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곡 처능선사 없었으면 지금의 봉은사도 없었다”

폐불정책ㆍ불교무용론에 맞서
8000여 자에 이르는 상소문
‘간폐석교소’ 올려 적극 대처 
목숨 내놓은 ‘유일무이’ 선사

“선(禪)은 마음으로 전하고 
교(敎)는 말을 빌려 널리 전해
유불(儒佛), 회통될 수 있지만 
불교사상이 훨씬 수승” 역설

백곡처능 선사가 만년에 머물다 열반한 김제 금산사.

북주(北周, 557~581)의 무제가 폐불정책을 실시했다. 무제의 폐불은 중국의 유명한 법난 가운데 하나이다. 이 법난 때, 정영사 혜원(慧遠, 523~592)은 목숨을 버릴 각오로 무제에게 충고를 했다. 혜원은 승조(僧稠, 374˜414, 구마라집의 제자, <肇論>의 저자)의 제자로서 <기신론>의 주석서를 쓴 학승이자, 선사이다. 당시 무제에게 항변하는 승려가 없었는데, 유독 혜원만이 무제에게 당당하게 맞섰다. 

당시 승통(僧統)이었던 담연 법사는 혜원의 손을 잡고 울면서 “혜원스님의 용기는 참다운 호법보살”이라며 연신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때 혜원은 이런 말을 했다. “올바른 도리는 반드시 주장해야 합니다. 이 한 목숨을 뭣 때문에 아낄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후 혜원은 산서성 부근 서산에 은거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법은 절대로 멸하지 않습니다. 모든 대덕들이여! 걱정할 것 없습니다.” 

혜원보다 이른 시대의 승려로서 똑같은 이름의 여산 혜원(廬山慧遠, 334˜416)도 비슷한 사상의 소유자다. 혜원은 산문 밖을 나오지 않고 30여년을 여산에 은거한 승려이다. 그의 저서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에서 ‘승려는 황제에게 예를 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만큼 승려는 출가수행자로서 세속의 왕과는 감히 비교될 수 없으니 굽실거리지 말라는 의미라고 본다. 

<인천보감>에는 이런 내용도 전한다. 송나라 진종(眞宗, 998~1022) 황제가 한번은 태평흥국사(太平興國寺)를 없애고 창고로 만들려고 했다. 조서가 내리던 날, 한 스님이 절을 없애서는 안 된다고 온몸으로 항의했다. 황제는 중사(中使)에게 칼을 주며 “그 승려가 절을 없애라는 명령을 듣지 않으면, 목을 베라”고 한 뒤 다시 이렇게 말했다. “그 스님이 이 칼을 보고 겁나서 떨거든 목을 베고, 그렇지 않거든 용서해 주어라.” 중사가 황제의 명대로 스님에게 칼을 들이댔더니, 그 스님은 만면에 웃음을 띠며 목을 길게 내밀며 “불법(佛法)을 위해 죽는다면 칼을 핥으라고 해도 달게 받겠다”고 했다. 

황제가 이 말을 듣고, 스님의 용기와 기백에 감탄하며, 사찰을 폐사하지 않았다. 이 이야기처럼 권력의 부당함과 폐불에 당당히 맞선 우리나라 스님이 있다. 조선 시대, 백곡 처능(白谷處能, 1617˜1680)이다. 조선 18대왕 현종이 즉위해 폐불 정책을 실시하자, 백곡은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라는 8000여 자에 이르는 가장 긴 장문의 상소문을 올렸다. 

유교·제자백가·시문도 익혀 

백곡은 광해군 9년에 태어났으며, 속성은 전(全) 씨, 법명이 처능, 백곡은 법호이다. 12세에 의현에게 글을 배우다가 경전의 깊은 이치에 감동해 출가를 결심하고, 15세에 출가해 속리산에서 2〜3년 동안 불법을 배웠다. 18세 무렵, 서울에 올라간 백곡은 한문과 유학에 전념하기 위해 신익성(申翊聖, 1588~1644)의 집에 머물며 유교 및 제자백가를 배우고 시문을 익혔다. 

