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복에서 참선하다 죽어라” 계곡 능선마다 禪院
운부암 상서러운 기운에 만물 솟구치니 백흥이라

묘봉암 가는 길에서 본 중암암.
묘봉암 가는 길에서 본 중암암.

팔공산(八公山)은 대구와 그 인근 경북을 아우르는 명산이다. 왕건이 견훤 군대에 쫓겨 목숨이 위태로울 때 여덟명의 충신이 목숨을 대신 바쳐 살아났다 하여 그 공을 기려 팔공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동화사 파계사 부인사 은해사 거조암 제2석굴암이라 부르는 군위 삼존석굴 등 수없는 고찰이 즐비한 불국토다. 대학입시 철이면 전국의 수험생 부모가 몰린다는 갓바위 부처님이 팔공산 능선에 자리하고 있다. 

팔공산은 여러 권역으로 나뉘지만 크게 동화사와 그 주변 암자, 은해사와 6암자로 구분할 수 있다. 지난 9월18, 19일 은해사와 주변 암자를 찾아 팔공산을 누볐다. 

조계종 제10 교구본사 은해사는 재론이 필요 없는 대찰이다. 일제 강점기에도 31본산 중 하나였으며 경북 5대 본산, 조선 4대 부찰(富刹)로 불렸다. 신라 헌덕왕 1년(809)에 창건한 은해사는 만년의 추사의 자취를 만끽할 수 있다.

추사는 1848년 12월 제주도 귀양길에서 풀려나 이듬해 64세의 나이로 한양에 돌아오지만 2년 여 뒤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 사건에 연루돼 함경도 북청으로 다시 유배 길에 오른다. 그 짧은 서울 생활 동안 쓴 작품 다섯 점이 은해사에 남아있다. 
 

추사가 쓴 은해사 보화루.
추사가 쓴 은해사 보화루.

◇ 만년의 추사 자취 만나는 은해사 

1862년 혼허지조스님은 ‘은해사 중건기’에서 “대웅전 보화루 불광각 세 편액은 모두 추사 김상공(金相公)의 묵묘(墨妙)”라고 했으며, 1879년 당시 영천군수 이학래가 쓴 ‘은해사연혁변’에는 “문의 편액인 은해사, 불당의 대웅전, 종각의 보화루가 모두 추사 김시랑(金侍郞)의 글씨이며 노전의 일로향각(一爐香閣)이란 글씨 또한 추사의 예서이다”라고 했다.

언급된 글씨는 지금 모두 은해사가 소장하고 있다. ‘추사체’라 불리는 자유 분방하면서도 기개가 넘치는 독창적 글씨체를 만든 추사의 글씨는 9년간 제주도 유배생활을 통해 완성되었으니, 은해사에 전해오는 글씨야 말로 절정에 이른 추사체 정수라 할 수 있다. 

간송미술관 최완수 선생은 은해사(銀海寺) 글씨를 일러 “무르익을 대로 익어 모두가 허술한 듯 한데 어디에서도 빈틈을 찾을 수가 없다. 둥글 둥글 원만한 필획이건만 마치 철근은 구부려 놓은 듯 한 힘이 있고 뭉툭뭉툭 아무렇게나 붓을 대고 뗀 것 같은데 기수(起收)의 법칙에서 벗어난 곳이 없다. 얼핏 결구에 무관심한 듯 하지만 필획의 태세변화와 공간배분이 그렇게 절묘할 수가 없다”고 평했다. 

은해사라는 이름은 불, 보살, 나한 등이 중중무진으로 계신 것처럼 웅장한 모습이 마치 은빛 바다가 춤추는 극락정토 같다 하여 붙여졌다. 또 은해사 주변에 안개가 끼고 구름이 피어 날 때면 그 광경이 은빛 바다가 물결치는 듯 하다고 해서 은해사라고도 한다. 신라의 진표율사는 한 길 은색 세계가 마치 바다처럼 겹겹이 펼쳐져 있다(一道銀色世界 如海重重)라고 표현했다. 
 

