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금빛 고기가 佛法을 높이 세웠다
하늘 금빛 고기가 佛法을 높이 세웠다
  • 박부영 상임논설위원
  • 승인 2019.08.05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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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60주년 맞이 특별기획’
[伽藍과 뫼] ② 금정산 11암자

금정산(金井山)은 부산의 주산이다. 산 정상 바위에 샘(井)이 있어 그 물 안에서 금빛 나는 물고기가 오색 구름을 타고 내려와 놀았다고 해서 금정(金井)이다. 7월17일 새벽 새벽예불 도량석이 시작될 무렵 금정산을 찾았다. 도시에 위치한 산사(山寺)답게 여명(黎明)도 비치기 전 인데 운동 나온 주민들로 산이 깨어나고 있었다. 범어사는 주변에 10 암자가 함께 한다.

금정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미륵암 전경을 드론으로 촬영했다.
금정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미륵암 전경을 드론으로 촬영했다.

 

◇ 범어사와 10 암자 지장암에서 출발하다

가장 먼저 만나는 암자는 지장암(地藏菴)이다. 경동 아파트 뒤편 범어사 입구 못 미쳐 자리했다. 1916년 금서암이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 일제가 대처승으로 본사 주지를 임명할 때도 범어사만이 비구승을 고수했으며, 구한말에 경허스님이 주석하며 선을 일으킬 정도로 민족의식과 선가풍이 철저한 선찰이었다. 일제강점기 불교계 민족독립 운동을 주도한 스님들도 대부분 범어사 출신이었다.

동래읍성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 주도층도 조선어학회 사건도 범어사 스님들이 이끌었다. 그 때문에 많은 스님들이 일제에 의해 투옥되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자 범어사 안에서는 금서암이 봉황의 혈을 끊었기 때문이라는 엉뚱한 말이 번졌다. 금서암을 창건한 곤택스님이 사라지고 암자도 폐사 됐다. 1985년 범어사 주지 지효스님이 중창해 오늘에 이른다.  

밖은 아직 캄캄한데 용왕전 안 불빛이 환하다. 합장하고 산신각으로 올라섰다. 산신각 뒤로 난 길을 가면 범어사 입구로 향하는 둘레 길이다. 20분 가량 걷자 범어사 매표소가 보인다. 여기서 산으로 향하면 계명암(鷄鳴庵) 가는 길이다. 
 

지장암에서 만난 불상.
지장암에서 만난 불상.
계명암에서 바라본 남산동 일원. 금정 팔경에 들어가는 장관이다.
계명암에서 바라본 남산동 일원. 금정 팔경에 들어가는 장관이다.

◇ 닭울음처럼 무명을 벗는 계명암 

그러나 지금은 희미하게 자취만 남았다. 아마 등산객들이 만든 자취일 것이다. 사방으로 길이 나 어느 쪽으로 가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그 사이 날이 많이 밝았다. 어느새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이번 금정산 암자 탐방 중에 지장암에서 계명암 가는 길이 가장 험하고 어려웠다. 간신히 계명암 일주문에 다다랐다. 순간 큰 절에서 치는 새벽 종소리가 장엄하게 울려 퍼졌다.

불교에서 ‘닭울음 소리’(鷄鳴)는 깨달음을 의미한다. 깨달음이란 어둠에서 벗어나 빛을 맞는 상태와 같다. 어둠은 무명(無明)이고 깨달음은 광명이다. 어둠이 걷히는 순간을 알리는 소리가 새벽 닭 울음이다. 그래서인가 조선 500년 억불정책으로 선풍이 무너지고 간신히 목숨만 부지하던 한국선이 긴 밤을 벗어나 여명을 밝히는 무대가 범어사에서 시작했다. 

1902년 4월 스님 17명이 모여 계명선사(鷄鳴禪社)라는 선원을 개설하고, 이듬해 한국선불교 중흥조 경허스님이 주석하며 선풍(禪風)을 진작시켰다. 경허스님이 주석하며 선을 지도할 때 40여명의 대중이 살았다고 한다. 만공스님도 이 곳에서 수행했으며 재가자들도 수선(修禪)회를 만들어 정진한다. 금정산의 대표적 풍광 금정팔경(金井八景)에 ‘계명암의 가을 달’인 ‘계명추월(鷄鳴秋月)’이 있다. 계명암 경내에서 바라보는 부산 남산동 일대와 금정산은 가히 장관이다. 보덕굴이 주법당이다. 주련과 벽화가 한글이라서 더 반갑다. 
 

