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의 사진] ④ 지하스님의 ‘은사 스님 다비식’
[한 장의 사진] ④ 지하스님의 ‘은사 스님 다비식’
  • 박봉영 기자
  • 승인 2019.10.18 14: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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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 가마니 다비식…청빈하게 살다간 스님을 닮았다

수행의 상징 가운데 탁발은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사라진 불교의 전통이다. 탁발은 공식적으로 1960년대 금지됐지만 1970년대까지 존재했다. 1960년 속리산 법주사로 입산 출가한 원로의원 지하스님은 당시 탁발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평생의 지남이 된 은사 추담스님의 다비식도 잊을 수 없다. 반세기가 지난 옛 사찰의 생활과 풍속을 얘기하는 동안 지하스님은 때로는 깊은 생각에 잠겼고 때로는 희미하게 웃었다.

제자는 은사 스님의 마지막 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짚 가마니의 조촐한 다비식은 청빈한 수행자의 길을 보여준다. 치장하지 않았으나 크게 다가오는 다비식이다.
제자는 은사 스님의 마지막 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짚 가마니의 조촐한 다비식은 청빈한 수행자의 길을 보여준다. 치장하지 않았으나 크게 다가오는 다비식이다.

 

1   지하스님이 출가한 법주사는 200여 대중이 있었다고 한다. 결제철에도 100명을 넘어서는 사찰이 많지 않은 요즘과는 꽤나 다른 모습이다. 당시엔 포교랄 것도 없었다고 한다. 정기적인 법회가 열릴 수가 없었다. 깊은 산 속의 사찰은 오로지 수행도량이었다. 

모두가 배고프던 시절이었다. 법주사 대중은 탁발을 나가는 날이 많았다. 신도가 많지 않았고 시주로는 감당해낼 수 없었다. 탁발을 하지 않으면 그 많은 대중이 살기에는 양식이 턱없이 모자랐다. 보은은 물론 대전, 청주 등 인근 도시로도 모든 대중이 탁발을 나갔다. 글씨를 잘 써 종무소에서 서기 소임을 맡았던 지하스님은 절에 남았다. 큰 절에 혼자 남으면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법당에서 목탁을 들고 두려움을 이겨냈다고 한다.

그나마 법주사는 전답이 많아 나은 편이었다. 평년에는 쌀 100가마니 가량 수확했다. 3년이 멀다하고 흉년이 들었다. 그럴 때는 30가마니도 얻기 어려웠다. 탁발이 일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바랑에는 쌀과 보리, 잡곡을 담을 작은가마니가 여러개 들어갔다. 저마다 바랑을 가득 채워 저녁 때가 되면 절로 돌아오곤 했다.

울진 불영사에서 ‘초발심자경문’을 접하고 출가를 결심한 지하스님은 속리산 법주사까지 걸어서 왔다. 이렇다할 교통편도 없었고 한적한 시골에서는 자동차를 볼 일도 없었다. 법주사에서 은사 추담스님을 만났다.

추담스님은 1960년 창간한 불교신문의 초대 주간을 지내고, 금산사 주지와 전북종무원장, 법주사 주지와 충북종무원장, 총무원 교무부장, 감찰위원, 법규위원, 중앙종회 부의장, 원로원 의원 등을 지내는 등 조계종사에 한 획은 그은 인물이다. 

불교정화에 큰 공을 세웠던 은사 스님의 행적은 지하스님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동국대 종비생 1기로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다시 은사 스님을 시봉하며 출가수행자의 길을 배웠다. 하지만 은사 스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고 1976년 소요산 자재암에서 입적했다. 
 

추담스님의 다비식을 엄수한 대중들이 스님의 사리를 수습하고 있다.

2   은사 스님의 영결식과 다비식 사진을 살피던 스님은 옛 다비식의 장엄함을 언급하며 요즘의 다비식이 형식에 치우치는 면이 있다고 아쉬워했다. 한 생을 마감한 수행자의 마지막 길에서 모든 수행자들이 함께 염불하며 진심으로 추도하던 옛 다비식 풍경이 지금은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다비식 외형도 많이 바뀌었다. 추담스님의 다비식은 옛 다비식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었다. 짚더미와 가마니가 그대로 노출된 다비장, 화려한 연꽃으로 장엄하는 지금과는 많이 다르다.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은 소박한 다비식이야말로 생을 마감한 수행자를 닮았다. 

지하스님은 과거의 다비장을 기억으로 재연했다. 법구가 놓일 자리에 열십자 모양의 도랑을 파고 그 안에 기름을 가득 채운다고 했다. 굵은 통나무로 바닥을 고 법구가 놓일 자리를 만든 뒤 차곡차곡 나무를 쌓았다. 다시 그 위는 짚더미를 쌓아 가마니와 멍석으로 감싼다. 어떠한 장식없이 청빈하게 치르는 검소한 다비다. 이 생의 공부가 다비장에 담긴다고 했다.

사실 지하스님은 다비장 사진 보다 청담스님, 덕산 이한상 거사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너무 오래된데다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 삶을 살다보니 사진을 제대로 간직하지 못해 찾질 못했다고 했다. 청담스님은 추담스님과 함께 불교정화를 이끌었던 어른이다. 추담스님은 지하스님을 청담스님의 비서실장으로 보냈다. 불교정화를 이끌던 청담스님 곁에서 조계종단을 위해 헌신한 원력보살을 보았다. 청담스님이야말로 지금의 조계종을 일으켜세운 어른이라고 회고했다. 

덕산 이한상 거사에 대해 물었다. 오랜 기간 불교신문 사장을 지낸 덕산 거사는 조계종의 재정을 책임진 한 축이었다고 했다. 종단으로 출범했으나 그 틀을 미처 갖추지 못한 조계종은 당시 늘 재정의 압박을 느꼈다.

탁발을 하며 살 정도로 어려운 사찰에서 분담금을 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했기에 중앙의 재정은 따로 만들어야 했다. 기업가이기도 했던 덕산 거사가 조계종의 재정을 거의 책임졌다고 했다. 대처승과의 법적 소송비, 종단 운영비까지 모두 덕산 거사의 몫이었다. 청담스님, 덕산 거사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고 싶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인천=박봉영 기자 bypark@ibulgyo.com

[불교신문3527호/2019년10월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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