운부암 전경.
운부암 전경.

◇ 운부암 백흥암 중암암 묘봉암 기기암 

은해사는 암자 한 곳 한 곳이 모두 천년 역사와 수행담을 품은 명찰이다. 암자들은 은해사를 중심으로 팔공산 자락에 안겨 있다. 은해사와 가장 가까운 곳에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처인 백련암이 있고, 계곡 건너편 200여m 위에 스님들 요사채로 사용하는 서운암이 있다.

그 외 암자들은 모두 걸어서 1시간 이상 걸리는 팔공산 자락에 스며 있다. 그러나 차도가 놓여 있어 승용차로도 갈 수 있다. 스님들이 화두를 들고 포행하고 신도들이 공양미를 머리에 이고 걷던 숲길은 희미하게 자취만 남았다. 

은해사를 뒤로하고 팔공산으로 오르면 연못에서 갈림길이 시작된다. 오른쪽으로 가면 운부암이다. 정면은 태실봉이며 왼쪽으로 가면 백흥암 중암암 묘봉암이 나온다. 태실봉을 가운데 두고 운부암과 다른 암자가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2km가량 걸어가면 운부암이다. 작은 계곡에는 맑은 물이 넘친다. 숲이 그늘을 드리워 초가을 따가운 햇살을 막아준다. 얼마나 걸었을까? 운부암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은해사 주지를 지낸 법타스님이 쓴 운부선원 비석이 반긴다. 천하명당 조사도량 (天下明堂 祖師道場) ‘북마하(北摩珂) 남운부(南雲浮) 운부선원(雲浮禪院) 글씨가 눈길을 끈다. 

북쪽은 금강산 마하연이 최고 수행처이고 남쪽은 운부선원이 최고라는 뜻이다. 자연이 만든 터가 집이라면 주인은 사람이다. 중요한 것은 터가 아니라 주인이다. 평범했던 조(曹)씨 집안 계곡이 2000여년 간 지속되는 세계최대 선종의 뿌리의 대명사가 된 것은 6조 혜능 때문이다. 선사들 사이에서 전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좋은 기(氣)를 지녔다고 호평 받는 이유는 당대 최고의 선지식들이 거쳐 갔기 때문이다. 

근세도인으로 경허, 해월, 만공스님으로부터 용성, 운봉, 동산, 경봉, 한암, 향곡, 한암, 청담, 성철스님 등 당대 선지식이 이곳에서 수행정진 했다. 평생의 도반이었던 성철스님과 향곡스님은 운부암에서 만난다.

성철스님이 젊을 적 수행을 한 후 선원의 명맥이 끊겼던 것을 일타스님이 은해사 주지로 부임하면서 48년 공백을 깨고 1998년부터 선원이 재개원 됐다. 개원 당시에는 일타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현 선원장 불산스님이 선원장을 맡아 지금까지 이어온다. 재개원한 선원 이름이 ‘운부난야(雲浮蘭若)다. 
 

원통전과 운부난야.
원통전과 운부난야.

◇ 성철 향곡스님 처음 만난 운부암

운부선원 비석 옆으로 연못이 있고 그 위로 높은 언덕이 암자를 지탱하고 서있다.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작은 불이문은 영화 세트였는데 가람과 잘 어울려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불이문 위로 단청이 벗겨져 나무 결이 그대로 드러나 수백년 전으로 회귀한 듯 하다.

보화루(寶華樓) 밑으로 들어가 경내로 들어서면 대웅전 격인 원통전이 마주한다. 그 오른쪽이 선원 운부난야다. 원통전 안에는 한 재가신자가 참선 중이었다. 삼매에 빠졌을까? 미동도 않는다. 

원통전 관세음보살좌상은 보물 제514호이다. 신라 말 혜철국사가 인도에서 해금강으로 들어오는 배 안에서 모셔왔다는 전설을 품은 귀한 불상이다. 원통전과 운부난야는 모두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 글씨다. 그는 김옥균 유길준 박영효 김윤식 등 개화파 선구자들의 스승이다. 계해년 한겨울(癸亥中冬)에 썼다고 했으니 1863년 겨울 박규수가 임술농민항쟁 때 사건 실상 조사와 수습을 맡아 경상도를 왕래할 무렵이다. 

