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왕실은 왜 철로 불상을 조성했을까?

9세기 중엽 시작된 철불 조성
당나라에서 귀국한 선종 스님
관련될 것이란 기존 견해 의문

100년 전 비해 경제상황 악화
비용 적게 들고 효과 비슷한
대형 철조불좌상 조성하며
왕실 발원 면모 갖추려 한 듯

통일신라 이후 혜공왕(惠恭王, 758~ 780 재위)대까지 세워진 사원은 모두 260개로, 이 중 191개가 경주에, 69개가 지방에 분포하였다. 신라 하대(下代)가 시작되는 원성왕(元聖王, 786~798 재위)대부터 헌안왕(憲安王, 857-861 재위)대까지 경주에 11개, 지방에 33개의 사원이 조성되고, 경문왕(景文王, 861~875 재위)대부터 경순왕(敬順王, 927~936 재위)대까지 경주에 6개, 지방에 49개의 사원이 세워졌다.

이는 통일신라 말기로 갈수록 불교 사상과 신앙이 왕경 경주에서 지방으로 확산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주도적인 역할은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선종 승려들과 이들을 후원했던 지방 세력(호족 등)이었다. 
 

남원 실상사 철조노사나불좌상(정면), 높이 273cm.
남원 실상사 철조노사나불좌상(정면), 높이 273cm.

선종 승려 무염(無染, ~888)의 탑비인 낭혜화상탑비(朗慧和尙塔碑, 890년)에 인용된 성주사비(聖住寺碑, 김입지 찬술, 845년경)에 의하면, 충청남도 보령의 성주산문(聖住山門) 성주사(聖住寺) 금전(金殿, 불전)에 봉안한 철조장육세존상(鐵造丈六世尊像)은 중앙 진골 출신이자 이 지역의 세력가인 위흔(魏昕, 김양, 문성왕의 장인, 808~857)이 후원한 것이며, 경북 문경의 희양산문(曦陽山門) 봉암사(鳳巖寺)는 지방 세력가 심충(心忠)이 자신의 땅을 기증하여 세운 사원이다. 전남 곡성의 동리산문(銅裏山門) 대안사(大安寺, 태안사 泰安寺), 강원도 강릉의 사굴산문(闍崛山門) 굴산사(掘山寺) 등 선종 사원도 이러한 예에 속한다.

사실 선종 승려에 대한 후원은 이미 교종 승려들과 친분이 있던 신라 왕실에서 먼저 시작하였다. 흥덕왕(興德王, 826~836 재위)과 그의 동생 선강태자(宣康太子, 김충공, 민애왕의 아버지)가 홍척(洪陟)이 828년에 전북 남원의 실상산문(實相山門) 실상사(實相寺)를 세울 때 후원하였으며, 헌안왕(憲安王, 857~861 재위)은 858년에 체징(體澄, 804~880)을 모시기 위해 기존의 화엄종 사원이던 가지산사(迦智山寺, 장흥 보림사)를 중수하였다.

주목되는 사실은 이들 사원을 개창하거나 중수한 후, 불전(佛殿)에 봉안한 불상들이 이전에는 한 번도 불상재(佛像材, 불상 재료)로 사용된 적이 없던 철(鐵)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실상사와 보림사 철조불좌상은 비교적 온전한 상태를 갖추고 있어서 이 시기에 조성된 왕실 발원 철불의 면모를 잘 보여 준다. 
 

실상사 철조노사나불좌상(측면).
실상사 철조노사나불좌상(측면).

실상사 철조불좌상은 광배와 대좌가 없어졌으며, 오른 다리 앞쪽과 등 뒤쪽이 부분적으로 파손되어 보수된 상태이다. 몸에는 분할 주조로 인해 생긴 분할선(分割線, 여러 판을 이은 거푸집을 사용함으로써 판과 판의 이음새로 쇳물이 흘러나와 생긴 선)과 형지(型持, 안틀과 바깥틀을 고정하는 것)가 남아 있으며, 턱과 입에서는 후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채색의 흔적이 확인된다.

불상은 통견 방식으로 법의를 입고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어 올렸으며 왼손은 무릎 위에 살짝 내린 설법인을 결한 채 가부좌하고 있다. 수인은 양손의 좌우 위치가 바뀌었지만, 불국사 금동아미타불좌상과 같은 수인이다. 장방형의 얼굴에 넓고 편평한 육계, 좁은 이마, 가늘고 긴 눈, 짧은 코와 인중, 도톰한 입술, 작은 입, 부은 듯한 눈두덩, 양감이 느껴지는 양 볼을 가지고 있으며, 좁은 어깨, 편평한 가슴, 긴 허리를 하고 있다.

법의는 몸의 굴곡을 따라 자연스럽게 처리되었는데, 어깨와 배 위의 띠 주름은 9세기 불상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실상사 철불의 조형은 8세기 중엽 이후에 보이는 경주 불상의 그것과 유사하다. 

