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은 선교율 갖춘 총림이었네”
“지리산은 선교율 갖춘 총림이었네”
  • 박부영 상임논설위원
  • 승인 2019.07.02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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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60주년 맞이 특별기획’
伽藍과 뫼 ① 지리산 7암자

한국 사찰은 산(山)이 어머니며 고향이다. 산이 가람 그 자체다. 계곡 숲 바위가 사찰이다.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 고요 마저 화두다. 절은 산을 거스르지 않고 산은 사람에게 곁을 내준다. 유네스코가 한국 산사의 가치를 눈여겨 보고 인류 유산으로 지정했다. 절이 있어 산이 더 빛나고 살아난다. 창간 60주년을 맞아 ‘가람과 뫼’를 연재하는 이유다.

문수암 전경, 조계종 종정을 지낸 혜암스님이 복원하고 그 제자들이 수행한 유서깊은 암자다.
문수암 전경, 조계종 종정을 지낸 혜암스님이 복원하고 그 제자들이 수행한 유서깊은 암자다.

 

◇ 도솔암 영원사 상무주 문수암 삼불암 약수암 실상사

처음 찾아간 곳은 지리산이다. 지리산을 주요 사찰을 중심으로 나누면, 남원 함양의 실상사권, 천왕봉으로 직행하는 대원사권, 구례 화엄사권, 하동 쌍계사권으로 나눈다. 그 중 실상사권을 찾았다. 찾아가는 길은 실상사까지 포함하는 7암자다. 실상사 위 약수암 그리고 삼정산의 삼불암 문수암 상무주암 영원사와 도솔암이다. 이를 거꾸로 찾을 셈이다. 

지난 6월3일 실상사를 지나 백무동계곡으로 올랐다. 계곡이 아름답고 시원한 물줄기가 여름 더위를 잊게 한다. 다음날 새벽예불 시간보다 일찍 서둘러 벽소령 방향으로 길을 재촉했다. 노고단으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 음정 마을로 가면 이번에 찾아가는 7암자가 나온다. 
 

산에서 만난 이정표.
산에서 만난 이정표.

키 작은 대나무가 우거진 길은 사람의 접근을 불허하는 듯 끝없이 가로막아 섰다. 오른쪽은 낭떠러지다. 길인지 절벽인지 구분이 안간다. 아무리 가도 도솔암은 나타날 기미가 없다. 3시간은 족히 걸었다. 배도 고프고 물도 다 떨어져 거의 기진맥진 할 무렵 거짓말처럼 도솔암이 나타났다. 어둠 속에 방황하는 중생을 밝게 빛나는 빛으로 인도하는 일광보살이 나툰 듯 어둡던 숲 아래 갑자기 밝고 환한 도량이 나타났다.

그토록 찾던 도솔암이다. 도솔암 현판이 뚜렷한 주법당과 요사채로 보이는 전각과 넓고 평평한 마당에 맑고 차가운 물이 철철 흘러 넘치는 도량이었다. 다시 기운이 넘치고 환희심이 저절로 났다. 경내에 서니 천왕봉을 비롯 지리산 능선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인기척이 없지만 빈 절 같지는 않았다. 
 

청매선사가 수행했다는 도솔암.
청매선사가 수행했다는 도솔암.

◇ 밝고 환하게 빛나는 도솔암

실상사에서 만난 도법스님이 들려준 이야기에 따르면 도솔암은 청매선사가 수행하던 유서 깊은 암자다. 서산대사 제자로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3년간 왜병과 맞섰던 청매선사는 지리산에서 가장 찾기 힘든 곳에 터를 잡아 평생을 수행했다. 그 절이 바로 도솔암이다. 많은 스님들이 도솔암을 찾아 나섰다. 현재의 화엄사를 일으킨 도광스님도 그 중 한 분이었다. 도법스님에 따르면 도광스님은 청매선사가 득도했다는 오도재를 비롯 도솔암을 찾아 온 지리산을 뒤졌다 한다.

