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 열반 10주기 특별기획] ⑨ 미래사에서의 행자생활
[법정스님 열반 10주기 특별기획] ⑨ 미래사에서의 행자생활
  • 여태동 기자
  • 승인 2020.01.17 11: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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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두 번 나무지게질… 스승방에 군불도 지펴

세속의 ‘박재철’ 떠나보내고
‘비구 법정’으로 출발점에 서
“행자실서 목침 베고 자는데도
잠이 늘 꿀맛 같던 그런 시절”
법정스님이 출가해 처음 행자생활을 시작한 통영 미래사 전경.
법정스님이 출가해 처음 행자생활을 시작한 통영 미래사 전경.

1955년 겨울의 초입 서울 안국동 선학원에서 효봉스님으로부터 삭발을 한 법정스님은 곧바로 통영 미래사로 내려갔다. 은사인 효봉스님의 명에 의해서다. 서울에서 종단의 뜻있는 여러 스님들과 함께 불교정화를 위해 분주하게 활동하고 있었던 효봉스님은 함께 내려오지는 못했지만 ‘곧 뒤따라 내려가겠노라’는 언지(言志)를 내린 터였다.

스님이 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온 세상을 얻은 듯했던 법정스님은 기쁜 마음으로 남해 바다가 출렁이는 통영으로 향했을 것이리라. 스님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찾아보기 위해 지난 12월28일 통영 미래사로 향했다. 이제는 연륙교가 생겨 자동차로 절 앞 주차장까지 갈 수 있는 편리한 교통이었지만 법정스님 당시에는 며칠이 걸려야 도착했을 멀고 먼 오지였을 것이다.

미래사 입구에는 ‘효봉성지’라는 안내팻말이 서 있었다. 효봉스님이 한국전쟁 당시 해인사에서 수행을 하다가 전란의 휴유증으로 도저히 수행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자 후학들의 권유에 의해 부산을 거쳐 해남으로 향하다가 배멀미로 내린 곳이 통영이었다.

‘절구통 수좌’라는 명성에 걸맞게 그곳에서도 수행처를 찾던 효봉스님일행은 미륵도 미륵산의 용화사에 자리를 잡아 정진을 시작했으나 대처승 사찰이었던 그곳이 수행처로서는 마땅하지가 않았다. 열악한 상황에서도 용화사 산내 암자인 도솔암 큰방에 ‘동방제일선원’을 열었다.

수행정진 의지가 왕성했던 효봉스님의 제자 구산스님 일행은 안정적인 수행처를 마련하기 위해 미륵산 북쪽 산기슭에 수행처 미래사를 찾아내 장차 효봉스님을 모셔 올 요량이었다. 효봉스님은 구산스님이 미래사 불사를 완성하자 초대주지로 임명했다.

지금은 미륵산 뒤쪽으로 따로 난 길이 있어 찾아가기 편리한 미래사지만 당시에는 용화사를 거쳐 올라와야 했던 ‘오지(奧地) 중의 오지’였다. 당시에도 서 있었을 법한 삼나무와 편백나무는 이제 거대한 숲이 되어 울울창창하다. 벌써 60년이 훌쩍 넘은 시간이 지났으니 미래사 뒤편 삼나무는 아름드리 거목이 되어 있었고, 미래사를 휘감아 도는 미륵산에 두루 퍼져 있는 편백나무 역시 거대한 숲이 되었다.

1955년 끝자락에 스님이 된 법정스님은 미래사에서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그곳에는 효봉스님의 상좌인 구산스님이 절을 지키고 있었다. 법정스님에게는 큰사형이었다.효봉스님은 서울에서 종단정화 불사일을 처리하고 법정스님의 뒤를 따라 미래사로 내려왔다.

효봉스님은 불교의 구태를 씻어내기 위한 정화불사에 나서고 있었지만 그런 일에 앞서 수행에 진력하는 참도인이었다. 일제강점기에 평양에서 판사생활을 했다고도 전해지며 서른여덟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출가수행자가 되어서 부단없는 정진으로 종단어른으로 추앙받기에 충분한 인품을 갖추고 있었다.