원통전 뒤로 돌아가면 사람 한명 가부좌 틀고 앉을 만한 공간을 둔 선당(禪堂)이 나온다. 그 안에는 좌복이 있고 진제종정예하와 함께 찍은 선원장 불산(佛山) 스님 사진이 붙어있다. 뒤편에는 ‘좌복 위에서 정진하다 죽게나’라고 쓴 경구가 나무에 새겨져 있다. 향곡스님 법제자가 종정예하이고 불산스님은 종정예하의 상좌다. 남한 제일의 선당(禪堂)은 이렇게 맥을 이어 도도히 흐른다. 
 

정진하다 죽게나 선당.
정진하다 죽게나 선당.

보화루는 찻집이다. 한 젊은 스님이 템플스테이를 마치고 돌아가는 신도들에게 차를 건네며 법담을 들려준다. 티 없이 맑으며 만면에 웃음 띤 얼굴에 밝고 경쾌한 목소리로 젊은 수좌 스님은 부처님 가르침을 전했다. 빨리 산으로 올라가야하는 ‘임무’도 잊고 스님 곁으로 다가가 차 한 잔을 청했다. 

다음 행선지 중암암(中岩庵) 가는 길을 가르쳐 주는데 못 미더운지 스님은 몇 번이며 주의를 준다. 스님의 우려가 괜한 걱정이 아니었음이 곧 드러났다. 은해사에서 왼쪽 서운암 기기암을 들러 백흥암 묘봉암 중암암 그리고 마지막으로 운부암을 들러 내려오는 길이 가장 좋다. 거꾸로 방향을 잡은 탓에 시간도 많이 걸리고 하산했다가 다시 가는 번거로움을 피할 수 없었다. 

운부암 뒤 삿갓봉으로 올랐다. 운부암과 중암암 사이에 태실봉이 놓여 있다. 조선 인종의 태를 모셨다 하여 태실봉이다. 은해사와 그 암자들은 조선 왕실의 보호를 받는 왕실 수호 사찰이었다. 그 덕분에 조선에도 번성을 누렸다. 

아래로 내려가면 편한데 삿갓봉으로 향했다. 팔공산은 부드러운 토산이다. 초가을 낙엽이 덮여 길이 보이지 않았다. 송이버섯 채취를 금하는 까닭에 사람의 발길이 끊겨 길이 더 희미해졌다. 나중에 하산 길에 송이 버섯을 채취하는 산군을 만나 안 사실이지만 온 산에 독이 잔뜩 오른 까치독사 천지다. 수없이 미끄러지고 걸려 넘어졌는데 아마 독사가 더 놀랐을 것이다. 
 

중암암 법당에서 바라본 팔공산.
중암암 법당에서 바라본 팔공산.

◇ 부처님 가르침 새긴 중암암 

2시간 가량 오르내린 끝에 드디어 삿갓봉에 올랐다. 운부암 불사 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오고 태실봉이 한 눈에 들어왔다. 하양 시내도 어렴풋이 보인다. 땀에 흠뻑 젖은 옷이 금세 마르고 추위가 몰려왔다. 조금만 쉬어도 체온을 앗아 갈 정도로 산 바람이 차다. 다시 서둘러 중암암으로 방향을 잡았다. 삿갓봉에서 갓바위로 가다 왼쪽으로 내려가면 은해사다. 오른쪽으로 난 길을 가면 갓바위다. 그 갈림길이 능성재다. 

능성재에서 은해사 방향으로 3km 가량 내려가면 중암암(中岩庵)이다. 가는 길 중간 중간 등산객과 참배객들 쉬어가라고 벤치가 놓여있다. 작은 배려가 고맙다. 은해사에서 중암암을 거쳐 능선재로 올라 갓바위로 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다. 삶이 그러하듯 산행(山行)도 쉴 기회를 갖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지 힘써 수고한 자는 잘 안다.