양익스님 금강영관 산실 청련암.
양익스님 금강영관 산실 청련암.

◇ 몸과 마음 호흡 일체 청련암

가파른 계명암 길을 내려와 왼쪽으로 가면 범어사다. 오른쪽 금정산으로 발길을 돌리면 청련암 내원암이 차례로 나온다. 청련암(靑蓮庵)은 불교전통무술 ‘불교금강영관’의 본산으로 유명하다. 동산스님 상좌 양익스님이 1971년 범어사 극락암에 연수원을 설립하고 불교무술 지도법을 개발하면서 시작하여 1978년 청련암에 금강영관수련원을 개설하여 본격적으로 불교무술을 지도했다. 새벽예불이 끝나면 금정산을 향해 밤중에 바위를 딛고 뛰어 넘는 험난한 훈련을 했으며 아침공양 후 2시간 스승과 제자들이 함께 수련했다고 한다.  

‘불교금강영관’은 부처님으로부터 면면히 이어온 승가의 전통 수행법으로, 몸과 마음과 호흡의 조화를 통해 심신의 안정과 깨달음을 구하는 수행법이다. 일제강점기 맥이 끊긴 후 1960년대 들어 양익스님이 전승했고 제자인 설기준 스님이 대중에 보급하면서 선무도라는 명칭을 얻게 됐다. 법당에서는 새벽 예불 올리는 스님의 독경소리가 청아하게 울려 퍼진다. 예불 마치고 나오는 남성 불자를 붙들고 물어보니 “청련암에서는 이제 불무도를 지도하지 않는다”고 한다. 
 

범어사 어른으로 존경받는 능가스님이 주석하는 내원암.
범어사 어른으로 존경받는 능가스님이 주석하는 내원암.
선농일치 총림 꿈이 담긴 내원암 농장.
선농일치 총림 꿈이 담긴 내원암 농장.

◇ 선농일치 정신 보여주는 내원암 농장

청련암을 나와 다시 올라가면 내원암이다. 산중 어른이신 능가스님이 계시는 곳이다. 종회의원 무관스님이 산책을 나갔다 들어오는 길에 만나 차를 주셨다. 내원암은 경허스님이 선원을 열었고 성철스님도 공부했었던 선도량이다. 지효스님은 이곳에 선농일치의 총림정신을 살리려 농장을 개설했다. 중국에서 발원한 선(禪)은 부처님 당시 인도의 유행(流行) 걸식 전통을 정주 자급자족으로 바꾸었다.

그리하여 가람에는 부엌, 창고 등 정주 농경생활에 합당한 건물이 들어섰다. 농사를 집전하는 소임도 생겼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선농일치(禪農一致) 전통이 확립됐다. 동산스님과 지효스님은 범어사를 선농일치 정신에 따라 청규를 엄격히 지키는 총림으로 만들고자 했다. 내원암 뒤편에 수만평의 농장을 개설한 이유다. 지금 농장은 범어사 복지 활동에 쓰인다. 
 

마애불 전경.
마애불 전경.

◇ 낙동강 내려보는 마애불 

내원암과 농장을 지나면 금정산 정상으로 향하는 산길이 이어진다. 트럭이 넉넉히 지날 정도로 길이 잘 놓여있다. 바깥은 햇볕이 뜨겁게 내리 쬐는데 숲 속은 찬 기운이 느껴질 정도였다. 잘 정비된 길이 계속 이어졌다. 금정산 최정상 고당봉으로 가다 낙동강이 바라 보이는 양산 방향으로 내려가면 고려시대 조성한 마애불이 나온다. 가파른 계단을 따라 가면 낙동강을 내려다 보고 선 마애불에 저절로 합장 인사를 올린다. 계단과 주변을 정비하느라 공사 장비가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마애불을 친견하고 다시 고당봉으로 올라간다. 숲이 사라지고 봉우리가 우뚝하다. 철계단을 따라 올라 정상에 서니 지나온 금정산과 낙동강 주변, 금정산성, 광안리와 동해안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바람에 세차게 불고 물안개가 자욱했다. 금정산 최고봉 답다. 