효봉스님은 미래사로 내려와 남해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언덕배기에 지어진 ‘효봉암’이라 불리는 곳에서 수행했다. 취재를 위해 해거름 무렵 미래사에 도착하니 주지 여안스님이 가장 먼저 안내해 준 곳이 ‘효봉암지’였다. 그곳을 반드시 보아야만 미래사를 설명할 수 있다는 듯 발걸음을 서둘렀다.

편백나무 빽빽한 숲길을 가로질러 잡목을 헤치며 산허리를 올라가니 돌샘이 나오고 그 위에 평평한 암자터가 나왔다. 그곳이 효봉암지였다. 지금은 터만 남은 곳에 ‘曉峰庵舊地(효봉암구지)’라는 표지석이 서 있었다.

“이곳에서 남해바다를 보면 가깝게는 한산도가 보이고 그 너머로 거제도가 보입니다. 문수보살의 상징인 한산습득의 이미지와 보현보살이 ‘크게 제도한다’는 이미지인 ‘거제(巨濟)’의 의미를 담은 거제도(巨濟島)가 그 너머로 보이는 곳입니다. 이런 원력이 담겨 있는 곳에서 수행을 하셨던 효봉스님의 발원이 얼마나 넓었을까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한산도가 내려다보이는 바다는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물리칠 때 학의 날개를 편 듯한 모양을 내보였던 학익진(鶴翼陣)을 펼쳐 보이기도 한 곳이었다. 변화무쌍한 바다를 바라보면 시대의 아픔을 껴안고 싸웠던 장수와 중생제도를 위한 깨달음을 얻기 위한 선지식의 용맹정진이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친다.

훌륭한 스승 아래서 행자생활을 시작한 법정스님은 당시의 여느 행자들처럼 엄격하게 절집의 생활을 익혀나갔다. 땔나무가 부족했던 당시 법정행자는 속가에서도 하지 않았던 노동을 했다. 톱과 낫을 들고 지게를 지고 하루에도 몇 번 씩 미륵산을 오르내리며 등짐을 져 날라야 했다.

수행공동체에서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노동력을 분담해야 하는 것을 의미했다. 절집에 들어온 행자생활은 세속의 묵을 때를 씻어내기 위한 과정이었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며 절집의 습속을 몸에 익혀야 했다. 그 엄혹한 과정이 행자생활이고 그 시기에는 노동과 불교공부를 한시도 떼지 않고 해야만 했다.

특히 법정스님이 출가했던 당시는 한국전쟁의 포화가 갓 지나간 시기여서 절집살림의 곤궁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런 궁색한 살림살이에 힘을 보태기 위해서 행자생활은 그만큼 고달프지 않을 수 가 없었다. 법정스님은 자신의 저서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의 ‘박새의 보금자리’라는 글에서 미래사의 행자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중 되러 찾아간 절이 통영 미래사, 집이 낮아 문지방에 연방머리를 받히면서, 배가 고파서 우물가에 흘린 국숫발도 맛있게 주워 먹던 시절이었다. 행자실에서 딱딱한 목침을 베고 자는데도 일이 고되어 잠이 늘 꿀맛 같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때는 조촐한 선원(禪院)이었는데, 요즘은 집도 커다랗게 세워졌고 절 분위기도 예전과는 딴판이 되었다.”

엄격한 행자생활 가운데서도 맏사형이었던 미래사 주지 구산스님은 법정행자를 ‘아우님’이라 부르며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고 한다. 소설가 정찬주씨는 자신의 저서 <그대만의 꽃을 피워라>에서 법정스님으로부터 들은 행자시절을 서술했다. “행자 법정의 일과는 효봉스님 곁에서 시봉하는 일과 하루에 두 짐씩 나무를 하는 일이었다. 아침에 한 짐, 오후에 한 짐씩 지게질을 했다. 효봉스님 방에 군불을 때는 일도 했다.”

