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 열반 10주기 특별기획] ⑫ 해인사에서 대중생활 및 선지식들과의 인연
[법정스님 열반 10주기 특별기획] ⑫ 해인사에서 대중생활 및 선지식들과의 인연
  • 여태동 기자
  • 승인 2020.04.22 14:03
  • 호수 357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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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과 강원생활로 ‘수행자의 근본’ 다졌다

금봉선사 ‘본래면목’ 가르침 받고
운허스님에게서는 ‘화엄경’ 공부
자운스님에게서 戒德 배우기도

서울법대 황산덕 교수 인연으로
‘사상계’ 읽으며 세상 일 접해
법정스님이 비구계를 수지하기까지 대중생활을 했던 해인사 전경.
법정스님이 비구계를 수지하기까지 대중생활을 했던 해인사 전경.

법정스님이 1957년부터 머물며 수행했던 해인사는 ‘비구 법정’을 있게 근본을 세운 도량이다. 스님은 <버리고 떠나기>라는 저서의 ‘아직 끝나지 않은 출가(出家)’라는 글에서 “나는 아마 전생에도 출가 수행자였을 것이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직관적인 인식만이 아니라 금생에 내가 익히면서 받아들이는 일들로 미루어 능히 짐작할 수 있다.”며 출가수행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며 해인사와의 인연을 설명하고 있다.

“해인사 선원(禪院)에서 좌선을 익히고 강원(講院)에서 불교의 경전을 대하면서 한국불교의 현실 앞에 적잖은 갈등과 회의를 지니지 않을 수 없었다.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망각한 채 전통과 타성에 젖어 지극히 관념적이고 형식적이며 맹목적인 이런 수도생활에 선뜻 용해되고 싶지 않았다. 아침 저녁으로 장경각(藏經閣)에서 따로 예불을 드리면서 나 자신을 응시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해인사 시절 법정스님은 선원 조실스님으로 주석했던 금봉(錦峰)선사로부터 큰 깨달음을 얻는다. 스님과 함께 함께 조실 방에 들어간 도반스님이 금봉선사와 나누는 선문답을 곁에서 들었는데 “번쩍 귀가 뜨이고 제정신이 돌아왔다”고 했다.

“도반이 조실스님께 여쭈었다. ‘저는 본래면목(本來面目) 화두(話頭)를 하는데 의문이 가지 않아 공부가 잘 안됩니다.’ 본래면목이란 부모에게서 낳기 이전 본래의 내 모습은 무엇이냐는 의문. 화두란 참선할 때 끝없이 추구하는 명제다. 이 말을 들은 선사는 즉석에서 다그쳤다.

‘본래면목은 그만두고 지금 당장의 그대 면목은 어떤 것인가.’ 이 법문을 듣고 섬광처럼 부딪혀온 그때의 전율 같은 감흥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나는 더 물을 일이 없었다. 이때부터 좌선하는 일에 재미가 나서 무료하지 않았다. 잔잔한 기쁨으로 맑은 정신을 지닐 수 있었다.”

법정스님은 해인사에서 다양한 선지식들을 만났다고 술회한다.

“해인사에 살면서 누린 은혜는 무엇보다도 고마운 스승들을 가까이서 모실 수 있었던 일이다. 그 시절의 주지이신 자운(慈雲) 율사스님께서는 계덕(戒德)이 무어라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우리에게 중노릇 잘하라고 구족계를 일러주신 분도 자운스님이다 …(중략)…선원의 유나로 계신 지월(指月)스님을 잊을 수 없다. 항상 간절한 말씀으로 후학들을 일깨워주셨고, 새파랗게 어린 사미승한테도 존댓말을 쓰셨다. 스님은 겸손과 하심이 몸에 배여 있었다. 조실스님이 출타하거나 안 계실 때 몇 차례 상당법문을 하셨는데, 늘 한결같은 내용을 똑같은 법문으로 하셨지만 들을 때마다 새롭게 들렸다. 해진 신발을 낱낱이 꿰매 신는 분이었다.”
 

법정스님이 경전공부에 심취했던 해인사의 팔만대장경 판전 모습.
법정스님이 경전공부에 심취했던 해인사의 팔만대장경 판전 모습.

법정스님은 해인사에서 명봉(明峰) 강주스님으로부터 경전을 배웠고, 운허스님으로부터 <화엄경>을 배웠다. 운허스님과의 인연은 <불교사전> 편찬 일에 동참하는 계기가 됐다. 이후 상경해 동국역경원 역경위원과 불교신문에 글을 싣는 인연을 맺게 된다.

해인사에서의 대중생활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지만 공동체 규범을 방해하는 스님을 접하기도 했다. 이는 스님의 저서 <텅빈충만>의 ‘가야산 후배들에게’라는 글에 담겨 있다.

“그 시절의 선원은 ‘유이무념위종(唯以無念爲宗, 오로지 무념으로써 삶의 지표를 삼으라)’의 편액이 붙어 있는 응향각(凝香閣, 선열당의 전신)인데, 그 한쪽 방에 응선(應禪)노스님이 머물고 있었다. 스님은 이따금 별난 짓을 하였다. 세상이 어둡다고 한낮에 등불을 켜고 다니면서 큰방에 들지 않고 깡통을 가지고 후원에서 얻어다 따로 공양을 드는 때도 있었다. 때로는 문짝을 때려 부수기도 하고 아무에게나 마구 욕지거리를 퍼붓기도 하였다. 스님의 웃는 얼굴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말하자면 대중에서 항상 어깃장만 놓는 괴각(乖角)노릇을 하였다. 끝내는 몹시 추운 겨울날 용탑전 아래 골짝에서 굳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초우를 먹고 자살하신 것이다. 일생괴각 처중무익(一生乖角 處衆無益), 평생토록 어깃장만 놓으면 대중에 있어서도 아무 이익이 없다고 한 청매선사의 교훈이 떠올랐다.”