중암암(中岩庵)은 이름 그대로 바위 가운데 암자다. 바위 둘이 양편에 문처럼 버티고 있어 일명 ‘돌구멍 절’이라고 한다. 큰 바위 틈에 10평도 되지 않는 작은 암자지만 품고 있는 이야기는 여느 대찰 못지 않다. 중암암은 은해사 산내 암자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 

통일 신라 때인 834년(흥덕왕 9)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창건했다. 같은 팔공산 내 동화사를 창건한 인물이다. 심지왕사는 동화사를 창건 한 후 이 곳으로 와 중암암과 건너편 묘봉암을 창건했다. 능성재에서 내려오면 장군수 안내판이 나온다. 김유신 장군이 화랑시절 중암암에서 심신을 단련할 때 즐겨 마셨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중암암에서 은해사로 내려가는 산길 바위 위에 서있는 소나무는 이름이 만년송이다. 바위틈에 붙어 가지가 땅을 향해 자라서 수평으로 길게 굽어져 있다. 

중암암 법당 뒤 봉우리에 바위 3개가 놓여있다. 삼인암(三印庵)이다. 누가 세웠는지 모르지만 안내판에 기도를 해서 아들 셋을 낳았다느니, 아들 삼형제 혹은 친구 세 명이 정진하여 뜻하는 바를 이루었다는 등의 내용이 적혀있는데 그보다는 인(印)자로 미루어 불교의 삼법인(三法印)이 맞는 듯 하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 삼법인은 부처님의 가장 기본 되는 가르침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연기에 따라 생성 소멸의 법칙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나(我)라고 하는 실체도 없다. 

이 도리를 알면 생노병사는 물론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에서 해방돼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된다. 이 가르침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 그 어떤 상황에도 적용되는 도장을 찍은 듯 분명한 진리다. 그래서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를 상징하듯 바위에 새겼나 보다. 
 

삼인암.
삼인암.

◇ 원효대사 수행담 서려있어 

삼인암에서 내려서면 극락굴이다. 아주 좁아서 몸집이 큰 사람은 드나들 수가 없다. 원효스님이 이 굴에서 ‘화엄경 약찬게를 외우다 화강삼매에 들어 불빛을 발산했더니 그 힘으로 바위가 갈라지고 의문이 풀려 화엄경을 완성했다는 전설이 서려 있다.

조선 말기 영파스님이 어느 여름 이 굴에서 정진하다가 삼매에 드는 바람에 학인들 강의시간도 놓치고 밤이 늦도록 스님이 오지 않아 큰 절 대중들이 모두 찾으려고 나와보니 굴 속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감복하여 스님들이 공부를 더 열심히 했다고 한다.

이 도량에서 공부를 하거나 청정히 계를 지키고 기도하면 잘 이루어진다고 하며 부처님 가르침을 바로 알면 몸이 아무리 커도 좁은 굴을 통과 못하는 사람이 없다고 하여 많은 사람이 찾는다. 

극락굴 아래에서 중암암으로 내려서면 단아한 탑이 맞이한다. 고려시대 초기에 조성한 삼층석탑이다. 암벽아래에 터를 조성하고 축대를 쌓아 서쪽에는 법당 동쪽에는 탑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많은 이야기와 긴 역사를 품고 있는 중암암에서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는 해우소에 담겨 있다. 바위 틈에 있었던 해우소는 전국 사찰에서 가장 깊다는 소문이 나 있다. 그 내력은 다음과 같다.

어느 선원에서 통도사 해인사 돌구멍 절 스님이 함께 정진했다. 각자 자신의 절이 얼마나 대단한지 자랑을 했다. 통도사는 대찰 답게 법당 문이 워낙 커서 한번 문을 열고 닫으면 문지도리에서 쇳가루가 한말 석 되나 떨어진다고 했다. 해인사 스님은 스님들이 많아 공양간 솥도 커서 동짓날 팥죽을 쑤면 배를 저어야 한다고 허풍을 떨었다.

