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60주년 맞이 특별기획’
인연따라 자비 보살로 중생 품는 천하영지 계룡산

삼불봉에서 관음봉으로 가면서 돌아본 계룡산, 저 아래 동학사가 보인다.
삼불봉에서 관음봉으로 가면서 돌아본 계룡산, 저 아래 동학사가 보인다.

계룡산에는 단풍이 저물고 있었다. ‘춘마곡 추갑사’(春麻谷秋甲寺)가 허풍이 아니었다. 계룡산에서도 갑사 쪽이 단연 최고였다. 신흥암 천진보탑 가는 길에서 내려다본 곱게 물든 단풍은 발걸음을 저절로 멎게 했다. 평일인데도 갑사 근처에는 마지막 단풍을 즐기는 인파로 넘쳤다. 등산복 보다 정장 차림이 더 많아 보였다. 열심히 성경을 설명하는 기독교인 소리도 들리고, 수녀님들의 환한 미소도 계룡산의 가을을 물들였다. 

◇ 계룡산 대표 동학사 갑사 신원사 

계룡산을 대표하는 가람은 동학사 갑사 신원사 세 곳이다. 어느 쪽에서 올라가든 계룡산의 주 능선인 자연성릉으로 향한다. 능선이 성(城)처럼 생겼다해서 붙인 이름이다. 원래 가장 높은 봉우리는 천황봉이지만 육해공군 삼군사령부 계룡대가 그 아래 자리한 뒤로 접근 금지 구역이 됐다. 그래서 두 번째 높은 관음봉이 최고봉 자리를 차지했다. 

지난 13일 새벽부터 서둘러 계룡산을 올랐다. 동학사 갑사 신원사 세 곳 중 동학사 방향을 가장 많이 이용한다. 대전 시내에서 가까워 오가는 버스도 많다.  

6시가 넘어가는데도 사위가 캄캄했다. 탐방센터에서 동학사 가는 도로의 가로등이 어둠 속에 잠긴 단풍을 드러냈다. 2km 가량 걸어가면 동학사가 나온다. 동학사에는 문수암 관음암 길상암 미타암 귀명암 상원암도 있다. 원래 18 곳이나 됐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폐찰됐다. 

이 중 상원암(上院庵)이 동학사 모태다. 상원암은 동학사에서 삼불봉 방향으로 2km 가량 올라가면 나온다. 그 유명한 남매탑이 있는 곳이다. 신라시대에 당나라 스님 상원조사가 암자를 짓고 수도하다가 입적한 후, 724년(성덕왕 23) 그의 제자 회의화상이 스승을 기리기 위해 쌍탑을 세웠다.

당시에는 문수보살이 강림한 도량이라 하여 절 이름을 청량사라 했다. 그래서 남매탑 공식 명칭이 공주 청량사 5층 석탑, 공주 청량사 7층 석탑이다. 두 석탑 모두 보물로 지정됐다. 사람들은 남매탑이라는 이름을 더 선호한다. 은혜를 갚으려는 호랑이 덕분에 만난 여인과 의남매를 맺고 함께 수도해서 성불했다는 전설이 서려있다. 
 

동학사 위 남매탑.
동학사 위 남매탑.

◇ 근현대 교육 출발이자 禪 발원지, 동학사

상원암은 고려 초기부터 동학사로 이어졌다. 920년 도선국사가 태조의 명을 받아 중창하고 신라가 망한 뒤 벼슬을 살았던 유차달이 신라 시조와 충신 박제상의 초혼제를 지내기 위해 936년 동계사(東鷄士)를 지었으니 곧 동학사다. 920년이면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후백제 견훤에 맞서 통일전쟁을 벌일 때다. 계룡산 인근은 백제 땅이니 최전선이다. 왕건이 계룡산에 절을 세운 까닭을 읽을 수 있다. 

근현대 동학사는 강원교육의 산실이다. 오늘날 한국 조계종 비구니 스님들이 세계 최대 최고의 비구니 교단을 세운 배경은 교육이다. 그 출발이 동학사다. 금강산 유점사 율봉스님의 제자 만화보선스님이 1864년(고종1년) 동학사로 옮겨와 가람을 중창하고 강원을 개설한 것이 동학사 승가대학의 전신이자 시초다. 