이런 경험으로 인해 법정스님은 대중생활에 대해 재점검하는 기회를 가진 듯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수도도량이란 번듯한 건물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 진정한 수도인이 살 때 허물어져가는 낡은 집에서도 빛이 나는 법이다. 말이 없는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질서와 조화와 덕화를 끼치고 있는 구참(久參) 수행자가 모여 있는 곳이 좋은 수도도량이다. 항상 온유하고 인자하고 후덕하면서도 수행자로서 깨어 있는 기상을 지닌 경험 많은 수행자를 가까이서 모실 수 있는 것은 두고두고 간직할 출가자의 복이 아닐 수 없다.”

“평생토록 어깃장만 놓으면 대중에 있어서 아무 이익이 없다”는 교훈을 간직했던 법정스님은 홀로 산중에 살면서도 깨어 있는 생각을 평생 간직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해인사에서 도반들과 함께 했던 시절 모습(왼쪽에서 두 번째가 법정스님).
해인사에서 도반들과 함께 했던 시절 모습(왼쪽에서 두 번째가 법정스님).

법정스님이 해인사에서 대중생활을 할 때 아주 특별한 인연을 만난다. 불교신자로 진보적인 인사였던 황산덕 서울대 법대 교수였다. 여수 흥국사 주지 명선스님(법정스님과 해인강원 3기 동기생)은 “황산덕 교수가 해인사를 방문해 강연을 했고, 해인사 스님들과 교분을 가졌는데 법정스님과 대화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고 말했다.

법정스님 역시 사촌동생인 박성직 거사와 나눈 1959년 7월 12일자 편짓글 속에는 황산덕 교수와 인연을 기록하고 있다.

“서울 법대에 계신 황산덕 교수께서 지난 해 여름부터 나에게 사상계지를 보내 주고 있다. 거기에서 유 선생(농촌운동가 유달영)님과 함 선생(함석헌 목사)님의 글을 감명 깊게 읽을 수 있었다.”

이 대목을 유추해 볼 때 법정스님은 1958년 해인사 시절부터 사회를 바라보는 진보적인 시각을 갖추어 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법정스님의 편짓글에서는 실천행을 강조하는 글도 보인다.

“우리들이 훌륭한 사상에 공감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를 실생활에 옮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행(行)이 없는 이론은 공론(空論)에 지나지 않는다. 남이 행하기 어려운 것을 내가 행하는 데 뛰어난 인생의 보람이 있는 것이다. 성직아! 하나부터 행해라. 네 주위에 있는 일부터 행(行)으로 옮겨라. 우리 인격수행에는 무엇보다도 실행(實行)이 기둥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처럼 법정스님은 자신이 말하거나 쓴 글에 대해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기 때문에 많은 대중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었다. 해인사에서 학인시절을 보내고 비구계(구족계)를 받은 법정스님은 가야산 후배들(학인)에게 당부의 말을 <텅빈충만>의 ‘가야산 후배들에게’라는 글을 통해 남겼다. 이는 곧 한국불교에 교단에 들어와 배우는 수행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학인이란 영원한 구도자다. 단순히 강원에서 글을 배우는 풋중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출가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것은 다른 한편 출세간에서 그만큼 오염이 덜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신이 무엇 때문에 출가를 했는지, 출가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나날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화두를 챙기듯 때때로 되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평생 중노릇을 하는 데에 배우고 익히고 다지는 기초교육기관이 강원(講院)이다. 단순히 글 몇 줄 배운 것으로 자족한다면 밥중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학인이라면 먼저 구도자로서 학구적인 자세부터 갖추어야 한다. 배우는 일에 진지하고 열의 있게 대할 때 학구적인 자세는 저절로 갖추어지게 마련이다.”

또한 법정스님은 <화엄경> ‘입법계품’에 나오는 선재동자같은 구도행을 강조하고 있다.

“선재동자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53선지식을 한 사람 한 사람 방문하는 과정에서 그때마다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고 구도의 의미를 다지는 그런 간절한 자세로써 배우고 익히면서 거듭거듭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중략)… 경전에 나오는 아난이나 수보리, 사리불이나 가섭존자 등을 부처님 당시에 생존했던 과거의 인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늘 내 자신으로 볼 때, 우리가 배우는 경전은 모두 구체적으로 살아 있는 법문으로 내 앞에 메아리칠 것이다.”

법정스님의 해인사 대중생활은 경전의 가르침, 즉 부처님 법(法)을 알게 했고 ‘현전면목’ 화두에 대한 깨침으로 불교수행의 궁극이 무엇인지를 일깨우게 했다. 출가수행자의 흐트러짐 없는 생활도 해인사 대중생활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으로 본다.
 

1959년 동안거 해제 후 불국사 순례에서 찍은 사진.
1959년 동안거 해제 후 불국사 순례에서 찍은 사진.

취재협조 : (사)맑고 향기롭게

해인사 · 여수=여태동 기자 tdyeo@ibulgyo.com

[불교신문3576호/2020년4월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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