도광스님이 청매선사를 찾아 지리산을 오르내린 까닭은 선사가 수행자의 모범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즐겨 애송하고 경책으로 삼는 ‘십무익송(十無益頌)’ 게송에 선사의 풍모와 도력이 묻어난다. 청매선사가 지은 10가지 이익이 없다는 게송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마음을 돌이켜 보지 않으면 경전을 봐도 소용이 없다, 바른 법을 믿지 않으면 고행을 해도 이익이 없다. 원인을 가볍게 여기고, 결과만을 중요하게 여기면 도를 구하여도 이익이 없다. 마음이 진실하지 않으면, 교묘하게 말을 잘 해도 이익이 없다. 존재의 본질이 비어 있음을 달관하지 못하면, 좌선을 해도 이익이 없다. 아만심을 극복하지 못하면 법을 배워도 이익이 없다. 스승이 될 덕이 없으면 대중을 모아도 이익이 없다. 뱃 속에 교만이 꽉 차 있으면, 유식해도 이익이 없다. 한평생을 모나게 사는 사람은 대중과 함께 살아도 이익이 없다. 안으로 참다운 덕이 없으면, 밖으로 점잖은 행동을 해도 이익이 없다.” 

신라시대 창건하고 청매선사가 수행했다는 도솔암은 한국전쟁 때 불탄 것을 1985년 무렵 정견스님이 스승 혜암스님을 모시고 수행하며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세웠다. 도솔암을 나오니 스님이 수행 중이므로 출입을 금한다는 안내판이 붙어있다. 도솔암은 영원사 암자다. 도솔암에서 영원사까지 2km 가량 내려가야 한다. 크고 작은 돌이 깔려있는 험한 산길이 이어졌다. 도솔암에서 흐르던 물이 영원사 못 미쳐 큰 계곡을 이뤄 시원하게 흘러내렸다. 한 스님이 지게에 배낭을 올리고 산길을 올랐다. 합장 인사하고 돌아서는데 어느새 저만치 가신다. 
 

수많은 고승들이 주석했던 영원사.
수많은 고승들이 주석했던 영원사.

◇ 혜암스님 수행 전설 후학들 땀 서린 영원사 

계곡을 지나자 포장도로가 나왔다. 차가 다닌다. 이 높고 가파른 길에 차가 다니는 포장도로라니 놀랍다. 사람 키보다 훨씬 높은 영원사 안내석이 눈에 들어왔다. 그 위 가파른 언덕에 영원사가 있다. 절을 등지고 돌아보면 지리산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밝은 햇살이 두루 비치고 전망이 탁 트인 명당이다. 맑고 시원한 물이 경내 곳곳에 넘쳐 흐르고 터는 좁지만 밝고 시원하다. 마음껏 목을 축이고 빈통에 가득 채웠다. 

영원사는 신라 경문왕 때 영원조사가 창건하고 고려 예종 때 무기선사가 중창했다. 조선 중종 때 부용대사가 다시 세웠다. 영원사의 방함록 격인 <조실안록(祖室案錄)>에는 부용영관, 청허휴정, 사명유정, 청매인오 스님 등 109명의 고승들의 이름이 등재되어 있다.

100칸이 넘는 아홉 채의 전각이 있었던 영원사는 1948년 여순사건 때 소실되었다가 1971년 10년 간 상무주암에 머물던 김대일(大日) 스님이 이곳으로 와서 복원했다. 1931년 경북 경주 건천읍에서 출생한 대일스님은 인곡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1947년 사미계. 1950년 구족계를 수지하고 제방선원에서 정진했으니 혜암스님과는 사형사제 지간이다. 

영원사와 도솔암은 종정을 역임한 혜암스님을 빼고 말 할 수 없다. 영원사 인근 산과 능선 암자에는 혜암스님과 그 문손들의 땀과 발자취가 서려있다. 혜암스님 상좌인 해인총림 방장 원각 스님에 의하면 스님은 해인사 다음으로 지리산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다. 1967년 해인사 유나가 된 이듬해부터 상무주암에서 정진하며 문수암 터를 찾아 복원했으며 영원사에 머물며 도솔암을 복원했다. 정견스님 능혜스님 등 제자들이 혜암스님을 모시고 수행하며 복원불사의 손발이 됐다. 영원사는 또 독립운동가이며 강백인 백초월스님의 출가사찰로 유명하다. 그 내력이 영원사 두류선원 앞 안내판에 적혀있다. 
 

상무주암에서 바라보는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바라보는 지리산.

