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마하보리사 정각상 신라 화엄으로 재해석

돌 잘라 쌓아 올려 만든 구조
평면이 원형, 둥근 천장 갖춰

불교의 모든 존상 집약적 표현
인도 중국석굴서 찾기 힘든 예

삼국유사, 김대성 원찰 아닌
‘국가차원에서 불사 이뤄진듯’

8세기 통일신라 불상에 영향
항마촉지인 불좌상 유행시켜

“… 석굴암에 이르렀다. 암자의 명해(明海)스님이 맞이하여 들어가서 잠시 앉아 있다가 석굴로 올라갔다. 모두 인공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석문(石門) 밖 양쪽에는 커다란 돌에 새긴 불상이 각각 네다섯 개 있는데, 기교하기가 짝이 없다. 석문은 잘 연마된 무지개 형태이다. 그 속에 있는 커다란 석불은 엄연하기가 마치 살아있는 것 같다. 대좌에 앉아 있는 모습은 균형이 잡히고 기교하다. 굴속 위쪽의 덮개돌과 여러 천장돌은 기울어진 것이 하나도 없다. 배열된 불상들은 마치 살아있는 듯하고 기괴하여 무어라 말할 수 없을 지경이다 …”
 

석불사 석조불좌상, 불상 높이 3.4m, 대좌 높이 1.6m.
석불사 석조불좌상, 불상 높이 3.4m, 대좌 높이 1.6m.

조선시대의 문인(文人) 정시한(丁時翰, 1625-1707)이 1688년 5월15일에 석불사(石佛寺)를 방문하고 쓴 <산중일기(山中日記)>의 내용이다. 그가 목격한 석불사의 모습은 전실(前室, 배전拜殿, 배당拜堂, 만다파Man.d.apa)과 성소(聖所, 불당佛堂, 가르바그라하Garbhagr.ha), 그것을 연결하는 통로로 이루어져 있었다. 주목되는 것은 기와지붕으로 덮여있는 지금의 전실이 당시에는 상부에 아무것도 없는 노출된 상태였다는 점이다.

석불사는 돌을 잘라 쌓아 올려 만든 조적식(造積式) 석굴로, 장방형 평면의 전실. 볼트(vault)형 천장을 한 통로, 원형의 평면․드럼(drum)형의 벽면․둥근 천장을 갖춘 성소로 이루어진 불교 석굴사원이다. 이렇게 독창적인 구조 속에 다양한 계위(階位)의 불교 존상이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다.

즉 석불사의 주존인 성소 중앙의 불좌상과 성소 벽면 위쪽에 마련된 10개의 감실(龕室) 속에 봉안된 보살좌상(10존 중 8존만 현재 남아 있음), 감실 아래 벽면의 10존의 승려상(비구상, 제자상), 범천상․제석천상, 문수보살상․보현보살상, 십일면관음보살상(十一面觀音菩薩像), 통로 양측의 4존의 사천왕상(四天王像), 전실의 8존의 팔부중상(八部衆像)과 2존의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이 그것이다.

석불사에서는 창건 시기의 이름이 석굴암(石窟庵)이 아니라 석불사 임을 알려주는 통일신라시대의 ‘石佛(석불)’ 명 기와만 출토되었으며, 조성 배경과 관련된 어떠한 명문도 발견되지 않았다. 석불사의 조성 배경은 고려시대 1289년경에 일연(一然, 1206~1289)이 찬술한 <삼국유사>의 ‘대성효이세부모(大城孝二世父母) 신문대(神文代)’의 기록에서 처음 확인된다.

김대성(金大城)이 751년에 전생(前生)과 현생(現生)의 부모를 위해 각각 석굴암(석불사)과 불국사(佛國寺)를 조성하다가 774년에 그가 죽자 국가에서 완성하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석불사 불교 존상들의 조형적인 특징이 8세기 중엽을 가리키고 있어서 <삼국유사>의 기록과 거의 맞아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불국사와 석불사가 모두 김대성 집안의 원찰과 관련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이며, 그 규모로 볼 때 그가 이 국가적인 차원의 불사(佛事)를 주도하는 역할을 맡았을 가능성이 높다. 

석불사 주존인 석조불좌상은 편단우견 방식으로 법의를 입고 항마촉지인을 결한 채 원형의 연화대좌 위에서 가부좌하고 있다. 불상은 석가모니 붓다가 인도의 보드가야(Bodhgaya, 불타가야佛陀伽耶)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깨달음을 이룬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마하보리사(摩訶菩提寺, 대각사大覺寺)와 그곳에 봉안된 정각상(正覺像)과 관련된다.
 

석불사 정면.
석불사 정면.

당(唐)과 통일신라의 구법승들은 인도로 가서 불교 성지를 순례할 때 반드시 참배하고 가장 큰 감화를 받았던 것이 마하보리사의 정각상이었다. 그들이 귀국하면서 그려온 정각상은 7세기 후반의 당과 8세기의 통일신라 불상에 영향을 주어 항마촉지인 불좌상이 유행하는 배경이 되었다. 정각상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기록은 인도를 유학하고 당나라 645년에 귀국한 현장(玄奘, 602~664)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정각상의 모습은 물론, 법량(法量, 불신佛身의 크기)과 좌향(坐向, 앉아 있는 방향)까지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정각상의 영향을 받은 당과 통일신라 불상 중에서 이 기록과 가장 일치하는 불상이 바로 석불사의 석조불좌상이다. 즉 편단우견 방식의 착의법, 항마촉지인의 수인, 동쪽 방향의 좌향, 불상의 높이와 무릎 폭 등의 크기가 <대당서역기>에 기록된 마하보리사 정각상의 그것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석불사가 마하보리사와 관련될 가능성은 비단 불상만이 아니라 석불사에서 발견된 2기의 소형 석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삼층석탑이 아니라 마하보리사 대탑을 둘러싸고 있는 4개의 소탑과 닮았다. 또한 현장이 인도에 유학하던 당시 마하보리사에 있던 인도 승려가 정각상 앞에서 새벽 예불을 올릴 때 반사경(反射鏡)을 이용하여 태양 빛을 법당 내부로 끌어들였다는 <대당서역기>의 기록과 같이 석불사에서도 전실 바닥의 고맥이돌(매끈하게 다듬은 돌)을 설치하여 그곳을 통해 빛을 반사시켜 석굴 속으로 유도한 것을 볼 수 있다.