만화스님의 제자 중에 경허선사가 있었다. 그는 만화 보선의 맥을 이은 대강백이었다. 경전에 해박했던 경허는 천하를 다 얻은 듯 기고만장했다. 그러나 금의환향 길에서 만난 전염병 환자들의 처참한 광경이 그를 절망에 빠트렸다. 팔만사천경을 자유자재로 돌릴 정도로 달통했지만 죽음 앞에서 티끌만큼의 소용도 없음을 알고 경전을 버리고 죽음을 각오한 참선에 들었다.

경허는 목 아래 날카로운 송곳을 세워두고 생사를 여의기 전에는 이 문을 나서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드디어 동학사 아래 이처사가 내뱉은 ‘콧구멍 없는 소’(牛無鼻孔處)에 ‘문 없는 문’ 소식을 깨닫고 문을 박차고 나왔다. 이처럼 동학사는 선(禪)과 교(敎)에서 한국불교 산실이다. 

남매탑 상원암에 도착하자 여명이 밝아온다. 언제 올라왔는지 등산객들이 사진을 찍느라 시끌벅적하다. 그 소리가 너무 크게 울려 퍼졌다. 스님들 수행하시는데 조용히 해달라 하니 “네”라고 답은 하는데 영 마뜩찮은 표정이다. 산에서도 마음대로 못 떠드냐는 불만이 얼굴에 그대로 묻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잊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하는데 산의 주인은 등산객이 아니다. 이 산에 살고 있는 나무 짐승 살아있는 생물 외에 바위 물 흙이 주인이다. 그리고 이들과 더불어 산을 지키는 스님들이다. 잠시 허락된 객은 조용히 흔적을 남기지 않고 가급적 빨리 떠나는 것이 예의다. 한 무리가 내려가자 또 한 무리가 올라와 마음 껏 떠든다. 

남매탑을 뒤로하고 삼불봉(三佛峰)으로 향했다. 삼불봉을 앞두고 갈림길이 나온다. 뒤로 돌아가면 갑사로 향하는 금잔디고개다. 금잔디고개 아래가 신흥암이고 2km를 더 가면 갑사이니 갑사와 동학사가 지척이다. 그러나 계룡산을 한 눈에 조망하는 능선을 버리고 빠른 길을 택할 수 없다. 삼불봉은 동학사에서 바라보면 세 분의 부처님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눈에 묻힌 삼불봉설화(雪花)는 계룡산 제2경으로 손꼽는다. 삼불봉에 오르자 바람이 거세다. 

삼불봉에서 관음봉에 이르는 능선이 계룡산의 중심이다. 계룡산이라는 이름은 주봉인 천왕봉 연천봉 삼불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마치 닭 볏을 쓴 용모양을 닮았다 하여 붙였다. 2km 가량 길지 않는 거리지만 뾰족한 바위가 솟아있고 그 옆으로 간신히 길이 나있어 위험하다. 다행히 잘 손질된 등산로 덕분에 걷는데 큰 어려움은 없다.  

관음봉으로 오르기 전 아래를 내려다보니 동학사가 한 눈에 들어온다. 천황봉 삼불봉 관음봉에서 흘러내린 산이 만나 계곡을 이룬 터에 자리 잡았다. 저무는 단풍이 동학사를 더 돋보이게 한다. 수평으로 흐르던 자연성릉이 갑자기 치솟아 관음봉을 만들다 보니 가파른 계단이 가로 막았다. 밑에서는 까마득히 보이지 않을 정도다. 
 

계룡산 능선을 오르 내리는 가파른 계단.
계룡산 능선을 오르 내리는 가파른 계단.

◇ 계룡산 한 눈에 조망하는 자연성릉

관음봉 아래 고개에서 은선폭포로 내려가면 동학사다. 대부분의 등산객이 동학사 남매탑 삼불봉 자연성릉 관음봉을 거쳐 은선폭포로 내려가는 코스를 잡는다. 젊은 연인이 다정히 손잡고 숨을 헐떡이며 은선폭포에서 올라온다.