고당봉에서 내려와 금샘을 들른 뒤 미륵암(彌勒庵)으로 간다. 고당봉에서 미륵암 까지 2km 가량 떨어져 있다. 금정산 정상 부근에 있는 유일한 암자다. 미륵암을 빼면 모든 암자가 범어사 주변에 밀집해 있다. 원효암만 범어사에서 2km 가량 위 쪽이다. 미륵암은 금정산성 북문에서 800m 가량 떨어져 있어 접근이 쉽다. 북문까지 차가 다닌다. 
 

3·1 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품고 넘어왔던 금정산성 북문.
3·1 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품고 넘어왔던 금정산성 북문.

◇ 수많은 전설 담은 미륵암

미륵봉이 후불탱화처럼 장엄하는 미륵암은 아늑하고 평화롭다. 미륵암에는 많은 이야기가 전한다. 미륵봉 아래 바위 굴 속 연못에 이무기가 살다가 용으로 승천한 곳에 678년 원효대사가 창건했다. 

미륵암이라는 이름은 주법당 염화전 뒤 암봉이 화관을 쓴 미륵불처럼 생겨 선량한 기운을 준다고 해서 지었다. 암봉을 자세히 보면 코끼리 형상을 하는 바위 7개가 있는데 코끼리는 상서로운 동물이어서 마음이 맑아야 보인다고 한다. 

경내에 노적(露積)가리 바위가 산문 대신 염화전 좌우측에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이 절을 찾는 사람은 양식 걱정 없고 절대 굶어죽지 않는다고 한다.  

미륵봉으로 난 계단을 올라가면 독성각이 아슬하게 걸쳐 있다. 그 뒤 바위 면에 원효대사가 손가락으로 그렸다는 마애불이 남아 있고 호로병 5개로 왜적 5만을 물리쳤다는 전설과 왜적 첩자를 유인하기 위해 장군기를 꽂았다는 미륵불 바위 등 작은 암자 이지만 이야기가 넘친다. 보물 찾기 하듯 경내 곳곳을 다니며 찾는 재미가 쏠쏠하다. 

지금의 절은 동산스님 상좌인 백운스님이 중창하고 현 주지 진우스님(불교신문 사장)이 그 뒤를 이었다. 백운스님은 범어사 강사를 지낸 강백이다. ‘양치는 성자’ ‘진묵대사’ ‘부설거사’ 등 고승과 불교 교리를 쉽고 흥미롭게 정리한 대중서를 다수 펴냈다. 두 스님의 독경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진다. 등산복 차림의 몇몇 신도들도 독성각 등 각 전각에서 기도를 올린다. 한 여름 뜨거운 날씨와 달리 금정산 위는 시원하다. 

신도와 등산객들도 내려가기 싫은 듯 오랫동안 미륵암을 오가며 기도하고 물 마시고 한가로운 시간을 보낸다. 

미륵암을 내려가면 금정산성 북문이다. 물에 얽힌 산 답게 곳곳에 차고 깨끗한 물이 넘쳤다. 북문 정상 샘 이름이 세심정(洗心井)이다. 세심정은 원효대사가 화엄경을 설했다 하여 화엄벌이라고 했다. 금정산성 방어를 위해 범어사 국청사 해월사 등의 스님들이 훈련한 승병 훈령장이기도 했다. 금정산성이 고당봉에서 아래로 향하다 다시 원효봉으로 상승하는 길목에 북문이 있다.

이 문을 내려가면 범어사다. 1919년 2월28일 밤 서울에서 만해 한용운스님으로부터 받은 3·1독립선언문을 품은 학승들은 밤새 경부선을 타고 물금역에서 내렸다. 스님들은 고당봉을 넘어 화엄벌을 지나 이 북문을 통해 청련암으로 갔다. 범어사 스님들이 주도한 동래 3·1 만세운동은 그렇게 시작됐다. 
 

