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계 화엄 스님들, 불국사에 정토세계관 구현

불국사의 계단식 2원 가람은
미타정토와 연화장세계 구현
비로전에 금동비로자나불상
극락전 금동아미타불상 봉안

수인 다르나 신체비례, 착의법
손 위치, 광배 부착 방법 같아
8세기 중엽 함께 조성됐을 것

<삼국유사> ‘대성효이세부모(大成孝二世父母) 신문왕대(神文王代)’에 인용된 ‘사중기(寺中記)’에는 토함산 불국사가 경덕왕(景德王)대에 재상을 지낸 김대성(金大城)이 751년(천보 10)에 조성을 시작하였으나 774년(대력 9)에 죽자 나라에서 완성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함께 인용된 고려시대 향전(鄕傳)에서는 김대성이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石佛寺, 석굴암)를 조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불국사와 석불사의 규모는 기록과 달리 김대성 개인이 아니라 국가적인 차원의 불사(佛事)였을 가능성이 높다. 754년(경덕왕 13)의 황룡사 대종(大鍾), 755년(경덕왕 14)의 분황사 청동약사불입상, 761년부터 765년(경덕왕 20-24) 사이에 주조를 시작하여 771년에 완성한 성덕대왕 신종(神鍾, 일명 에밀레종) 등 경덕왕대에 이루어진 국가적 차원의 불사는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해 준다.
 

불국사 정면.
불국사 정면.

그러나 <삼국유사>에 인용된 두 자료에서 김대성이 불국사와 석불사를 조성했다고 기록하고 있어서 그가 이 불사에 모종의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분명하다. 따라서 김대성과 그의 불교 사상에 영향을 준 승려들의 생각이 불국사의 가람(伽藍, 사원) 구조와 석불사의 도상 구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대성의 불교사상은 고려시대 균여(均如, 923~973)스님의 <십구장원통기(十句章圓通記)>에서 유일하게 확인되는데, 760년(상원上元 원년), 화엄승려 표훈(表訓)스님으로부터 화엄삼본정(華嚴三本定, 華嚴三昧)을 경주의 분황사에서 배웠다고 한다. 단편적인 이 기록이 그의 불교 사상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찰 완성 후 의상(義湘)의 신림(神琳)스님과 표훈스님이 각각 불국사와 석불사의 초대 주지가 되었다는 점은 그의 불교 사상에 미친 표훈 등 의상계 화엄 승려들의 영향을 상상하기에 충분하다.

지금의 불국사는 조선시대 17세기 후반의 모습을 계승한 것으로, 이 중 창건기인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는 청운교(靑雲橋)·백운교(白雲橋), 대웅전 구역의 동석탑(일명 다보탑) 서석탑(일명 석가탑), 대웅전의 석조기단 면석, 칠보교(七寶橋) 연화교(蓮花橋), 극락전의 석조기단 면석, 대웅전과 극락전을 연결하는 석조 계단, 이들 구역을 떠받치고 있는 석축 등이다.

따라서 김대성과 의상계 화엄 승려들이 계획하고 조성했던 창건기 불국사의 가람 배치는 낮은 위치에 놓인 작은 규모의 극락전 구역과 한 단계 높은 위치에 있는 큰 규모의 대웅전 구역, 즉 두 개의 원(院, 담장으로 이루어진 공간)이 계단식으로 배치된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독특한 가람 배치를 토함산의 경사면과 관련되는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단순히 지형적 특징을 그 배경으로 삼기에는 설명이 다소 부족해 보인다. 
 

불국사 가람 구조(창건기).
불국사 가람 구조(창건기).

한편 언제부터 이 사원이 불국사로 불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통일신라시대 9세기 말에 최치원(崔致遠)이 쓴 ‘대화엄종불국사아미타불상찬병서(大華嚴宗佛國寺阿彌陀佛像讚幷序)’ ‘대화엄종불국사비로자나문수보현상찬병서(大華嚴宗佛國寺毗盧遮那文殊普賢像讚幷序)’와 불국사 서석탑(석가탑)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1024년(현종 15)의 ‘불국사무구정광탑중수기(佛國寺無垢淨光塔重修記)’ ‘불국사무구정광탑중수형지기(佛國寺無垢淨光塔重修形止記)’, 고려시대 1038년(정종 4)의 ‘불국사서석탑중수형지기(佛國寺西石塔重修形止記)’ ‘불국사서석탑중수형지기추기(佛國寺西石塔重修形止記追記)’를 통하여 창건기부터 사용된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

특히 서석탑에 발견된 묵서(墨書)들은 <삼국유사>보다 250여 년 앞선 것으로, 석가탑을 서석탑으로, 창건 연대를 <삼국유사>의 751년이 아니라 742년으로 기록하고 있어서 주목된다. 

불국사는 김대성의 불교 사상에 영향을 준 승려가 의상계 화엄가(華嚴家)이고, 최치원도 “화엄종불국사”로 기록하고 있어서 화엄의 세계관을 구현한 “화엄불국”임을 알 수 있다. 불국사의 계단식 2원 가람은 의상계 화엄 승려들이 지녔던 세계관, 즉 의상(義湘, 625~702)스님이 당나라에서 스승 지엄(智儼, 602~668)스님으로부터 배웠던 화엄 사상의 정토세계관과 관련된다.