이렇게 유학을 익힘으로써 사대부들과 함께 교류할 정도로 시문에 탁월했다. 이곳에서 4년을 머문 뒤 지리산 쌍계사의 벽암 각성(碧巖覺性 1575˜1660)을 찾아가 제자가 됐다. 벽암은 부휴 선수(1543˜1615)의 제자 가운데 장자에 해당한다. 백곡은 출가는 일찍 했지만, 스승 벽암과 인연이 되면서 진정한 출가의 의미를 알게 된다. 선사는 벽암의 문하에서 20여 년 간 수행에 전념한다. 

이후 40세가 넘어 서울 근교의 산사에 머문다. 1674년(현종 15년) 김좌명의 주청으로 팔도선교도총섭(八道禪敎都摠攝)이 되어 남한산성에 머물렀으나 3개월 만에 사임했다. 그 후 백곡은 운수행각하며 속리산, 성주산, 청룡산, 계룡산 등지에서 산림법회를 열어 후학들을 지도하고 전법활동을 했다. 그가 가장 오래 머물렀던 사찰은 대둔산의 안심사며, 64세에 모악산 금산사에서 큰 법회를 개최한 이후 7월 열반에 들었다. 

선사의 사리를 금산사와 대둔산의 안심사, 계룡산의 신정사에 각각 나누어 모셨다. 실은 두 차례 금산사를 다녀왔으나 선사의 부도를 확인할 수 없었다. 염려하던 차, 총무원장 원행스님께서 부도 장소와 탑 모양을 알려주었다. 올해 3월 말, 새벽3시 반에 금산사로 향했다. 부도전을 몇 바퀴 돌고서도 확인이 안됐는데, 안심사에 가서야 백곡의 부도를 알아냈다. 묘하게도 선사의 기백과 당당함이 부도에 그대로 서려 있었다.

선사의 기백과 당당함이 서려있는 부도(금산사 부도전).

‘간폐석교소’ 정황과 내용 

현종은 왕에 부임하자마자, 양민 출가를 금지했다. 마침 부제학 유계(兪棨)가 상소를 올려 “이단 척결의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하자, 현종은 이를 수용해 양민이 출가해 비구니가 되는 것을 금하고, 이미 비구니가 된 사람은 환속할 것을 권하거나 명령했다. 문정왕후의 내원당으로 5000의 비구니를 수용했던 자수원(慈壽院), 인수원(人壽院)을 철폐하고, 사찰 노비는 모두 본사(本司)로 돌려보냈다. 또한 선종사찰 봉은사와 교종사찰 봉선사까지도 폐하여 승려를 환속시키고, 폐쇄 조치를 취했다. 

이렇게 왕의 부당한 처사가 발생하자, 백곡은 상소문을 올렸다. 선사는 이때 “삼가 조보(朝報)에 인하여 엎드려 성지(聖旨)를 받잡건대, 승니를 모두 사태시켜 비구니는 환속시키고, 비구도 역시 없애기로 의논이 되었다 하는데, 신은 실로 우둔하여 전하께서 무엇을 생각하시는지 엿보지 못하겠습니다”라고 시작된다.

‘간폐석교소’는 크게 두 가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폐불의 이유로 추정되는 여섯가지 주장에 대한 반박 내용이며, 둘째는 불교 무용론(無用論)에 대한 여섯가지 조항의 반박 글이다. 전ㆍ후자 모두 여섯가지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로 폐불 이유로 거론되고 있는 사항들에 대한 백곡의 반박 담론이다.

대략 여섯가지 호법론을 보자. ①이방역(異邦域)은 불교가 중국에서 발생한 종교가 아니고 타 지역에서 생긴 것이므로 폐지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에 백곡은 중국인이라고 다 뛰어나지 않으며, 사상의 탄생지보다는 사상 내용이 중요하다고 반박했다. ②수시대(殊時代)는 석가모니부처님이 중국인들로부터 절대적 지지를 받는 요·순·우·탕·문무·주공이 통치했던 상고시대에 출현한 성인이 아니므로 배척돼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에 선사는 시대는 다르나 이치는 하나라고 강조했다. 곧 진리는 영원한 보편성을 갖고 있으므로 시대를 불문한다고 반박했다.

