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현스님의 초기불교에서 禪까지] <62> 금강경의 수행론⑭ 일상무상분
[등현스님의 초기불교에서 禪까지] <62> 금강경의 수행론⑭ 일상무상분
  • 등현스님 고운사 화엄승가대학원장
  • 승인 2020.05.16 15:05
  • 호수 358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당신도 아라한과에 들 수 있다

상계에 무상함 알고
아무것에도 집착 않으면
소유나 명예로 다툴 일 없어
등현스님
등현스님

자아에 대한 잘못된 견해가 사라져서 6가지 감각기관의 대상을 ‘경험하는 자’가 없음을 알고, 마음은 식수상행의 연기를 쫓아 끊임없이 생멸함을 알게 되면, (성인의) 흐름에 들었다고 한다. 흐름에 들었다고는 하나 아직 욕계의 대상(법)들에 대한 잠재적 습관과 집착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고, 다만 집착할 ‘나’가 없음을 본 것뿐이다. 이를 입류(入流, 수다원) 또는 견도(見道)라 한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 돌아가서 즐길 것이 많음을 본다. 오욕락의 즐거움은 인간 세계에서 천상의 여섯세계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의 화려한 비단처럼 아름답게 펼쳐져 있음을 본다. 눈이 있고 귀가 있고 느낌이 있는 자가 그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싫어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그 즐거움은 무상하여 짧고, 그 과보의 고통이 오래감을 본다. 또한 그 즐거움에 실체가 없음을 보고 그 즐거움에 되돌아가지 않을 것을 다짐하지만, 잠재된 욕망 때문에 한 번은 돌아가서 그 한을 푼 후에 집착이 떨어지는 것을 일래(一來, 사다함)라 한다. 

마치 한 소년이 아름다운 여인을 연모하다가 마침내 결혼하였지만, 그 여인에 대한 많은 허물을 경험한 후에 환상이 깨어져서 그 여인을 떠나는 것과 유사하다. 이와 같은 상태를 경에서는 이렇게 묘사한다.

“수보리야, 그대는 어찌 생각하는가? 사다함이 생각하기를 ‘나는 일래과의 과위를 얻었노라’하겠는가? 수보리가 사뢰었습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사다함이 ‘나는 일래과의 과위를 얻었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래의 도에 들어갈 그 어떠한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래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돌아갈 법이 없다는 것은 욕계가 즐길 것이 없음을 깨달아서 더 이상 욕계로 되돌아가서 즐기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사다함을 일래라고 하는 이유는 욕계에 대한 거친 욕망은 다스려졌지만 욕계에 대한 미세한 욕망과 업의 과보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욕계에 대한 미세한 욕망의 무상함을 보고 집착할 것이 없음을 알면 욕계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불환(不還, 아나함)과위에 든다.

경에서는 이렇게 표현한다. “수보리야, 그대는 어찌 생각하는가? 아나함이 생각하기를 ‘나는 아나함의 과위를 얻었노라’ 하겠는가? 수보리가 사뢰었습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나함이 ‘나는 불환과를 얻었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불환의 도에 들어갈 그 어떠한 법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환(불래)이라 합니다.”

이처럼 욕계의 오욕락에 대한 집착이 완전히 해체된 사람이 욕계에 대한 흥미를 잃은 것을 돌아갈 법이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과위를 득한다는 개념이 발생하지 않는다. 이 장에서는 본격적으로 대상(법)의 공함을 다루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나함을 불환이라 하는 이유는 욕계에 대한 욕망이 다스려져서 다시는 욕계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색계와 무색계라는 천상계의 아름답고 평화로운 색으로 빚어진 세계에 대한 욕망과 집착이 아직 남아서 상계에 다시 나기를 욕구하고 하계에 다시는 태어나지 않기를 원하므로 불환이라 한다. 이때 불환의 뜻은 욕계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색, 무색계 등 상계에 대한 미세한 집착이 온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다.

영리한 근기(利根)는 인간 세상에서, 둔한 근기(鈍根)는 색계의 구경천이나 무색계의 유정천이라는 곳에 태어나서 무상함을 직접 경험하고 깨달아야만 그 집착을 끊을 수 있다. 물론 이 세계에 대한 ‘오해(무명)’가 있기 때문에 이 세계들에 대한 환상이 있는 것이다. 대상에 집착하면 미세한 ‘들뜸’도 있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환이라고 하는 이유는 인간의 근본이 욕계이기 때문이다.

상계에 대한 무상함을 알고 아무것(법)도 집착할 것이 없음을 보면 다시는 3계(욕계, 색계, 무색계)에 돌아오지 않는 아라한과에 든다. 안팎의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그 누구와도 소유나 명예 때문에 다툴 일이 없다. 그러므로 아라한을 무쟁(無諍)이라고 한다. 

[불교신문3582호/2020년5월16일자]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