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60주년 맞이 특별기획
불갑사 만세루에 칸막이 놓고 교실…불교 첫 대안학교

20대의 나이에 영광 불갑사 주지로 부임한 지선스님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배움터 ‘연실보타원’을 사찰에 열었다. 최초의 불교계 대안학교였다. 연실보타원의 명성이 알려지자 학생들을 격려방문한 도지사 일행과 이를 지켜보는 지선스님(왼쪽). 만세루에 칸을 막아 만든 교실과 빡빡머리 학생들의 모습이 눈길을 끈다.
20대의 나이에 영광 불갑사 주지로 부임한 지선스님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배움터 ‘연실보타원’을 사찰에 열었다. 최초의 불교계 대안학교였다. 연실보타원의 명성이 알려지자 학생들을 격려방문한 도지사 일행과 이를 지켜보는 지선스님(왼쪽). 만세루에 칸을 막아 만든 교실과 빡빡머리 학생들의 모습이 눈길을 끈다.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고불총림 방장 지선스님. 민중과 함께 하고자 했던 원력보살의 모습을 보여준 어른으로 이름이 높다. 불교가 살아있음을 증명하고자 나선 길, 민주화 시위 현장에 서 있던 투사 지선스님의 모습은 국민들의 뇌리에 오래 각인돼 있다. 

지선스님은 중학생 때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가출했다. 1961년의 일이다. 혼인계로 모아둔 쌀을 팔아 차비를 만들었다. 가출은 탈출구였다. 친구 2명과 함께 무작정 집을 나선 소년은 광주행 버스가 아닌 하루 두 번 뿐인 백양사행 버스를 탔다. 함께 온 친구 하나가 집에 가고 싶다며 훌쩍였다. 그런 그를 잡을 생각은 없었다. 

갈참나무가 길게 늘어선 백양사 입구. 참으로 멋졌다. 나무를 떼고 살던 시절이었기에 대부분의 산은 민둥산이었다. 하지만 백양사는 달랐다. 백양사가 관리하는 사찰림은 거대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절이 없으면 숲도 없던 시절이었다. 대웅전에서 흘러나오는 사미승의 고운 염불소리를 들으니 출가해야겠다는 마음이 일어났다. 그 길로 백양사 출가승이 됐다.

수학여행 오는 학생들이 절에서 숙박을 했다. 방장 스님과 주지 스님을 제외한 모든 대중의 방을 그들에게 내줘야 했다. 한때 음식점과 숙박시설이 사하촌을 점령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그런 사찰이 적지않다. 하지만 1960년대는 그 이전의 일이다. 사찰이 이를 도맡았다. 다음날 도시락을 싸서 보내는 일까지 절일은 해도해도 끝이 없었다. 

사중의 모든 대중이 큰 방에 모여서 잤다. 새벽 2시면 하루가 시작됐다. 새벽예불, 참선, 아침공양, 경전공부, 운력이 반복됐다. 불교전문강원 경전반에 있다가도 뛰어나가 일손을 도와야 하는 날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대학생 불자들도 백양사에 왔다. 그들을 보며 외전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1972년 재적승회의를 통해 영광 불갑사 주지로 발령됐다. 절이 빚더미에 오르고 폐허나 다름없는 상태였던 불갑사를 정상화시키라는 소임이 주어진 것이다. 불갑사에 가니 건물은 다 허물어져가고 절마당은 풀이 무성했다. 

불갑사는 소유 전답이 많았다. 이 전답 대부분을 소작으로 내주고 있었다. 대부분 5년에서 10년까지 소작료가 밀려있었다. 가진게 없어서 못낸 이들도 있었지만 일부러 내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이들을 찾아다니며 밀린 소작료를 내달라고 하소연했다. 대부분 자녀들이 있었는데 학교를 보내지 못하는 형편들이었다. 

소작료를 받으러갈 때마다 지켜보고 있었다. 불갑사에 돌아오면 ‘이러려고 출가했나’하는 생각에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소작농 자녀들의 눈에 불교와 사찰이 수탈자로 보일 것이 뻔했다. 다른 방도를 찾아야 했다.

지선스님은 가난한 소작농 자녀들을 위해 학교를 열기로 했다. 불교가 이들을 끌어안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세루에 칸을 막아 교실을 만들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연실보타원이다. 학위는 인정되지 않지만 일종의 대안학교와 같은 배움터였다. 인근의 함평, 장성, 담양까지 공고문을 붙였다. 1974년, 첫 해 모인 학생이 열댓명이었다. 이듬해엔 70명이 모여들었다.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교사를 하겠다고 찾아온 이들도 12명이나 됐다. 

이 지역 중학교에서는 항의를 했다. 학생들이 전부 불갑사로 가버려서 학생이 없다며 선별해서 받아달라고 요청했다. 불갑사 대중은 교사들과 학생들을 챙기느라 병이 날 지경이었다. 일손을 거들러 불갑사로 왔던 지선스님의 속가 모친이 뒷바라지를 하느라 병이 나 돌아가시는 일까지 생겼다. 연실보타원이 점점 명성이 높아지자 전남도지사, 영광군수, 지역 인사들이 학용품을 비롯한 갖가지 물품을 들고 불갑사를 찾았다. 학생들의 학예발표회는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울고 웃는 축제 같았다.

지선스님은 “연실보타원 학생들을 보면서 자비로써 중생의 괴로움을 없애고 즐거움을 주는 발고여락(拔苦與樂)의 현장을 보는 것 같았다”며 “우리 불교가 앞으로 해야할 일이 이런 일이구나 하는 생각에 신심이 절로 났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연실보타원은 3년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당시 종단 상황으로 인해 종정 서옹스님을 모시기 위해 불갑사를 떠나면서 연실보타원은 이어지지 못했다. 지난달 서울 도선사에서 법문하다가 연실보타원에서 공부했다는 불자를 만났다. 이제 중년이 된 그 불자는 지선스님에게 “감사하다”며 연신 눈물을 쏟아냈다. 출가수행자로서 사명감으로 열심히 살았던 젊은 날이 헛되지 않은 것 같아 불전에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불교신문3517호/2019년9월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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