원효암 서쪽 삼층석탑.
원효암 서쪽 삼층석탑.

◇ 장좌불와의 신화 지유 방장 스님 

북문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암자는 원효암(元曉庵)이다. 원효대사가 미륵암과 함께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통일 후 신라가 처음 건립한 사찰이라는 학설도 있다. 그 증표가 이 절에 있는 두 기의 삼층석탑이다. 금정산 곳곳에 서린 원효 대사의 자취와 함께 의상대사의 그림자도 짙다. 범어사는 의상대사가 창건한 화엄 십찰(十刹)이다. 원효암 주변에도 원효가 참선 수행했다는 원효석대와 의상대가 있으니 한국 불교 사상과 신앙사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두 고승은 금정산에서 살아 숨 쉰다.  

원효암은 금정총림 방장 지유스님 때문에 오래전부터 산내 암자 중에서도 많은 명성을 떨쳤다. 동산스님 상좌인 지유스님은 스님과 재가자들의 존경을 받는 선지식이다. 장좌불와 수행은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늘 정갈하면서 소박한 경내는 발 걸음 마저 숨죽이게 한다.  

원효암 싸리문을 나와 의상대에 서니 청룡동 남산동 일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 기장 해운대도 손에 잡힌다. 뒤를 돌아보니 고당봉 원효봉이 내려본다. 
 

한글 현판이 눈길을 끄는 금강암.
한글 현판이 눈길을 끄는 금강암.

◇ 영남선원 효시 금강암

원효암에서 산길을 따라가면 금강암이 나온다. 범어사에서 원효암을 오갈 때는 이 길을 이용하지만 북문에서 내려오면 여간 힘들지 않다. 환경보호 차원에서 원효암 가는 길을 모두 막아 원효봉 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거나 범어사 까지 내려가서 다시 올라야 한다. 

원효암에서 금강암에 이르는 오솔길은 멀지도, 험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늘 물안개에 쌓여 신비감을 준다. 명상을 하며 오가기에 더 할 나위 없다. 금강암에 들어서니 많은 사람들이 오간다. 외국인들도 많았다. 금정산에서 발원한 물이 돌 사이를 시원하게 흐른다. 금정산성 북문에서 범어사 입구 등나무 군락지 까지 놓여있는 수많은 돌을 일러 범어사 돌바다(암괴류)라고 한다.

폭 70m, 길이 2.5km가량의 바위들이 쌓여 이루어졌다. 갈라진 틈을 따라 물이 스며들면 얼고 녹는 과정을 거쳐 깨어지고 오랜 시간에 걸쳐 주저앉으면서 만들어졌다. 돌 밑으로 흐른 물이 대성암(大聖庵) 각해선림 구들장 아래로 숨어 흐르는데 그 물소리가 선의 경지에서 듣는 불심이라고 해서 ‘대성은수(大聖隱水)’라 한다. 금정8경 중 하나다. 

시원하게 흐르는 물을 건너 금강암으로 들어서니 한글 주련이 눈에 들어온다. 큰 법당 이름도 주련도 모두 한글이다. 금강암은 범어사 주지를 지낸 벽파스님이 중창했다. 한글 현판 주련도 벽파스님의 뜻을 받아 정여스님(전 범어사 주지)이 걸었다. 1803년(순조 3) 대성암(大聖庵)과 함께 취규(就奎) 대사가 중창했다는 금강암은 선찰 대본산 범어사 선의 출발지며 효시다.

간화선을 종지종풍으로 삼는 조계종의 출발은 범어사에 닿고 그 시작이 금강암에서 비롯됐다. 1899년 오성월(吳惺月)스님이 이곳에 처음으로 선원을 개설하고 수옹 월성스님 등 일곱 명의 납자가 동안거를 원만 성취하였으니 곧 영남선원의 효시다. 
 

비구니선원 대성암 각해선림.
비구니선원 대성암 각해선림.