남자는 관음봉으로 올라 남매탑으로 가자하고 여자는 다시 내려가자 한다. 남매탑으로 가는 길은 험하지 않아 힘들지 않을 것이라고 하니 둘의 의견이 합치했다. 도심과 가깝고 3시간 가량이면 능선을 한 바퀴 돌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계룡산을 즐겨 찾는다. 

연천봉으로 갔다. 연천봉은 신원사 권역이다. 연천봉 바로 아래 등운암이 있고 그 아래 백제 의자왕의 아들 융을 기리며 세운 고왕암과 보광원 신원사가 차례로 나온다. 등운암(騰雲庵)은 부설거사의 아들 등운이 암자를 짓고 수도한 곳이다. 

신라 진덕여왕 때 경주에 살던 진광세라는 이름의 아이는 다섯 살에 불국사로 출가해 부설(浮雪)이라는 법명을 받고 맹렬하게 정진해 득도에 이른다. 그러나 그를 사모하는 묘화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부부 인연을 맺어 아들 등운과 딸 월명을 둔다.

남매 역시 부모를 닮아 수행에 매진해 깨달음을 얻었다. 등운은 665년(신라 문무왕 5년) 계룡산 연천봉 아래 절을 짓고 등운암(騰雲庵)이라 불렀다. 딸 월명은 부안 능가산 월명암에서 도통하여 육신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부설은 인연에 따라 환속했으나 수행을 놓지 않아 오늘날까지 인도의 유마, 중국의 용거사 함께 불교 3대 거사로 추앙받는다. 20년간 말을 못하다 부설을 보고 말문이 트이는 이적을 보였던 묘화 부인 역시 110세까지 살면서 많은 이적을 보였다. 불법(佛法)에 승속이 없음을 보여주는 일가족 이야기다. 

◇ 부설거사 수행 이야기 담은 등운암

등운암 뒤 연천봉에 오르니 바위에 ‘방백마각 구혹화생(方百馬角 口或禾生)’이 새겨져 있다. ‘방(方)’은 사(四)방을 일컫고, 마(馬)는 오(午)라고 해서 숫자 5이며 글자로 풀면 80(八十)이다. 이렇게 글자를 숫자로 풀어 모두 합치면 ‘사백팔십이년국이(四百八十二年 國移)’라는 구절이 된다. 조선이 개국 482년 만에 망하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다는 뜻이라고 ‘정감록’ 예찬자들은 풀이했다. 그 이야기가 그럴싸했는지 명성황후가 정씨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등운암을 누를 압(壓), 정씨 정(鄭) 절 사(寺)인 압정사로 고쳤다. 

영희 영조 두 도반과 전국 명찰을 돌며 수행하던 부설은 결혼하지 않으면 죽겠다는 묘화의 청을 받아 ‘모든 보살의 자비는 중생을 인연 따라 제도하는 것’이라며 부부의 연을 맺었다. 나중에 두 도반이 병에 물을 가득 넣어 돌로 내리쳐 물이 흘러내리는 지 여부로 도력을 시험하자 그의 병 속 물만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부설은 두 도반에게 “진성은 본래 신통하고 영묘하고 밝음이 항상 머물러 있는 것은 물이 공중에 매달려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그대들은 높은 스승을 두루 찾았고 오랫동안 총림에서 세월을 보냈는데 어찌 생(生)과 멸(滅)을 자비심으로 돌보고 보호하며 진상(眞常)을 삼고 환화(幻化)를 공(空)으로 하여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본성을 지키지 못하는가”라고 설법한 뒤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좌탈입망했다. ‘인연 따라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의 자비’는 영원히 남았지만 권력을 지키기 위해 상대방을 누르고 불태우는 살육을 자행한 왕권은 비참하게 사라졌다. 
 

등운암.
등운암.