실상사 철조불좌상은 경주 불상을 계승한 수준 높은 조형성과 압도적인 크기를 갖추었는데, 조성 시기는 대략 실상사 개창 초기인 9세기 중엽으로 본다. 불상의 존격에 대해서는 <지리산실상사사적(智異山實相寺事蹟)>에 “노사나불”로 기록되어 있고, “노사나불”의 명문을 지닌 강원도 동해의 삼화사(三和寺) 철조불좌상(9세기 중엽)과 같은 수인을 취하고 있어서 노사나불상으로 추정된다.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높이 251cm.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높이 251cm.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머리와 육계의 일부가 보수되었으며, 몸에는 분할 주조로 생긴 여러 개의 분할선이 나 있다. 불상은 통견 방식으로 법의를 입고 지권인(智拳印)을 결한 채 가부좌하고 있다. 두 손을 명치 앞에 둔 채 오른손으로 왼손의 검지손가락을 감싸 쥐고 있다. 무뚝뚝한 표정의 얼굴에 좁은 이마, 부은 듯한 눈두덩, 눈꼬리가 올라간 눈, 편평한 콧등, 도드라진 인중, 두꺼운 입술을 가지고 있으며, 좁은 어깨와 편평한 가슴의 불신(佛身, 몸)을 갖추고 있다.

가슴을 열어젖힌 채 양어깨를 걸치고 흘러내린 법의는 탄력감 없이 축 늘어진 모습이다. 왼쪽 팔뚝에 주조된 명문에는 석가모니 붓다의 열반 후 1808년이 되던 858년(대중 12) 7월17일에 무주(武州) 장사(長沙) 부관(副官)인 김수종(金遂宗)이 아뢰고 정왕(靖王, 헌안왕)이 8월22일에 칙서를 내려 859년에 불상을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 884년)에는 860년(선제, 宣帝 14) 2월에 김언경(金彦卿, 김수종)이 일찍이 제자의 예를 표하며 체징 선사의 문하에 들어갔는데, 청봉(淸俸, 봉급)을 덜고 개인의 재산으로 철 2500근을 보시하고, 망수택(望水宅)과 이남택(里南宅)이 금 160푼(分)과 세곡 2000석을 내어 노사나불상 1구를 주조하여 선사가 거처하는 사원을 장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보아 당시에는 지권인 불좌상을 비로자나불과 노사나불로 혼용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불상 무게로 산정해 보면, 실제 불상 조성에 소요된 철이 김수종이 희사한 것보다 훨씬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로 보아 헌안왕이 보림사 중수와 철불 조성의 주체였고 김수종과 나머지 사람들이 보조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망수택과 이남택이 시주한 금은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철불에 금을 입혔다는 기록을 통하여 도금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 도헌(道憲, 824~892)이 강원도 원주 현계산(賢溪山) 안락사(安樂寺, 현 거돈사)에서 단의장옹주(端儀長翁主, 경문왕 동생)의 후원을 받아 한찬(韓粲) 김의훈(金嶷勳)을 위해 867년경에 장육현금상(丈六玄金像)을 주조하고 선(銑, 황금)을 발랐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측면).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측면).

보림사 철불 조성의 상황은 9세기 중엽에 시작된 철불 조성이 당나라에서 귀국한 선종 승려들과 관련될 것이라는 기존의 견해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보림사가 선종 승려 체징을 위해 중수된 것은 사실이지만, 철불 조성에 체징스님의 의사가 반영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신라의 선승(禪僧)들이 머물던 당나라 선종 사원의 선원(禪院)에는 불상을 모신 불전(佛殿)이 없고, 주지가 상당설법(上堂說法)하는 법당만 있었기 때문에 철불 조성에 있어서 당나라 불상의 영향은 거의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히려 9세기 중엽에 조성된 철불들은 신라 왕경을 중심으로 유행하던 불상을 모델로 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실상사 철불의 설법인과 보림사 철불의 지권인은 양손의 좌우 위치가 바뀌었지만, 각각 8세기 후반부터 신라 화엄종의 중심 사원이었던 불국사의 금동아미타불좌상과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의 수인을 답습하고 있다.

선종 승려들은 대부분 입당(入唐) 유학 전에 화엄종 사원에서 출가하여 수행하였기 때문에 불국사의 금동불좌상을 모델로 한 철불을 그들이 머물던 선종 사원의 주존으로 봉안하는데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을 것이다. 다만 8세기 불상의 지권인을 보림사 철불과 같이 9세기 철불에서 답습한 것은 쉽게 이해가 되지만, 불국사 금동아미타불좌상의 설법인, 즉 아미타불의 설법인을 9세기 중엽에 실상사 철불과 같은 철조노나사불좌상의 수인으로 차용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좀 더 설명이 필요하다. 

신라 왕실의 후원을 받아 조성된 실상사와 보림사 철불은 도상적으로는 9세기 경주 불교계를 주도했던 화엄 사상과, 재료적으로는 지방에서 구하기 쉬웠던 철과 관련된다. 철불 조성이 시작되던 9세기 중엽의 신라 왕실의 경제적인 상황은 불국사 금동불좌상과 백률사 금동약사불입상 등 대형의 금동불상이 조성되던 8세기 중엽과 달리 매우 열악한 상태였다. 신라 왕실에서는 금동불상에 비해 비용은 적게 들고 종교적인 효과는 비슷한 대형의 철조불좌상을 통하여 왕실 발원 불상의 면모를 갖추고자 하였다. 

[불교신문3622호/2020년10월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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