바위 틈에 매달린 듯 작은 암자에 불과한 돌구멍 절에서 온 스님은 절이 크지도 않고 스님이 많은 것도 아니어서 다른 자랑거리를 내놓았다. 해우소가 하도 깊어서 정월 초하루 날 볼 일을 보고 나오면 섣달 그믐날 떨어진다며 자랑했다. 천길 바위 틈에 만든 해우소가 그만큼 높은데 있다는 것을 장난스럽게 표현한 것이다.

지금 중암암에는 요사채와 선원도 있고 떨어지는 소리가 곧바로 들리는 해우소도 있다. 전기도 들어오고 차도 들어온다. 매월 둘째 넷째주 토요일에는 철야기도를 한다. 
 

묘봉암.
묘봉암.
묘봉암 원통전 안의 바위.
묘봉암 원통전 안의 바위.

◇ 전국 사찰서 가장 깊다는 해우소

중암암을 나와 묘봉암(妙峰庵)으로 향하다 묘봉 위에서 바라보면 중암암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바위 위에 아슬한 모습으로 앉은 암자는 도솔천인 듯 신비하다. 묘봉암과 중암암은 멀지 않다. 심지왕사가 중암암과 함께 창건했다. 6,25 때 폐사된 것을 법운(法雲)스님이 중수하였으며 관음기도와 신신기도처로 유명하다.

나라에 큰일이 있거나 큰절에 행사가 있을 때 은해사 대중 스님들이 모두 와서 산신기도를 올렸다고 전한다. 산령각 옆 석간수는 불치의 병도 낳게 한다는 신비의 약수로 유명하다. 묘봉암에서 가장 이채로운 곳은 원통전이다. 원통전은 석굴위에 전각을 올리는 바람에 바위가 법당 안으로 들어와 자연스럽게 닫집 역할을 한다. 묘봉암 역시 지금은 차로 올라올 수 있다. 

묘봉암에서 다시 능선을 따라 3km 가량 하산하면 기기암을 만난다. 신라 애장왕 때 국사로 봉안된 정수(正秀)스님이 816년(헌덕왕 8)에 창건하였고 1546년 쾌선스님이 중건하여 안흥사(安興寺)라 하였으며 60여명의 승려가 살았다는 기록이 전한다.

암자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절이 크다. 선원이 주 공간이며 그 옆에 요사와 법당이 서있다. 잘 정돈된 정원수와 가지런히 쌓은 축대, 입구에서 경내 까지 드리운 가로수, 스님들 부식이 자라는 밭에다 팔공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절이다. 
 

기기암.
기기암.
기기암 선원.
기기암 선원.

◇ 수좌 중의 수좌 휴암스님을 그리다

절에서 만난 거사에게 기기암(寄寄庵)절 이름에 담긴 뜻을 물으니 ‘신기사바 심기극락(身寄娑婆 心寄極樂)’, ‘몸은 비록 사바세계에 있으나 마음은 극락에 있다.’는 뜻이라고 풀이한다. 그는 “인터넷에서 보았다”며 웃었다. 고려 명종 기성대사가 중수하면서 이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기기암이 낯설지 않은 것은 휴암스님 때문이다. 스님 법명 앞에는 ‘기기암 선원장’이 한 단어처럼 붙어 다녔다. 서울대 법대 불교학생회 출신으로 서릿발 같은 기개로 한국불교에 경종을 울린 수좌 중의 수좌였다. 1980년 허물어진 기기암 선원을 다시 세우고 후학들을 지도하며 평생 수행에만 전념했으며 ‘한국불교의 새 얼굴’ ‘장군죽비’ 등으로 정법(正法)이 아닌 그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자존심 있고 긍지가 있고 양심이 있는 선구적 주체적 승가인’을 호령했던 스님의 장군죽비가 그리워지는 시절이다. 아무도 경책하지 않고 나와 관련된 일 아니면 쳐다도 보지 않는, 정법을 논하는 법석 조차 찾기 힘든, 울림이 없는 시대에 스님의 빈 자리가 너무 크다.

