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탑 찰주는 수미산 중심축 … 탑 화려하게 꾸며

경주 ‘낭산 능지탑’ 시작 추정
분황사 모전석탑 금강역사상
사천왕사 목탑 천왕상서 확인

당나라서 사방정토신앙 유행
신라와 일본으로까지 전해져
호류지 금당에 사방불상 조성

밀교적인 색채 띠고 있지만
자은사 대안탑 모델로 삼아
통일신라시대 불탑 전통 계승

신라의 사방불상(四方佛像)은 7세기 후반에 조성된 낭산(狼山)의 능지탑(陵旨塔, 陵只塔)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에서 불탑(佛塔)에 표현된 불교 존상은 분황사(芬皇寺) 모전(模塼)석탑의 금강역사상(634년)과 사천왕사(四天王寺) 목탑의 천왕상(679년)에서도 확인되는데, 능지탑은 처음으로 탑 네 면에 불상이 장엄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능지탑보다 앞선 진평왕(眞平王, 579~632 재위)대에 경상북도 문경 대승사(大乘寺)의 사불산(四佛山) 정상에 사방불상이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삼국유사>의 기록도 있지만, 이는 불상의 조각 기법과 조형적인 특징이 진평왕 대의 것이 아니어서 책의 저자인 일연(一然, 1206~1289)에 의해 그 내용이 각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 7세기 후반 조성된 능지탑 출토 소조불좌상. 사진=문화재청
통일신라시대 7세기 후반 조성된 능지탑 출토 소조불좌상. 사진=문화재청

지금의 능지탑이 당시의 모습을 얼마나 정확하게 복원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탑의 영향을 받아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경상북도 구미의 도리사(桃李寺) 석탑, 의성과 안동의 방형단 적석탑(方形壇 積石塔)을 통하여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인 불탑과는 전혀 다른 이형탑(異形塔)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로 인해 이 탑이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한 불탑이었는지, 아니면 특수한 성격을 지닌 탑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다. 

1970년대, 능지탑을 발굴할 때, 탑 주변에서는 대량의 불상 파편들이 출토되었다. 이 중 북쪽과 서쪽 면에서 발견된 소조(塑造) 파편들은 불좌상의 다리와 대좌들로, 그 크기로 보아 불상은 높이 250cm, 무릎 폭 170cm 정도의 대형 상(像)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북쪽에서 출토된 소조 파편 안쪽 면에는 불상이 놓일 위치와 불신(佛身)의 각 부위를 알려주는 “서방불(西方佛)”, “서방슬상(西方膝上, 무릎 위)”, “서방좌비(西方左臂, 왼 팔)”등의 명문이 각각 새겨져 있다.

명문의 ‘서방불’이 단순히 서쪽에 안치된 불상을 뜻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방불 중 서방불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더욱이 ‘서방’이라고 새겨진 소조 파편들이 명문과 달리 탑의 서쪽 면이 아니라 북쪽 면에서 출토되어 이러한 고민에 더욱더 혼란을 야기시킨다. 비록 ‘서방’이라고 새겨진 소조 파편들이 북쪽에서 출토되었지만, 북쪽과 서쪽의 파편들이 형식과 크기가 거의 같아서 이들 불상은 탑의 네 면에 배치된 사방불의 성격을 지녔을 것으로 추정된다. 

능지탑이 있는 낭산은 통일신라시대 초기에 왕실 발원 불사(佛事)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던 곳이자 종교적 방위 관념과 처음 시작된 장소였다. 낭산 기슭에 위치한 사천왕사는 이러한 성격을 모두 갖춘 곳으로, <금광명경(金光明經)> ‘사천왕품(四天王品)’에 근거해 창건된 사찰이다. 679년, 이 사찰에서는 당나라 군사를 물리치기 위해 국가적 규모의 불교 의식인 문두루(文豆婁, 무드라mudra) 비밀법이 거행되었다.

이때 그려진 오방신상(五方神像)은 당시 낭산이 왕경 오악(五岳)의 중악이자 수미산(須彌山)으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에 왕경 오악의 산신을 그린 오악산신도(五岳山神圖)였거나 도리천(忉利天, 수미산 정상의 천상세계)의 제석천(帝釋天)과 사천왕천(수미산 중턱의 천상세계)의 사천왕으로 구성된 불화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능지탑과 같이 탑의 네 면을 사방불상으로 장엄한 것은 당나라 7세기 중엽에 조성된 서안(西安)의 자은사(慈恩寺) 대안탑(大雁塔)에서 처음 확인된다. 현장(玄奘, 602~664)스님이 인도에서 귀국할 때 가져온 경전들을 보관하기 위해 645년에 세운 대안탑에는 동면에 약사불(藥師佛), 남면에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서면에 아미타불(阿彌陀佛), 북면에 미륵불(彌勒佛)이 새겨져 있다.

7세기 후반, 당나라에서는 사방정토(四方淨土)에 대한 교학적인 이해가 깊어지고 신앙이 유행하면서 대안탑과 같은 불탑뿐만 아니라 불전(佛殿) 속에도 사방정토가 표현되었다. 이러한 사방정토신앙은 당나라에서 유학한 스님들에 의해 7세기 후반에 신라와 일본으로 전해져 신라 경주의 능지탑과 나라(奈良)의 호류지(法隆寺) 금당의 사방불상이 조성되는 배경이 되었다. 

통일신라시대 8세기 전반에 경주를 중심으로 사방불 조성이 시도된 것도 모두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이전에 언급한 바 있는 칠불암 사방불상은 물론, 소금강산(小金剛山)의 굴불사지(掘佛寺址) 사면(四面)불상에서도 사방불의 관념이 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굴불사지 사면불상은 통일신라시대 8세기 전반에 조각됐다. 동면: 2.6m, 서면: 3.51m, 남면: 1.36m, 북면 1.61m.
굴불사지 사면불상은 통일신라시대 8세기 전반에 조각됐다. 동면: 2.6m, 서면: 3.51m, 남면: 1.36m, 북면 1.61m.

