비를 하는 것도 아니요, 가뭄과 홍수, 태풍과 흉년에도 굴하지 않고 성군의 모습을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 자비왕과 함께 둥근 달을 보며 다짐했던 패기와 자부심은 이미 머릿속에서 지워진지 오래였다. 비처에게는 벽화만이 그의 백성이자 그의 주인이며 목숨을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비처의 사무치는 사랑을 받으며 벽화는 날로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더해갔다. 

사랑에 눈이 먼 비처는 미처 알지 못했으나 벽화의 신비로움은 사실 원종과의 밀회로 인한 것이었다. 강렬했던 첫 만남 이후 원종은 때로는 혼자, 때로는 마복칠성과 함께 날마다 월성을 출입하며 벽화를 다시 만나기 위해 노력했다. 벽화의 곁에 찰싹 붙어있는 비처 때문에 단둘만의 시간을 갖는 것은 어려웠으나 그래도 원종의 노력은 통했다. 어느 날, 벽화와 원종은 노곤한 몸으로 낮잠에 빠진 비처 앞에서 뜨거운 입맞춤을 나눴다. 간이 오그라들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긴장과 불안 속에서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나눈 입맞춤 이후 두 사람의 마음은 이미 하나가 되었다. 억눌렸다가 터져버린 욕망은 나날이 커졌고 그날 이후 원종은 수시로 벽화와 비처의 방을 찾았다. 사람들은 비처가 국정에 소홀해진 지 오래였기에 원종의 업무가 많아졌다고만 생각했다. 궁녀들도 원종이 궁에 오는 것을 환영했다. 원종이 오는 날이면 보도공주의 얼굴도 활짝 피었기 때문이다. 주도면밀한 원종은 종종 선혜궁을 찾아 선혜와 오도를 위로하기도 했다. 

원종이 궁에서 입지를 다지는 동안, 비처의 건강은 점점 나빠졌다. 욕망에 불타오르던 눈은 총명함을 잃었고, 달콤한 사랑의 밀어를 쏟아내던 입에서는 거친 숨을 내뱉었고, 벽화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 아등바등 움직였던 육신은 힘을 잃고 흐느적거렸다. 비처는 자리보전을 하면서도 벽화의 손을 잡거나 벽화를 품고 누웠다. 벽화가 잠시라도 눈에 보이지 않으면 엄마를 잃은 어린아이처럼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럴수록 벽화는 냉정해졌다. 벽화의 냉랭해진 마음을 돌리기 위해 기를 쓰고 그녀를 품으려던 비처는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눈을 까뒤집고 쓰러진 비처는 사지를 떨다가 점차 몸이 굳어졌다. 비처의 손길을 거부한 채 등을 돌리고 있던 벽화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비처의 몸이 굳고 손발이 차가워지는 것을 확인하자 심호흡을 크게 한 후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마립간께서 원종공께 하실 말씀이 있다 하니 모셔 오거라. 정신이 또렷하실 때 꼭 하실 말씀이 있다 하시니 어서 서두르거라.”

“예.”

벽화의 목소리에는 위엄이 넘쳤다. 궁녀는 서둘러 원종을 부르기 위해 달려갔다. 며칠 전부터 마복칠성과 함께 월성을 지키고 있던 원종은 대전 궁녀의 모습을 보자마자 마침내 올 것이 왔음을 알았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비처와 벽화의 방으로 향했다.

“원종공 오셨습니다.”

“들라하라.”

방에 들어가자마자 원종은 상황을 알아차렸다. 벽화가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원종은 비처의 시신 앞에서 예를 갖추어 절을 올린 후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벽화의 손을 꽉 잡았다.

“내가 왔으니 아무 걱정 하지 마시오.”

원종은 마복칠성을 시켜 월성의 경비를 강화하고 영실을 집으로 보내 아버지 지대로를 은밀히 모셔오라고 명했다. 원종에게 충성을 맹세한 마복칠성은 한마음으로 그의 명을 따랐다. 모든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제 곧 날이 밝으면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리라 생각하니 원종은 가슴이 뛰었다. 

[불교신문3572호/2020년4월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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