◇ 동안거 준비하던 대자암

연천봉 고개에서 대자암으로 내려갔다. 가파른 돌 계단이 끝없이 이어지는 험한 길이었다. 조심스럽게 내려가는데 단풍이 자꾸 쉬었다 가라며 유혹한다. 대자암으로 내려가는 계곡의 단풍은 계룡산 가운데서도 특히 아름다웠다. 많은 사람들이 산을 올랐다. 수직으로 내려오던 계곡은 방향을 완전히 꺾어 옆으로 완만하게 흘렀다. 덩달아 길도 편안해졌다. 한 숨 돌리는가 싶었는데 시멘트 포장길이 나왔다. 승합차가 한 대 올라간다. 

대자암(大慈庵)이다. 갑사에서 2km 가량 거리다. 대자암은 무문관(無門關)으로 유명하다. 스님 한 분이 대자암에서 내려온다. 포행 중인 듯 했다. 합장 인사하고 대자암 계시냐고 물으니 그렇단다. 3일 뒤가 음력 10월 보름 동안거 결제일이다.

대자암으로 올라가는 승합차는 보름 결제를 준비하는 신도들 차였다. 주지 스님 방에는 신도들과 인근 공주 대전 불자들이 모여 동안거 결제 준비가 한 창이었다. 무문관을 운영하려면 보통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주지 스님 이하 대중 스님과 불자들의 헌신적 지원이 필요하다. 

주지 스님은 9년 째 대자암 무문관을 외호하고 있다. 대자암 무문관 이름은 삼매당(三昧堂)이다. 스님 몇 분이 나와 몸을 풀고 이불을 털었다. 9개월 간의 길고 고된 여정을 떠날 준비를 하는 중이리라. 

대자암을 나와 갑사로 가는 중간에 대성암을 만난다. 영규대사를 기리는 암자다. 대사를 기리는 탑 비석이 곳곳에 서 있다. “거룩하신 기허당 영규대사님! 바로 여기가 대사님께서 출가하시고 1592년 임진왜란 때 분연히 일어나 잔악무도한 왜구의 가슴에 비수를 꽂기 위해 죽창을 만드셨던 계룡산이랍니다”라는 발원문을 적은 추모시비다. 
 

갑사.
갑사.

◇ 기허당 영규대사 기리는 대성암 

공주 출신인 기허당 영규대사는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서산·사명과 함께 임진왜란 3대 의승으로 추앙받았다. 조헌과 더불어 청주성을 함락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금산에 주둔하는 왜군을 격퇴하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청주성 전투는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조선이 거둔 최초의 승리였다. 조헌과 700의병, 승병 800여명 등 전원이 전사할 정도로 치열했던 제2차 금산전투에서 영규대사도 치명상을 입었다. 대사는 흘러내리는 창자를 부여잡고 혼신의 힘을 다해 갑사로 돌아오다 현재 대사의 무덤이 있는 근처에서 입적했다. 

해마다 갑사는 대사의 추모재를 거행한다. 그러나 청주성 전투와 금산 전투를 함께 했던 조헌과 비교하면 나라가 대사를 대하는 태도는 천양지차다. 금산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이들의 주검을 모아 만든 의총(義) 이름에 승병은 없다.

조헌과 700의병을 기리는 추모재는 도지사와 시장 등 관이 총 출동하지만 영규대사와 800의승 추모재에는 발걸음 하지 않는다. 조선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처했을 때는 온갖 벼슬을 내리며 치하했지만 막상 끝나자 승병을 변방으로 내쫓고 전공에서 삭제했다. 조선 조정과 유가(儒家)들이 불교를 대하던 방식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천진보탑 앞에서 등산객이 명상에 젖어 있다.
천진보탑 앞에서 등산객이 명상에 젖어 있다.

◇ 자연바위가 보탑 된 사연

갑사(甲寺)는 단풍을 즐기려는 행락객들로 북적였다. 절 이름에 하늘을 찌르는 자부심이 가득하다. 으뜸 갑(甲), 절 중에 으뜸이니 이만한 긍지도 없다. 삼국시대 초기 백제 구이신왕 원년(420)에 고구려에서 온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백제 최초의 절이라는 의미다. 

갑사에서 다시 계룡산 금잔디고개 방향으로 오르면 신흥암이 나온다. 1980년대 초반 총무원장을 역임했던 황진경스님이 주석한다. 삼불봉 관음봉이 감싸는 길지(吉地)에 자리한 신흥암은 갑사 창건 보다 역사가 빠르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만큼 내력이 깊은 절이다. 