<삼국유사> ‘사불산(四佛山) 굴불산(掘佛山) 만불산(萬佛山)’의 기록에 의하면, 경덕왕(景德王, 742~765 재위)이 백률사(栢栗寺)에 행차하기 위해 산 아래에 이르렀을 때, 땅속에서 염불 소리가 들려 사람을 시켜 그곳을 파 보니 네 면에 불상이 새겨진 커다란 돌이 나왔고 그곳에 사찰을 지어 굴불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굴불사지 사면불상은 조형적으로도 경덕왕 대인 8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바위의 네 면에 새겨진 불상과 보살상의 신체 비례, 조각 기법, 표현 내용 등은 이들이 같은 계획 속에서 동시에 만든 것이 아님을 알려 준다. 서면의 아미타불삼존상과 동면의 약기(藥器)를 든 약사불좌상은 서방극락정토와 동방유리광정토의 불상을 표현한 것이지만, 서면의 불상이 동면의 불상보다 먼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서면의 아미타불삼존상은 불상을 바위 면에 직접 돋을새김(고부조)으로 표현하고, 협시보살상들은 두리새김(환조)한 다음 양옆에 세웠으며, 동면의 약사불좌상은 머리만 돋을새김으로, 복부 아래쪽은 선각(線刻)에 가까울 정도의 얕은 새김(저부조)으로 되어 있어서 기법적인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돋을새김된 남면의 존상과 북면 좌측의 보살상 간에도 기법적인 차이가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바위 북면 우측의 십일면육비관음보살입상(十一面六臂觀音菩薩立像, 11개의 얼굴과 6개의 팔을 가진 관음보살상)은 음각으로 표현되어 있어서 다른 불상들과는 완전히 다른 기법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굴불사지 사면불상은 각 면에 새겨진 존상들의 조각 기법과 조형적인 수준이 다르고, 존상 간의 도상적인 연계성도 찾을 수가 없어서 사방불상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서방불과 동방불을 같은 바위의 서쪽과 동쪽 방향에 각각 표현한 것은 8세기 전반에 사방불에 대한 인식이 있었음을 알려 준다.
 

통일신라시대 9세기 중엽 세워진 진전사지 삼층석탑, 높이 5m. 사진=김민규
통일신라시대 9세기 중엽 세워진 진전사지 삼층석탑, 높이 5m. 사진=김민규

불상의 형식과 크기가 거의 동일한 전형적인 사방불상은 9세기 이후에 조성된 불탑에서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지(陳田寺址) 삼층석탑, 전라남도 광양의 중흥사(中興寺) 삼층석탑, 경상북도 성주의 청암사(靑巖寺) 수도암 삼층석탑 등은 대표적인 예로, 초층 몸돌(탑신塔身)에 사방불상이 새겨져 있다.

몸돌 각 면에 새겨진 사방불상의 존명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동방불을 표현한 동면의 불상이 약기를 들고 있는 약사불임은 분명하다. 사방불상들은 착의법과 수인(手印)이 같았던 8세기 전반의 칠불암 사방불상과 달리 통견과 편단우견 방식으로 법의를 입고 다양한 수인을 결하고 있다. 불탑의 사방불상들은 대좌의 사천왕상이나 팔부중상과 함께 사찰의 종파적인 성향에 구애받지 않고 표현되었다. 

9세기 불탑의 사방불상에서는 밀교적인 수인을 결한 불상도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밀교의 오방불(五方佛) 사상에 의해 조성된 것은 아니었다. 사방불(혹은 오방불)과 관련된 경전 중에서 일부 경전(<공작왕주경(孔雀王呪經)>의 약사불, <일자불정륜왕경(一字佛頂輪王經)>의 보성불(寶星佛), <대일경(大日經)>의 보당불(寶幢佛)을 제외하곤 모든 경전에서 아촉불(阿閦佛)을 동방불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9세기 불탑의 몸돌 동면에 표현된 동방불은 모두 약기를 든 약사불상이기 때문에 경전(특히 밀교 경전)에 기록된 사방불(혹은 오방불)과는 도상적으로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들 불탑의 사방불상은 밀교적인 색채를 부분적으로 띠고 있지만, 자은사 대안탑의 사방불상을 모델로 하여 조성된 통일신라시대 8세기 사방불상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9세기 불탑에 표현된 사방불상에는 당시 신라 사람들의 미의식(美意識)과 불탑관(佛塔觀)이 반영되어 있다. 즉 불탑의 찰주(刹柱)를 세간(世間, 인간 세상)과 출세간(出世間, 정토 세계)을 이어주는 수미산의 중심축으로 생각하여 탑 표면을 화려하게 꾸민 것이다. 이러한 관념 속에서 불탑의 기단을 사천왕천이 있는 수미산 중턱으로 여겨 사천왕상으로 장엄하고, 탑신(塔身)이 시작되는 초층 몸돌을 수미산 정상의 동남서북에 있는 사방정토로 인식하여 사방불상을 그곳에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불탑관은 고려시대에도 이어졌는데, 다만 9세기 불탑의 사방불상과 달리 불회도(佛會圖, 불상을 중심으로 불교 존상들이 함께 모여 있는 모습) 형식을 취하거나 미륵불을 대신하여 신중(神衆)이 표현되는 등 시대성을 반영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신라 634년에 조성된 분황사 모전석탑, 높이 9.3m.
신라 634년에 조성된 분황사 모전석탑, 높이 9.3m.

[불교신문3606호/2020년8월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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