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걸고 ‘간폐석교서’낸 백곡스님의 삶과 스승
목숨 걸고 ‘간폐석교서’낸 백곡스님의 삶과 스승
  • 금산사=이성수 기자
  • 승인 2019.05.16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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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 이 몸은 有無 양극단에 치우침을 잊었네…”
백곡스님이 유학을 공부한 신익성의 양수리 별장. 그림은 신익성이 직접 그린 작품 ‘백운루도’이다. 제공=마로니에북스

호란 때 '척화오신' 신익성
팔도도총섭 지낸 벽암스님
충절강직한 성품 영향 받아
척불 부당성 정면으로 비판

억불숭유의 조선 시대. 18대 왕 현종(1641~1674)은 즉위 하자마자 불교 탄압 정책을 폈다. 청나라 심양에서 태어난 현종은 아버지 효종(1619~1659)을 이어 18살(1659)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조정은 여전히 효종이 내건 북벌론을 주장한 송시열(1607~1689) 중심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인조 계비인 조대비의 복상 문제를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예송논쟁(禮訟論爭)으로 정국은 혼미했다.

이런 상황에서 현종은 즉위하던 해에 백성의 출가를 엄격히 금지하고, 스님을 환속(還俗)시키는 정책을 폈다. 선종(禪宗)과 교종(敎宗) 수사찰인 봉은사(奉恩寺)와 봉선사(奉先寺)는 물론 도성에 있는 자수원(慈壽院)과 인수원(仁壽院) 등 비구니 사찰을 폐쇄 했다. 봉은사에 있는 역대 왕 위패를 땅에 묻으며 왕실과 절연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며 척불(斥佛)을 드러냈다.

이 때 한 스님이 나서 8150자에 달하는 상소문을 올려 척불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백곡처능(白谷處能, 1617~1680) 스님이다.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 로 ‘불교의 폐지에 대해 간언하며 올린 상소문’이란 의미다. 이 상소에서 백곡스님은 구체적인 사례를 적시하고 “불교가 국가의 다스림에 방해되거나 해롭지 않다”면서 “사찰은 국가를 비보(裨補, 도와서 모자란 것을 채움)하고 스님들은 국가와 민중에 애국애민하는 종교”라고 강조했다. 봉은사, 봉선사, 자수원, 인수원 등은 역대 왕실의 원당을 폐훼(廢毁)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4년간 유가적 학식을 백곡스님에게 전해 준 신익성.(소장처 = 일암관)

황인규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백곡처능의 생애와 호법활동’이란 연구에서 “조선 중기 이래 본격화된 억불시책, 특히 현종대 척불시책에 대응하기 위해 상소를 올린 것”이라면서 “상소의 핵심 내용은 성리학적 예제의 확립에 따른 불교 중요사항인 승려의 혁거와 사찰을 대표하는 선교 양종의 본산과 비구니원의 철훼였다”고 분석했다.

절대 권력을 지닌 임금의 시책에 백곡스님은 공식적으로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더구나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내세운 사대부(士大夫)의 기세가 등등하던 시절 스님의 상소는 ‘목숨을 건’ 일이었다. 일목요연하고 강단 있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 백곡스님은 참선 수행은 물론 교학과 글쓰기에도 뛰어났다. 

장원급제하여 우의정까지 지낸 식암(息庵) 김석주(金錫胄, 1634~1684)는 “(백곡)대사의 문장은 광대무변(廣大無邊)하여 마치 계곡의 물이 쏟아져 나오는 듯 했고, 강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 듯 했다”고 극찬했다.

숙종 당시 사나사에서 열린 대법회의 49명 고승 가운데 한 명으로 동참한 자수무경(子秀無竟, 1664∼1737) 스님은 “우리나라 시승은 고금(古今)에 수가 많지만 문장과 도덕을 함께 갖추고, 사람의 이목을 놀라게 한 분은 오직 백곡스님뿐”이라면서 “기이한 자취가 신출귀몰하여 하늘의 별들처럼 빛났으며, 그 유풍과 여운은 하늘을 떠받치고 우주에 뻗어서 한 없는 곳으로 미쳤으니 그 문장과 도덕이 큰 기운을 얻었다고 이를 만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백곡스님 시문(詩文)을 묶어 놓은 <대각등계집(大覺登階集)>에는 도덕을 갖춘 광대무변한 글이 잘 정리돼 있다. 2권 2책으로 인명(印明), 신청(信淸), 종원(宗元), 원익(元益) 스님이 숙종 9년(1683) 김제 금산사에서 초판을 간행했다. 순조 19년(1819)에는 금산사에서 다시 간행했다. <백곡집>이라고도 불리는데 시문을 비롯하여 행장, 비명(碑銘), 권선문 등 스님의 글 200편이 실려 있다.

백곡스님에게 영향을 끼친 벽암각성 스님

임재완 한림대 연구교수는 동국대출판부에서 발간한 <대각등계집>의 ‘백곡집 해제’에서 “당대의 문장가인 신익성(申翊聖, 1588~1644)으로부터 유가 경전과 당송(唐宋) 시대의 문장을 배워 유가적인 학식과 교양을 쌓았다”면서 “불교는 당대의 으뜸가는 고승인 벽암각성에게 배워, 유교와 불교를 두루 관통하는 스님이었다”고 평했다.

