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지키는 것이 나의 길이다”
“불교를 지키는 것이 나의 길이다”
  • 장영섭 기자
  • 승인 2019.08.08 15: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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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폐지의 부당성 알린
상소문 ‘간폐석교소’ 풀이
한국불교 책임의식 일깨워

백곡 처능, 조선 불교 철폐에 맞서다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스님·자현스님 지음 조계종출판사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스님·자현스님 지음 / 조계종출판사

제36대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스님이 처음 펴낸 단행본이다. 글감으로 조선시대 불교를 지켜내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백곡 처능스님(白谷處能, 1617~1680)’을 택했다. <백곡 처능, 조선 불교 철폐에 맞서다>. 더 이상의 배불(排佛)을 멈추라며 임금에게 결연히 올린 상소인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의 내용을 현대어로 풀이했다.

총무원장 스님의 또 다른 면모는 학승이다. 조선불교사를 전공한 박사다. 이 책은 스님의 2013년 한양대 박사학위 논문 일부를 저본으로 삼았다. 그 위에 백곡스님의 생애와 우리말로 번역한 간폐석교소 원문을 덧붙여 출판했다. 백곡스님의 숭고한 실천을 널리 알리고 시대를 뛰어넘는 귀감으로 삼자는 취지다.

부당한 공권력에 맞서 불조혜명을 보존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음에도, 그 이름이 크게 알려지지 않은 점이 안타까워 글을 썼다. 그 마음이 서문에 담겼다. “저는 백곡 스님의 삶과 불교 말살을 막아낸 <간폐석교소>를 보며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시대를 뛰어넘는 불교의 위대한 혼이자, 대장부만이 갈 수 있는 떳떳한 실천행(實踐行)이었기 때문”이라는 구절에선 불교중흥을 향한 본인의 원력도 미루어 읽을 수 있다.

조선왕조의 숭유억불 정책은 익히 알려진 바다. 초기인 태종 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불교 탄압은 중기로 오면서 더욱 심해진다. 세조나 문정왕후의 돈독한 신심 덕분에 잠깐잠깐 흥한 시기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대세는 멸불(滅佛)이었다. 유생들의 상소에 실려 있는 표현 그대로 ‘불교의 뿌리를 뽑기 위해’ 온갖 행태가 자행됐다. 백곡스님이 살던 17세기에도 위기가 심각했다.

18대 임금 현종은 즉위하자 양민이 출가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했다. 비구나 비구니가 된 자는 모두 환속시켰고 어기면 벌을 주었다. 도성 안에 있던 비구니 스님들의 사찰 자수원과 인수원의 혁파도 명령했다. 선교(禪敎) 양종(兩宗)의 수(首)사찰이었던 봉은사와 봉선사도 철폐해 스님들을 내쫓았다. 가혹하고도 저돌적인 척불시책에 대강백 벽암각성의 제자로 불교와 유학에 능통했던 백곡스님이 마침내 붓을 든다. <간폐석교소>를 쓰게 된 동기다.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스님이 공저한 '백곡 처능, 조선 불교 철폐에 맞서다'는 조선불교의 선각자 백곡스님을 기리면서 한국불교가 지향해야 할 가치를 설파하고 있다.  불교신문 자료사진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스님이 공저한 '백곡 처능, 조선 불교 철폐에 맞서다'는 조선불교의 선각자 백곡스님을 기리면서 한국불교가 지향해야 할 가치를 설파하고 있다. 불교신문 자료사진

간폐석교소의 핵심 내용은 크게 두 가지다. 사대부들이 폐불의 근거로 드는 6가지 주장에 대한 반박 그리고 불교 무용론에 대한 반박이다. 백곡은 ‘불교가 인도에서 생긴 것이라는 점’ ‘윤회를 주장한다는 점’ ‘농사를 짓지 않으며 재물을 소모한다’는 등의 공격에 대해 수많은 경전과 실제 사례를 들어 그 잘못됨을 세세하게 논증하고 있다.

아울러 모든 세상에는 불교가 있으며, 유학의 성인(聖人)들도 불교를 가까이 했으며, 조선의 역대 왕들도 실질적으로는 불교를 숭상했으며, 역사적으로 사찰을 건립하면 극가가 흥성했으니, 불교는 무해하며 오히려 이롭다는 결론으로 성실하게 설득했다. 

상소는 왕이라는 절대권력에 대한 비판이다. 요즘 같은 민주주의 체제에서의 ‘대듦’과는 그 용기의 크기와 치러야 할 대가의 혹독함을 비교하기 어렵다. 여러 권의 불교 교양서를 집필한 중앙승가대 교수 자현스님이 공동 저자로 참여했다. 스님은 “백곡은 목숨을 내놓고 냉철한 논리로 척불의 시정을 촉구했다”며 “조선조 500년간의 불교사에서 단 한 편의 반박 상소라는 점에서 그 의의를 높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역설했다. 

상소를 올린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정확히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상소 이후에 취해진 조치들을 통해 짐작해볼 뿐이다. 자수원과 인수원의 철폐는 강행됐지만, 봉은사와 봉선사는 존속돼 화를 면했다. 또 현종이 말년에 봉국사(奉國寺)를 창건하는 등 불교를 믿게 된 정황이 보인다. 무엇보다 현종 15년에 백곡이 남한산성도총섭에 임명된다.

상소가 임금의 마음을 움직인 징표로 판단된다. 불교라는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각오했던 고귀한 정신이 세상을 바꿨다고 말할 수 있다. 말년의 백곡은 도총섭을 사임하고 수행과 교화에만 매진한다. 선공후사와 멸사봉공의 본보기로 오래 널리 기억될 만하다. 총무원장 스님이 책을 펴낸 까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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