신흥암 위에는 탑을 닮은 자연바위가 있다. 예사 바위가 아니다. 부처님 진신사리가 봉안돼 있어 방광(放光)을 하며 아도화상이 천하를 주유하다 천진보탑으로 명명했다는 전설이 서려있다. 외국에 소개될 정도로 유명하여 문화재 제68호로 지정돼 있다. 

신흥암에서 계룡산으로 다시 오르면 금잔디광장이 나오고 500m를 가면 남매탑이다. 처음 출발했던 동학사로 돌아왔다. 동학사를 보고 한 도인이 지었다는 글이 돌에 새겨져 있다. “동방의 정기가 부처님의 하늘에서 생겼났나니/ 학 역시 모든 부처님 아래 춤추길 원하였도다/절 승려들의 마음이 부처님의 영지에 통하니/찰라에 성품 깨닫고 부처님의 지위 이룸이라”(東方精氣生佛天/鶴亦願舞諸佛下/寺僧心念通佛靈/刹那見性成佛地)

앞뒤 한 글자씩을 이으면 동학사찰천하영지(東鶴寺刹天下靈地)다. 동학사 뿐만 아니라 계룡산이 전부 불법(佛法)을 잇는 천하제일 도량이었다.
 

단풍이 아름다운 신흥암.
단풍이 아름다운 신흥암.
대자암 모습.
대자암 모습.

■ 무문관과 대자암

부처님 설산고행 따르는 수좌들
문정영스님 개설, 선수행 이끌어

무문관은 중국 혜개(慧開)선사가 현존하는 공안(公案) 가운데 48칙을 순서 없이 법문한 대로 엮은 공안집(公案集)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무문관은 가장 극단의 고행을 나는 수행처로 통용된다. 이는 대자암 무문관을 연 문정영스님 덕분이다. 스님은 1965년 12월27일 도봉산 천축사에 처음으로 무문관을 열었다.

도반인 제선스님이 제안하고 정영스님이 외호하여 시작된 무문관은 부처님의 설산고행을 본받자는 취지에서 출발했다. 6년 설산고행처럼 6년간 일체 외부 출입을 삼가고 오직 정진만을 발원했다. 그리하여 현대식 2층 건물을 세우고 독방을 만들었다. 안팎을 2중으로 잠그고 욕실과 화장실을 안에 두고 외부와는 차단하여 음식은 감옥처럼 배식구를 통해 전달했다. 

정영스님은 이후 종단 발전에 매진하다 말년에 계룡산에 대자암을 열어 다시 선수행을 이었다. ‘삼매당(三昧堂)’이라는 이름을 짓고 형무소 독방 같은 작은 방에 하루 한 끼 먹는 일종식, 묵언정진 등 천축사 무문관 수행을 그대로 계승했다.

대자암 무문관은 한국불교에 새로운 선수행 가풍을 만들기도 했다. 대자암에 이어 1994년 제주도 남국선원에 무문관이 개설됐고 1998년에는 설악산 백담사에 ‘무금선원(無今禪院)’이라는 이름으로 무문관이 생겼다. 그 구조와 수행 체계는 천축사 대자암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현재 대자암은 정영스님의 손상좌인 주지 구전스님이 9년 째 맡아 운영한다. 현재는 9개월 수행이 원칙이다. 동안거에 결제해 하안거를 마치고 해제하는 식이다. 주지스님은 7~8명의 수좌 스님이 방부를 들였다고 말했다. 이전에는 3년 정진을 했다. 지금은 대중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9개월로 변경했다.

그러나 수행 일과는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전 11시 한 차례 공양하면 다음날 공양까지 좌복 위에서 미동도 않고 정진한다. 주지 스님은 “우리 절은 신도도 없고 수입도 없는 가난한 암자로 오직 신심 하나로 무문관을 외호한다”고 말했다. 

계룡산=박부영 상임논설위원 chisan@ibulgyo.com

[불교신문3538호/2019년11월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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