◇ 비구니 선원 대표하는 대성암 

금강암 옆 대성암은 조선 숙종 6년(1680) 준영 스님이 창건하고 1747년 극존 스님이 중수한 고찰이다. 대성암(大聖庵)은 한국을 대표하는 비구니 선원이다. 대성암에 선원을 처음 개설한 것은 1909년 10월 찬훈스님이 16명의 납자들과 동안거를 나면서다. 당시 범어사는 금강암 선원을 시작으로 4곳의 선원을 둘 정도로 선찰로 명성을 날렸다.

그래도 수행공간이 부족해 주지 오성월스님이 선원을 개설하고 각해선림(覺海禪林)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초기에는 대성선사(大聖禪寺)였다가 정화 이후 대성암 선원으로 개칭했다. 한국전쟁으로 전각이 심하게 퇴락했던 암자를 1987년 비구니 자행 스님이 도량을 넓히고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시작하여 1991년 회항했다.

대성암이 비구니 선원을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은 1955년 만공 스님의 법을 이은 비구니 만성(萬性) 스님이 주석하면서다. 당시 운허스님이 이곳에서 선의 요체를 담은 <능엄경>을 강의하기도 했다. 1960년대 비구니계 대종장 선경 스님이 수선 안거에 들었으며, 엄한 계율과 정진으로 비구니 납자를 양성하는 요람으로 드날렸다. 제자들에 의하면 만성스님은 포교와 불사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깨달음을 위한 자기 공부라며 오로지 참선 수행만을 강조하였다.

모든 수행을 무언의 실천으로 보여주며 납자들에게 용맹심을 불어 넣었던 만성 스님은 혼 침에 빠질까 염려되어 대성암에는 이불을 두지 않을 정도로 자신에게 철저하고 엄격하였으며, 평생을 수행과 후학의 탁마로 보냈다고 한다. 경내에 깔린 자갈 밟는 소리가 천지를 울리는 천둥처럼 크게 들릴 만큼 경내는 고요했다. 각해선림에는 하안거 결제를 나는 수좌 스님들의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만성암 전경.
만성암 전경.

◇ 총림 면모 갖춘 범어사 

대성암 옆은 안양암이다. 다른 암자와 달리 ‘일반인 출입금지’ 푯말이 선명하다. 방장 지유스님이 주석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안양암 역시 금강암 대성암 원효암처럼 조선 후기 오성월스님이 범어사에 선원을 열 때 함께 한 수선도량이다. 1899년 금강암에 이어 1900년 안양암에 두 번째 선원 안양선사(安養禪社)를 개설했다. 

문 앞 입구에서 합장 인사 올리고 돌아서 나와 범어사로 들어갔다. 많은 스님과 신도가 경내에 운집했다. 대웅전에는 기도 올리는 신도로 가득 찼다. 그 옆에서는 스님의 강의를 듣고 있다. 만세루에는 스님들이 참선 정진 중이다. 이 날은 보름 자자 포살 일이었다. 최근 범어사는 수행 가풍이 살아 숨 쉰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눈으로 확인하고 보니 감격스러웠다. 어른스님들 각별히 모시고 사찰을 지키며 새벽예불, 대중공양 하며 늘 솔선수범하는 주지스님 덕분이라고 암자에서 만난 스님이 귀띔했다. 

만성암은 범어사를 나와 등나무군락지를 지나면 나온다. 주변에 식당이 많아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가는 길에 한참 마지막 공사 중인 범어사 템플스테이관을 만난다. 만성암은 비구니 스님들 수행 도량이다. 포대화상이 절 입구에서 오는 방문객을 반갑게 맞이한다. 오른편 대나무 숲이 인상적이다. 금빛으로 단청한 대웅전이 눈길을 끈다. 10년 전 만성암 부근이 범어사 남쪽 경계임을 알리는 비석이 발견됐다.

고려시대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금정산내 범어사 토지 경계 석표는 그동안, 동쪽 계명봉, 서쪽 원효봉, 북쪽 고당봉 경계 지점에서 석표가 확인됐지만 남쪽만 발견되지 않았는데 30년간 금정산을 돌아다니며 150여 만 평 범어사 토지의 경계 석표 9기를 찾아냈던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 주영택 원장이 남쪽 석표를 발견한 것이다. 표석과 관계없이 범어사 경내와 멀리 떨어진 이 곳을 어떻게 알고 암자를 세웠을까? 스님들의 안목이 놀랍다.