석불사 석조불좌상이 마하보리사 정각상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석불사는 마하보리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건축적인 구조와 도상 구성을 보여주고 있어서 정각상을 단순히 답습만 한 것이 아니라 8세기 중엽에 신라사람들에 의해 그것이 재해석되어 표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석불사에서 그것이 어떻게 재해석되었는지는 성소 벽면 위쪽의 감실 보살상들과 아래쪽의 여러 존상들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감실 속 보살상들의 성격에 대해서는 좀 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지만, 아래쪽에 돋을새김(고부조)된 불교 존상들을 예불의 방향인 오른쪽(시계바늘 방향, 태양과 생명의 방향)부터 보면, 범천상, 문수보살상, 승려상(제자상) 5존, 십일면관음보살상(주존 바로 뒤쪽), 또 다른 승려상(제자상) 5존, 보현보살상, 제석천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범천상과 제석천상, 문수보살상과 보현보살상은 석굴 속에서 주존 불상과 마주 보는 위치에 있을 때 좌우의 위치가 서로 바뀌는 중국 석굴의 도상 배치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이들 존상 중에서 문수보살상과 보현보살상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하 화엄경)>의 설주(說主)보살(붓다을 대신하여 설법하는 보살)이라는 점에서 석불사가 화엄사상 속에서 재해석되었을 가능성이 높여 준다.

주목되는 것은 석불사가 조성된 8세기 중엽에 신라 불교계를 주도했던 것이 화엄종이었다는 점이다. 화엄 승려들은 석가모니 붓다가 정각(正覺, 막 깨달음을 이룸)한 자세로 14일간 삼매(三昧)에 들어가 펼쳐 보인 내용이 <화엄경>이라는 점에 주목하였고, 당시 유행하던 마하보리사의 정각상이야말로 <화엄경>을 설하는 석가모니 붓다의 모습이라고 여기게 된다. 7세기 후반의 당나라 화엄 승려들로부터 시작된 이러한 생각은 이곳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의상(義湘, 625~702)과 그의 제자들(표훈表訓-김대성)로 이어졌는데, 그들에 의해 마하보리사 정각상이 다시 신라적으로 해석되어 석불사에서 구현되었다.
 

석불사 성소.
석불사 성소.

그런데 석불사가 조성되던 8세기 중엽에 찬술된 60권 <화엄경>의 주석서에서는 경전의 주인을 노사나불(盧舍那佛)이 아니라 십불(十佛)로 기록하고 있다. “10”은 십지(十地), 십주(十住), 십현문(十玄門), 십전유(十錢喩) 등 화엄 철학의 골격을 이루는 숫자이자 화엄 교학에서 만수(滿數, 완성된 숫자)로 여긴다. 성소 벽면의 승려상(비구상, 제자상)과 그 위 감실(龕室) 속의 보살상의 숫자를 의도적으로 “10”에 맞춘 것도 주존 불상 속에 십불의 성격이 들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들 승려상, 보살상, 불상은 고타마 싯다르타 태자가 출가하여 비구(승려)와 보살을 거쳐 석가모니 붓다가 되는 수행의 과정과 단계를 보여주고 있어서 석불사의 주존 불상이 화엄사상 속에서 재해석된 모습이라고 하더라도 그 기본적인 성격은 역사적인 석가모니 붓다의 모습, 즉 마하보리사 정각상임은 분명하다. 한편 감실 속 10존의 보살상이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의 유마거사상(維摩居士像)와 문수보살상, 밀교의 팔대보살상(八大菩薩像)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화엄 사상 외에 밀교적인 성격이 석불사에 어느 정도 들어가 있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석불사의 불교 존상은 상부구조가 노출되어 마모가 심했던 전실의 팔부중상과 금강역사상이 부분적으로 보수된 것을 제외하곤 대부분 창건기인 8세기 중엽에 조성된 것이다. 이들 존상은 계위에 맞게 그 성격이 잘 표현되어 있는데, 숭고한 종교성을 엿보이는 불상, 온화함과 친근감이 느껴지는 보살상, 수행자의 진지한 모습이 느껴지는 승려상(제자상), 붓다의 가르침을 청하는 듯한 범천상과 제석천상, 불법(佛法)의 수호자답게 근엄한 자세를 취한 사천왕상․금강역사상․팔부중상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석불사의 완벽한 축조 기술과 수준 높은 표현력은 앞서 조성되기 시작한 불국사에서의 풍부한 경험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석불사는 인도와 중국 석굴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평면이 원형이고 천장이 둥근 원형지향적 구조의 성소를 갖추고 있다는 점, 불상․보살상․승려상 등 거의 모든 불교 존상들을 집약적으로 표현하였다는 점, 인도의 마하보리사 정각상을 신라의 화엄 사상 속에서 재해석하여 표현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불교신문3614호/2020년9월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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