스승의 방에 군불을 때는 일을 하면서 행자 법정은 남해바다를 매일 바라다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자신이 어린시절 살았던 남해바다의 추억을 떠올리며 ‘유년의 재철’을 바다로 떠나보내고 ‘비구 법정’으로서의 출발점에서 수행자의 길을 가겠다는 다짐을 하고 또 했을 것이리라.

정찬주 소설가는 효봉암에서의 법정스님의 행자시절 사연을 전하고 있다. “효봉암터도 좌선대처럼 뒤에 병풍처럼 바위가 둘러서 있다. 암자터 입구에 효봉스님이 심었다는 동백나무가 한 그루 자라고 있고, 여름철에 효봉스님과 법정스님이 등목을 했다는 돌샘은 그 뒤에 있다. 고개를 숙이고 들여다보니 지금은 물이 말라 샘의 구실을 못하고 있는 듯하다.”

효봉암터 돌샘은 산초나무와 잡목에 우거져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샘에서 물도 나오지 않는다고 미래사 주지 여안스님이 말했다. 몇 년 전 위에 통행로를 내면서 물줄기가 잘라져 버려서라고 추측했다. 효봉스님과 법정스님과의 아름다운 추억이 말라버린 듯해 안타까웠다. 그 돌샘과 관련된 법정스님의 잊지 못할 에피소드도 정찬주 소설가는 기록하고 있다.

“행자 법정은 바로 이 돌샘 때문에 평생 등에 질 무거운 짐을 다 져본 것 같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돌샘 주변을 정비하기 위해 통영 시내에서 시멘트 두 포대를 사 지게에 지고 산을 오른 일이었다. 당시는 미래사를 오려면 용화사를 거쳐 오는 산길밖에 없었다. 통영 시내에서 용화사까지는 이십 리. 다시 용화사에서 미래사까지는 오리 길이었다.

행자 법정은 시멘트 두 포대의 무게 때문에 용화사까지 와서 더 이상 걷지 못했다. 다리가 후들거려 주저앉고 말았다. 태어난 이후 가장 힘든 지게질이었다. 그러나 누가 대신 져 줄 무게가 아니었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무게였다. 결국 행자 법정은 용화사부터는 한 포대씩 져 날랐다.”

법정스님은 출가하기 전 사촌동생인 박성직씨에게 보낸 편지(1955년 목포를 떠나기 전날 밤)에서 “산으로 돌아가면 한층 분발해서 가족을 등지고 출가한 보람을 하루 속히 성취하기에 애쓰련다.…(중략)…고난을 겪는 사람은 행복하게만 사는 사람보다는 훨씬 인생에 대해서 경험이 많아서 자신이 생기고 또한 생활에 대한 저항력도 길러지는 것이다. 누구보다도 인생에 대해서 심각하게 체험한다는 것이다. …(중략)…마음에 따르지 말고 마음의 주인이 되어라.”

효봉암터 아래에는 ‘訥菴(눌암)’이라는 암자가 세워져 있다. 근자에 입적한 송광사 보성스님이 지눌스님과 효봉스님의 호인 ‘학눌’의 눌자를 가져와 ‘눌암’이라고 명명해 지었다고 한다. 훌륭한 효봉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행자생활을 시작한 법정스님. 동생 박성직 거사에게 한 말처럼 ‘스스로 마음의 주인이 되는 실천수행의 첫발’이 미래사에 녹아 있었다.
 

미래사 산내에 있었던 효봉암 암자터로 지금은 억세만 가득하다.
미래사 산내에 있었던 효봉암 암자터로 지금은 억세만 가득하다.
효봉암지 옆 돌샘터.
효봉암지 옆 돌샘터.
효봉암지 위에서 바라다 본 남해바다.
효봉암지 위에서 바라다 본 남해바다.

취재협조 : (사)맑고 향기롭게

통영=여태동 기자 tdyeo@ibulgyo.com

[불교신문3552호/2020년1월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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