668년, 임종을 앞둔 지엄스님은 제자들에게 “잠시 미타정토(彌陀淨土)에 갔다가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에 노닐 것이니, 너희들도 나를 따라 이 뜻을 같이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지엄스님이 남긴 이 정토세계관은 그의 제자 의상스님과 손 제자 표훈스님, 김대성으로 이어져 미타정토세계의 극락전 원(院, 구역)과 연화장세계의 대웅전 원을 갖춘 불국사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불국사 발굴을 통하여 대웅전 원으로부터 자하문(紫霞門)을 통하여 청운교·백운교 아래로 내려서는 곳에서 연화장세계의 향수해(香水海)로 보이는 연못 터가 확인되었는데, 향수해 속에 자줏빛 안개(자하문)와 푸른 안개, 흰 안개가 자욱한 향수해 속에 놓인 다리(청운교와 백운교)를 묘사하는 <화엄경>의 내용과 거의 일치하고 있어서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해 준다.
 

금동아미타불좌상, 1.66m, 불국사 극락전.
금동아미타불좌상, 1.66m, 불국사 극락전.

현재 불국사에는 창건기 불사가 완공될 무렵인 8세기 중엽의 금동아미타불좌상과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이 극락전과 비로전에 각각 봉안되어 있다. 현존하는 금동불좌상 중에서 가장 큰 이들 불상은 창건기 불국사의 미타정토원(院)과 연화장세계원의 주존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의 광배와 대좌는 없어졌으며, 불상 등 뒤에는 광배를 부착하기 위한 촉이 남아 있다. 

금동아미타불좌상은 편단우견 방식으로 법의를 입고 설법인을 결한 채 가부좌하고 있다. 불상의 수인은 8세기 초에 조성된 아미타불상의 수인과 반대로 왼손을 어깨까지 들어 올리고 오른손을 무릎 위에 두었다. 불상은 장방형에 가까운 얼굴과 긴 허리를 가지고 있으며, 법의 주름은 몸의 굴곡을 따라 자연스럽고 유기적으로 표현되었다.

비록 손의 위치가 일반적인 수인과는 반대로 되어 있으나 경주 구황동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금제아미타불좌상(706년경) 등 7세기 말 8세기 초에 조성된 아미타불상의 수인을 답습하고 있다. 손의 좌우 위치가 바뀐 모습은 함께 조성한 금동비로자나불좌상에서도 확인되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은 금동아미타불좌상과 수인만 다를 뿐, 신체 비례, 착의법, 손의 위치, 광배 부착 방법 등이 같아서 함께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이 결한 지권인(智拳印)은 경상남도 산청의 석남암사지(石南巖寺址)에서 발견된 석조비로자나불좌상(766년)과는 손의 위치가 반대이지만, 통일신라시대 8세기 중엽의 지권인 비로자나불상과 같이 오른손 검지의 첫째 마디를 왼손으로 살짝 감싸 쥐고 있다. 

불국사 금동불좌상들은 다리를 감싸고 있는 법의 주름이 석불사 석조불좌상과는 다소 차이를 보이는데, 특히 양다리 사이에 표현된 법의 주름은 석불사 불좌상의 부채꼴 주름과는 완연하게 다른 모습이다. 다리 사이의 법의 주름은 8세기 전반에 조성된 경주 남산 칠불암 불좌상의 그것과 유사하여 불국사가 완성될 무렵인 8세기 중엽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금동비로자나불좌상, 1.77m, 불국사 비로전.
금동비로자나불좌상, 1.77m, 불국사 비로전.

8세기 중엽, 의상계 화엄 승려들은 석불사에서 그들의 불신관(佛身觀)을, 불국사에서 정토세계관을 조형적으로 구현하였다. 지엄, 의상, 표훈으로 이어지는 이러한 정토세계관은 60권본(卷本) <대방광불화엄경(이하 화엄경)>에 사상적인 기초를 두고 있으나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이 지권인을 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80권본 <화엄경>과 중기 밀교의 도상적인 영향도 어느 정도 받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분위기는 불국사가 완성된 8세기 중엽에 그려진 ‘대방광불화엄경변상도(大方廣佛華嚴經變相圖)’(754~755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80권본 <화엄경> 사경(寫經)의 표지로 추정되는 변상도(경전의 내용으로 그림으로 나타냄)에는 보관과 장엄을 걸친 비로자나불이 7존의 사자(獅子)가 표현된 대좌 위에서 지권인을 결한 채 가부좌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즉 <화엄경>의 경주(經主, 주인)인 비로자나불의 모습에 중기 밀교의 대일여래상(大日如來像)을 그대로 차용한 것을 보여주고 있어서 8세기 중엽 화엄 도상 성립에 미친 밀교의 영향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의상계 화엄 승려들의 정토세계관은 9세기 후반까지 이어졌는데, 의상스님의 화엄 사상이 시작된 경상북도 영주의 비로사(毘盧寺) 석조아미타불좌상과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그 예이다.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과 같이 지권인을 결하고 있으나, 석조아미타불좌상은 설법인인이 아니라 아미타정인(阿彌陀定印)을 취하고 있다. 석조아미타불좌상이 아미타정인을 결한 것은 이들 불상이 의상계 화엄 승려들의 정토세계관을 계승하고 있으나 9세기에 유행한 밀교의 영향도 적지 않게 받았다는 것을 알려 준다. 

[불교신문3618호/2020년9월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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