◇ 보조국사 지눌 수선결사 현장 상무주

영원사에서 뒷산을 오르면 상무주암 가는 길이다. 거리는 멀지 않은데 아무리 가도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길모퉁이만 돌면 내밀 것 같은데 흔적조차 없다. 길을 잘못 들어왔나 의심이 들 무렵 길 한 귀퉁이에 상무주암이라는 작은 안내판이 앉아있다. 

그래도 능선길은 아늑하고 즐겁다. 바람은 상쾌하고 아침에 지나온 지리산 능선길이 한 눈에 들어오는 절경이다. 암자는 작고 깨끗하다. 돌담을 끼고 길이 나 있고 지나던 길손 목축이라고 샘이 솟는다. 그 아래 작은 텃밭에 채소가 자라고 있었다. ‘상무주(上無住)’ 현판은 경봉스님 글씨다. 

‘지리산의 은자(隱者)’ 현기스님은 찾지 않았다. 30년 넘게 상무주암을 지키며 수행하는 현기스님은 그토록 꽁꽁 숨었는데 이제 세상이 다 안다. 향기와 송곳은 숨길 수 없다더니 스님의 법향은 지리산을 가득 채우고 넘쳤다. 불교신문 논설위원인 법념스님은 밭에서 일하는 현기스님을 보고 본지에 이런 글을 남겼다.

“얼마나 일을 많이 하고 살았는지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상일꾼보다 더 투박한 손마디엔 굳은살이 박혀있고, 바지를 걷어 올린 두 다리는 축구선수보다 더 튼실해 보였다. 가파른 산비탈을 개간해 밭을 만들자니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일하면서 공부하는 자세를 말없이 그대로 보여주었다. 낮에 그렇게 힘든 일을 하셨으니 곤히 주무시리라 여겼다. 밤중에 깨어 화장실 가려고 보니 선실(禪室)에 앉아 정진하고 계셨다. 장좌불와(長坐不臥)로 일관하며 정진한다는 걸 몰랐던 것이다. ‘아, 그래서 이불이 없었구나’하고 그제야 알았다.”
 

문수암 천인굴 임진왜란 때의 전설이 서려있다.
문수암 천인굴 임진왜란 때의 전설이 서려있다.

◇ 혜암스님 도봉스님 수행했던 문수암, 그리고 삼불암 

‘땅에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라’는 정혜결사문의 첫 머리를 상기하며 문수암으로 발길을 돌렸다. 평상이 놓인 왼쪽 아래 길이 문수암 가는 길이다. 문수암까지는 약 1km, 그러나 돌산은 지칠대로 지친 몸으로 지나기에는 너무 큰 장애였다. 몇 번을 오르내리고 산허리를 돌았을까? 앞이 확 트이며 작은 암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솔암을 처음 접하던 환희 그대로였다. 힘들고 지친 몸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 씻은 듯 나았다.

문수암 역시 혜암스님의 자취가 어린 유서 깊은 암자다. 혜암스님은 젊을 적 사라진 문수암 터를 발견하고 1965년 다시 세웠다. 그 후 비구니 스님이 20여년 머물렀으며 도솔암에 있던 혜암스님의 상좌 도봉스님이 1984년부터 30여년 간 지켰다. 지리산에서 천왕봉이 보이지 않는 유일한 곳으로 가야산이 들어온다. 혜암스님이 이곳을 찾은 이유도 그 때문일까? 문수암 현판도 상무주암처럼 경봉스님 글씨다.  
 

삼불암 전경.
삼불암 전경.

1686년 숙종 12년에 우담 정시한이 지리산과 덕유산을 유람하고 쓴 ‘산중일기’에는 천인암(千人庵)이 나온다. 우담은 벽송사를 비롯한 서암 등 그 일원을 들른 뒤 마천으로 해서 견성암을 거쳐 상무주까지 올라 천인암 상고대를 들러 실상사에 도착했다. 우담이 걸은 동선을 보면 천인암이 곧 문수암이다. 문수암에는 임진왜란 때 난을 피해 찾아온 천명이 살았다는 천인굴이 있다. 약수가 흘러내리는 천연굴이다. 