금정산을 내려오는데 비가 내린다. 뜨거웠던 금정산 아래 마을을 시원하게 적시는 반가운 비였다. 

공부 마치고 돌아가는 신도들.
공부 마치고 돌아가는 신도들.

 

◼ 선찰대본산 범어사
암자 마다 선원…한국 선 이끌다

선찰대본산 범어사 일주문.
선찰대본산 범어사 일주문.

조계문(일주문)에 당당히 내 건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 편액처럼 범어사는 선의 본산이다. 1898년 성월(惺月)스님 초청으로 범어사에 온 경허스님(1846∼1912)이 수선결사(修禪結社)를 한 이래 암자 곳곳에 선원이 들어서고 납자들이 가행 정진했다. 

1899년 10월1일 금강암에서 금강선사(金剛禪社)가 가장 먼저 문을 열고 1900년 10월 안양암에서 안양선사(安養禪社), 1901년 4월 내원암에서 내원선사, 1902년 계명암에서 계명선사가 잇따랐다. 

1909년에는 범어사의 안심료. 원응료. 금당 등 세 곳을 합쳐 금어선원 전신인 원응선사(圓應禪社)를 열었으니 곧 한국 근대선의 뿌리다. 이러한 역사를 인정받아 1913년 선찰대본산이 됐다. 한국 선이 범어사에서 비롯돼 오늘에 이른 것이다. 범어사가 선찰대본산 위상을 간직한 것은 근대에 이어 동산스님(1890~1965)이 주석하며 수많은 납자들을 지도했기 때문이다. 

총림의 위상을 갖고도 오랫동안 뜻을 못 이루다 지난 2012년 총림으로 승격되고 초대 방장으로 지유스님을 모셨다.
 

◼ 고당봉 이름에 얽힌 사연
‘화엄일승’ 법 높이 세운다는 의미

고당봉 정상에서 바라본 모습.
고당봉 정상에서 바라본 모습.

금정산에서 가장 높은 고당봉은 무슨 뜻일까? 고당이라는 뜻을 놓고 한 참 동안 설왕설래했다. 가장 보편적으로 쓰인 단어는 고당(姑堂)이다. 지금도 고당봉 아래 현판은 이 표현을 쓴다. 고당(姑堂)은 ‘삼신할매’라는 뜻이다. 

그러나 1994년 고당이 한자로 ‘高幢’이라고 금정구청이 공식 발표했다. 당시 금정구청은 고당봉은 그간 ‘高幢峰’ ‘高檀峰’ ‘高潭峰’ ‘姑堂峰’ ‘姑黨峰’ 등 5가지 명칭이 혼용되어 왔으나 지역주민과 학교의 의견을 수렴 최종적으로 ‘高幢峰’으로 통일한다고 밝혔다. 근거는 ‘동국여지승람’ ‘동래부지’ 등 유학자들이 쓴 기록이다. 고당(高幢)은 ‘부처님 법을 널리 편다’는 뜻이다. 

금정팔경(金井八景) 중에 고당봉 산허리를 휘감고 도는 운해 라는 뜻의 고당귀운(高幢歸雲)이 있는데 이는 범어사 창건설화에서 유래했다. 통일을 했지만 북으로는 당나라 남에서는 왜적의 침입 걱정에 노심초사하는 신라 문무왕이 ‘의상화상을 모시고 동국해변의 금정산에서 7일 7야 동안 화엄신중을 독성하면, 그 정성에 따라 미륵여래가 금색신으로 화현하고 동해에 임하여 제압하여 왜병이 자연히 물러갈 것’이라는 꿈을 꾼다. 그리하여 문무왕이 금정산에서 칠일밤 칠일낮 일심으로 독경하여 부처님의 최고의 가르침 ‘화엄일승’의 법을 세웠다. 문무왕이 기도한 곳이 고당봉이다. 

지금 고당봉에는 한글 비석이 서 있다.

금정산 범어사=박부영 상임논설위원 chisan@ibulgyo.com

[불교신문3508호/2019년7월3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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