기기암을 나와 차도를 따라 내려오다 다시 산길을 올랐다. 태실봉 백흥암으로 오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잘못된 선택이었다. 겨우 보이는 길을 따라 계곡 하나를 겨우 넘었을 까? 앞에서 ‘씩씩’ 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후다닥 무서운 속도로 달려갔다. 멧돼지 일가족이다.

미안한 마음에 서둘러 다시 찻길로 내려왔다. 기기암에서 2km 가량 내려오면 서운암이다. 스님들이 머무는 요사로 쓰이는 작은 암자다. 절에 관해 전하는 역사는 없고 6,25 이후 중건하여 산령각과 요사만 있다.
 

태실봉.
태실봉.

길을 잘못 들어서는 바람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낭패한 지경에 처했다. 새벽부터 서둘렀는데도 벌써 해가 넘어갔다. 그래도 할 수 없다. 백흥암으로 향했다. 은해사에서 5km 가량 위에 있으니 보통 거리가 아니다. 비구니 스님을 태우고 올라간 택시가 얼마 뒤 내려오더니 멈춰선다. 

기사가 묻는다. “이 시간에 어디로 가십니까?” 당연한 물음이다. 백흥암은 1년 두 차례만 외부에 개방하는 비구니스님들 정진처이고 중암암이나 묘봉암은 한 참을 더 올라가야하니 운전기사가 호기심 반 걱정 반 물어보는 것도 당연하다.

그래도 숲이 우거지고 계곡 물이 시원스럽게 흘러내려 걷는 길은 행복했다. 얼마나 올랐을까? 캄캄하던 주변이 조금씩 밝아지더니 백흥암(百興庵)이 모습을 드러냈다. 운부암처럼 단청하나 없이 나무결을 그대로 드러낸 고색창연하고 단아하다. 혜철(惠徹)국사가 861년(신라 경문왕 1년)에 착공하여 873년에 완공하였으며, 절 주위에 잣나무가 많아서 백지사(栢旨寺)라 하였다고 한다. 1546년(조선 명종 1)에 백흥암으로 개칭했다.

은해사에서 팔공산에 이르는 산세가 용이 등천하는 기세이므로 등 너머 운부암에서 상서로운 구룸이 더욱 많이 일어나서 용의 승천을 돕도록 하는 뜻을 담은 이름이다. 백흥암이 자리한 곳은 팔공산 태실봉이다. 1520(중종 15년) 뒷날 인종이 되는 왕세자의 태를 봉안했다. 백흥암은 이후 왕실 보호를 받는 국가사찰로 지정돼 사격을 일신했다. 
 

백흥암.
백흥암.

◇ 따뜻한 절 백흥암

절 앞 정면의 보화루는 1730년(영조 6)에 중건했다. 은해사 운부암에 이어 백흥암까지 보화루(寶華樓)가 셋이다. 백흥암이 비구니 수행도량으로 면모를 갖추고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은 30여 년 전 회주 육문스님과 선원장 영운스님이 주석하면서부터다. 비구니 스님 혼자 주석하다 두 스님이 함께 정진하자는 말에 시작됐다.

겨우내 메주를 쑤고 장작을 쌓아두고 대중 맞을 준비를 해준 덕분에 이듬해 봄부터 비구니 스님들이 정진을 시작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초 두 자루를 켜고 정진했다. 지금도 여름 겨울 안거 때 마다 15명 안팎의 수좌들이 결제를 난다.

조선의 어느 시인은 백흥암을 일러 “방 따뜻하여 새벽 잠 안온하고 등불 밝아 밤 이야기 길어라”고 노래했는데, 어둠이 내리는 백흥암은 과연 안온했다. 

영천=박부영 상임 논설위원 chisan@ibulgyo.com

[불교신문3524호/2019년10월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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