다시 1km 가량 가면 삼불암이다. 상무주에서 문수암 가는 길처럼 온통 돌산이다. 삼불주라고도 한다. 삼불암 역시 전망이 탁 트인 절경을 자랑한다. 문수암 삼불암 모두 좋은 전망에 작은 텃밭 터가 있을 정도의 평평한 공간을 가진, 암자로 손색이 없다. 공부 열심히 하는 스님들 위해 불보살님들이 점지해 주셨는지 이 넓은 지리산에서 스님들은 어떻게 이런 아란야를 찾았을까 궁금했다. 
 

삼불암의 지게.
삼불암의 지게.
구산선문 수행처 약수암.
구산선문 수행처 약수암.

◇ 구산선문 수행처 약수암 

이곳에서 약수암까지는 다시 3km 거리다. 2시간을 달렸을까? 실상사까지 2km 남았다는 안내판이 보였다. 왼쪽에서 불빛이 보이더니 사람 소리가 난다. 약수암이다. 그런데 길이 막혔다. 등산객들이 약수암에서 재배하는 채소나 약초밭을 함부로 밟고 다녀 이를 금지하는 안내판과 함께 가로막을 설치한 것이다.

상대방을 배려하면 더 즐거운 산행이 될 터인데 간혹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등산객들이 적지 않다. 깊고 험한 산중에서 사람의 손과 발이 만든 암자는 피난처며 휴식처다. 종교를 떠나 산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암자도 사랑하고 아끼면 안될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주지 스님의 허가를 얻어 약수암으로 들어갔다. 인사를 드리는데 직지사 주지를 역임하신 흥선스님이다. 2년 전에 오셨단다. 10여년 전에 비해 도량이 깔끔하게 정비됐다. 

실상사 산내암자 약수암은 백장암과 더불어 구산선문 실상사파의 수행처로 100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정조 때 조성한 목조탱화가 유명하다.  
 

실상사 전경.
실상사 전경.

◇ 사부대중 공동체 실상사

다음 날 아침 실상사를 찾았다. 마침 도법스님이 공양 마치고 경내를 거닐다 만났다. 전날 6암자를 들렀다고 하니 도솔암에 얽힌 이야기를 전해주신다. 청매스님에 얽힌 일화, 청매스님의 수행처를 찾아 나섰던 화엄사 도광스님 이야기 등 역시 지리산 산지기답게 풍부한 역사를 들려주셨다. 

실상사는 구산선문(九山禪門) 최초 가람이다. 냇물이 흐르고 넓은 논이 펼쳐져 평지로 보이지만 고도가 높은 고원이다. 만수천을 끼고 동으로 천왕봉과 마주하고 남쪽은 반야봉, 서쪽은 심원 달궁, 북쪽은 덕유산맥의 수청산 등이 병풍처럼 둘러 쌓인 천하 명당이다.

신라 흥덕왕3년(서기 828년) 증각대사 홍척(洪陟)이 당나라에 유학, 지장의 문하에서 선법(禪法)을 배운 뒤 귀국했다가 선정처(禪定處)를 찾아 2년 동안 전국의 산을 다닌 끝에 현재의 자리에 발길을 멈추고 창건했다. 실상사는 6·25를 맞아 낮에는 국군, 밤에는 공비들이 점거하는 등 또 한차례 수난을 겪게 됐는데 용케도 사찰만은 전화를 입지 않았다. 

지금의 실상사는 사부대중이 함께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고 일하며 생활하는 사부대중공동체다. 전형적인 산골 오지 마을이던 실상사 주변은 실상사로 인해 인구가 늘어났다. 귀농학교를 통해 정착한 농부와 생명평화살림을 운영하는 실무자들, 대안학교인 작은학교 교사 학부모 등 많은 도시인들이 실상사 품을 찾아 왔다. 이 모두 부처님 가르침으로 함께 더불어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발원한 도법스님 덕분이다.
 

실상사 장승.
실상사 장승.

 

◼ 조계종 산실 수선결사와 지리산

지눌, 상무주서 오도…정혜결사 열다

널리 알려진 것 처럼 상무주암은 오늘날 조계종을 새롭게 일으킨 지눌의 수선결사가 싹을 틔운 역사의 현장이다. 수선결사는 무신집권기와 몽고군 침략으로 이어지는 극심한 사회 혼란기를 극복하기 위한 사회개혁운동이었으며, 점점 타락해가는 고려불교를 재건하려는 불교혁신운동이었다. 그 정신은 오늘날 한국불교에 고스란히 스며있다. 그 싹이 바로 상무주에서 자랐다.