③무윤회(誣輪回)는 인과에 대한 그릇된 견해로, 윤회를 없는 것처럼 본다는 점이다. 이 윤회설은 고려 말기부터 꾸준히 공격받은 설이다. 선사는 업력의 결과가 다양한 인간군상과 사회현상을 만들어 낸다고 밝히고 있다. ④모재백(耗財帛)인데, 승려가 농사를 짓지 않고 놀고먹으면서 재물을 소비한다는 비난에 대한 반박이다. 이에 선사는 농업에 종사하는 것만이 생업이 아니며, 공자와 맹자도 정신적인 수양에만 힘썼다. 한편 벼슬자리 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농사지어 밥 먹지 않으며, 안방에 깊이 사는 사람들 모두가 반드시 길쌈하여 옷을 지어 입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⑤상정교(傷政敎)는 출가자들이 정교를 손상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정교는 물론 유교의 가르침 등을 뜻한다. 배불론자들은 불교가 치세와 백성 교화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중국 땅에서 축출해야 한다는 논리를 주장한다. 유생 중에도 범법자가 있다고 하여 유교를 폐지할 수 없듯이 상정교의 문제는 승려 개개인의 범법 문제에서 출발하지 않았으므로 불교를 폐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⑥실편오(失偏伍)는 승려들이 요역을 기피하여 병역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점에 대한 반박이다. 즉 승려들은 각종 공역이나 사역에 동원되고 있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의승군으로 편입해 전쟁에 참여해 국가에 이익을 주었다. 이런 점에서 승려들이 병역을 기피하는 것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대둔산 안심사 도량. 선사가 생전에 오랫동안 머물던 사찰이다.

禪敎 근원은 하나…백곡의 사상

첫째, 선교설에 있어 백곡은 ‘선자심야(禪者心也) 교자회야(敎者誨也)’라고 정의하고 있다. 즉 선(禪)은 마음으로 전하고, 교(敎)는 말을 빌려 널리 전한다고 보았다. 대체로 선사들은 선교일치를 강조하면서도 선을 바탕에 두는 측면이다. 그런데 백곡은 선과 교를 구분하는 것조차 잘못이라고 보았다. 선과 교를 나누어 서로를 비방하는 경우를 통렬히 비판했다. 그는 선과 교가 다르지 않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도 다르지 않은데, 그 이유는 선과 교가 한 근원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한편 유불(儒佛)문제에 있어서도 두 사상이 회통될 수 있는 것은 맞지만, 불교는 유교에 비해 훨씬 수승한 사상을 갖고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둘째, 선사는 적극적으로 호법론을 전개했다. 대체로 중국이나 우리나라 경우, 호법론은 불교와 유교의 차이점을 논함으로써 불교의 우수성을 밝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유불일치에 관한 저서로는 규봉 종밀(780˜841)은 유·불·도 삼교의 회통(會通)을 시도한 <원인론>이 있다. 또한 불일 계숭(1007~1072)의 <보교편(輔敎扁)>, 장상영(1043˜1121)의 <호법론>이 있다. 우리나라는 고려 말기, 환암 혼수가 승준과 만회에게 명하여 <호법론>을 청룡사본으로 간행했다. 

또한 함허 득통은 <현정론>을 저술함으로서 삼교일치 사상을 주장했고, 청허 휴정도 <삼가귀감>을 통해 유불도 일치 및 배불에 대응했다. 득통의 삼교융합론은 유가의 배불론을 반격하면서 삼교의 조화론적인 입장을 보이며 불교를 현정(顯正)시키고 있다. 그런데 백곡의 경우는 다르다. 중국 속담에 “천자(天子)가 한번 노하면 송장이 만리에 덮인다”고 했는데, 왕의 권력이 절대적인 시대에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부당하다고 항거한 선사는 백곡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올해 서울 강남 봉은사 신년 간담회에서 주지 원명스님은 “백곡 처능선사가 없었으면 봉은사와 봉선사가 없었습니다. 백곡선사를 기리고 간폐석교소 책을 만들어서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하려고 합니다”라고 했다. 반드시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불교신문3481호/2019년4월20일자]

정운스님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