벽암각성(碧巖覺性, 1575~1660) 스님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 승군(僧軍)을 이끌며 외적에 맞섰다. 해전에 참전하고 남한산성을 축성할 당시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으로 승군을 이끌며 3년 만에 완성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화엄사에서 승병 3000명을 모아 항마군(降魔軍)을 결성해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중 전쟁이 끝나 지리산으로 돌아왔다. 

1646년 희언(熙彦) 스님과 법주사에 은거하다 화엄사에서 세수 86세, 법랍 73세로 열반했다. <선원집도중결의(禪源集圖中決疑)>, <간화결의(看話決疑)>, <석문상의초(釋門喪儀抄)>와 <부휴당집(浮休堂集)> 5권을 편찬했다. 백곡스님의 유가 스승인 신익성을 비롯한 사대부와 교분이 깊었다.

백곡스님은 인조 10년(1632) 16세 되던 해 경기도 양수리 근처 운장(백운루)에 머물며 4년간 신익성에게 유교 경전과 시문을 배웠다. 신익성은 영의정을 지낸 신흠(申欽)의 아들로 정숙옹주(貞淑翁主)와 혼인한 선조의 사위이다. 병자호란 척화오신(斥和五臣)의 한 사람으로 최명길, 김상헌, 이경여 등과 심양으로 끌려가 억류되기도 했다. 

인조가 청 황제 홍타이지(皇太極)에게 굴욕적으로 무릎을 꿇은 후 삼전도비사자관(三田渡碑寫字官)으로 추천됐지만 극구 거절했다. 이괄의 난(1624) 당시에는 궁궐을 호위하는 책임을 맡았으며, 정묘호란(1627) 때는 전주까지 세자를 호위하는 등 인조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다.

충절과 강직한 성품을 지닌 신익성에게 공부한 백곡스님은 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08년 한국미술사연구소가 주최한 학술대회에서 이태호 명지대 교수는 ‘17세기, 인·숙종기의 새로운 회화 경향 - 동회 신익성의 사생론과 실경도, 초상을 중심으로’를 통해 백곡스님의 유가 스승 신익성을 조명했다. 이 때 스님이 공부한 백운루 전경을 그린 신익성의 작품도 공개했다.

이 교수가 2015년 마로니에북스 출판사에서 펴낸 <옛 화가들은 우리 땅을 어떻게 그렸나>에도 이 작품이 실렸다. 1639년 경 신익성이 그린 <백운루도(白雲樓圖)>가 그것이다. 이 작품에는 신익성과 스님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들어있다. 어느 스님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백곡스님이 이 곳에서 공부할 때의 상황을 유추할 수는 있다. 

이태호 교수는 “정방형 연못 오른쪽으로 난 산기슭 길가에서는 두 인물이 담소를 나누는데, 복건을 쓰고 노란 심의 차림인 문인은 지팡이를 짚은 채 바위에 책을 펴놓고 걸터앉은 모습”이라면서 “이와 마주하며 지팡이를 옆구리에 낀 노승은 두 손으로 서첩을 올리며 글을 요청하는 듯 구부정한 자세”라고 설명했다.

척불의 암흑기에 임금에게 당당히 ‘간폐석교소’를 올린 백곡스님은 불교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건 선지식이었다. 최근 백곡스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연구 결과가 나오고 있다. 상소를 올린지 36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진리의 세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스님의 당당한 외침은 지금도 유효하다. 

백곡스님이 노년에 화엄산림 법사로 참여하고 입적한 김제 금산사. 숙종 9년에 인명스님 등이 백곡스님의 작품 200여편을 모아 ‘대각등계집’을 펴낸 도량이다.

■ 백곡스님이 신익성을 위해 지은 시

- 동회 선생의 옛집을 지내다.

선생의 옛집에서 통곡하노니
누가 백대(百代)의 스승이런가.
옛적에는 지음(知音)으로 즐거웠으나
오늘은 온 마음을 쏟아 슬퍼하노라.
책상 가득 놓여 있는 시서(詩書)를 보니
눈물 흘러 옷깃을 적시네.
저승은 참으로 아득히 멀리 있는데,
쓸슬히 팔애시(八哀詩)를 읽을 뿐이네.  (임재완 풀이)

- 동회 선생의 청백당 운에 따라

잠자는 흰 갈매기 놀래키면서
함께 봄 호수로 가서 작은 배를 탔었지
듣고 보는 것은 성색(聲色) 속에 내버려 두고
육신 이 몸은 유무(有無)의 양극단에 치우침을 잊었다.
비 맞은 산배나무는 가지마다 하얗고
바람에 살랑대는 언덕의 버들은 나무마다 연기로다.
구슬퍼라, 예 놀던 곳 지금은 적막한데
보이는 자연 풍경은 그 당시와 비슷하구나.  (임재완 풀이)

[불교신문3487호/2019년5월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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