1188년 31세에 대구 팔공산 거조암에서 정혜결사를 결성한 지눌은 10년 만인 1198년 상무주암으로 왔다. 몇 사람의 선도반과 가사 세벌 바리 때 하나만 지녔다고 한다. “부지런히 수행하여 허송한 적이 없으나 아직 정견(情見)이 사라지지 아니하여, 마치 어떤 물건이 가슴에 걸려 원수와 함께 있는 것처럼 항상 꺼림칙해서”라며 공부를 갈망하던 지눌이 상무주암을 찾은 이유다. 
 

각운스님의 이야기가 담긴 3층탑과 상무주암.
각운스님의 이야기가 담긴 3층탑과 상무주암.

3년 간 상무주에서 정진한 지눌은 대혜보각선사의 어록을 보다가 “선이란 고요한 곳에도 있지 않고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으며 날마다 반연(攀緣)에 응하는 곳에도 있지 않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그 어느 곳에도 있지 않다”라는 구절에 이르러 오도했다. 지리산을 내려온 지눌의 결사는 길상사에서 본격적으로 불이 붙어 활활 타올라 고려불교를 혁신하고 조선을 거쳐 오늘날 조계종에 이르렀다. 

상무주에서 만나는 삼층석탑은 ‘선문염송설화’ 30권을 저술한 각운스님의 필단사리탑(筆端舍利塔)이다. 보조국사의 맥을 이은 각운스님은 이곳에서 <선문염송설화> 30권을 저술했는데 저술을 마치자 붓통 속에 사리가 갑자기 떨어졌다. 그 사리를 봉안한 탑이다. 
 

지리산능선에서 바라본 전경.
지리산능선에서 바라본 전경.

◼ 지리산과 불교

수많은 고찰 고승 자취 깃들어

지리산(智異山)은 불교 산이다. 구산선문 최초 가람 실상사, 수선결사의 싹이 텄던 상무주암, 조선시대 총림 역할을 하며 현대 한국불교 가교를 놓았던 벽송지엄대사가 창건한 벽송사, 석남사 견성암과 함께 우리나라 대표 비구니 참선도량이며 성철스님이 처음 수행했던 대원사, 범패 차의 도량 하동 쌍계사, 한국 계맥을 되살린 칠불암, 화엄불교의 산실 화엄사….

일일이 거론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봉우리 계곡 암벽마다 고승의 자취가 서리지 않은 곳이 없고 가람 곳곳에 이 땅 불교 역사가 짙게 드리운다. 이름 자체가 불교에서 나왔다.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舍利菩薩)의 지(智)와 리(利)를 따 지리산이라 불렀으니 주봉도 천왕봉이 아니라 문수보살이 중생 제도를 위해 근기에 맞춰 나툰 반야봉이다. 

지리산은 민족의 산이다. 높은 봉우리 깊은 계곡 풍부한 수량 울창한 삼림 3개도 6개 시군에 걸친 광대한 품은 버림받고 핍박받는 민초들을 끌어안았다. 나라 잃은 백제 유민이 몸을 숨긴곳, 세상 잡사를 피해 찾아든 도인들, 일본군에 쫓긴 동학군이 몸을 숨긴 곳, 일제 식민지에 저항했던 의병의 저항지,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한 학도병이 찾아든 곳, 빨치산의 활동무대, 심지어 고려군에 쫓긴 왜군 마저 지리산에 몸을 의탁했다. 

신동엽은 이들을 일러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이라고 했다.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이/산으로 갔어요/뼛섬은 썩어/꽃 죽 널리도록/남햇가/두고 온 마을에선 /언제인가, 눈 먼 식구들이/굶고 있다고 담배를 말으며/당신은 쓸쓸히 웃었지요.” (진달래산천 중)
 

백무동계곡 모습.
백무동계곡 모습.

지리산=박부영 상임논설위원 chisan@ibulgyo.com

[불교신문3500호/2019년7월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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