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60주년 맞이 특별기획’
천년사찰의 나이테 부도밭

산비탈 때문에 더 뒤로 갈수 없었다. 남아 있는 부도 모두 소중해 화면에 모두 담았다. 이로 인해 넓게 보이는 렌즈를 사용해 아래쪽에 위치한 부도들은 작게 보인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아래 6기의 부도는 그 자리에서 좀 더 확대해서 신문에 기재한다.

 

살펴볼수록 궁금증이 생기는 공간이 있다. 10여 년 전 처음 만났던 보림사가 그랬다. 일주문 역할을 하는 단출한 외호문은 만든 짜임새는 빼어나지만 문이 작고 좌우로 담장을 거느리고 있다. 확정성을 지닌 열린 산문보단 영역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보루 같다.

보림사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 지금의 모습이 이해된다. 하지만 잃어버린 퍼즐 조각이 너무 많아 상상의 힘을 보태야 흐릿하게나마 가람의 윤각을 그릴 수 있다.

보림사는 이른바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하나다. 구산선문은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초기에 번창한 선종(禪宗)을 대표하는 9개의 문파를 말한다. 보림사는 이 가운데에도 가장 먼저 선종을 깃발을 세웠던 가지산문(迦智山門)의 핵심도량이다. 그만큼 오랜 역사를 지닌 통일신라 말의 대찰로 시작했다.
 

일주문의 역할을 하는 외호문. 6·25전쟁의 화마에도 견뎌냈다.

긴 세월 동안 여러 번의 중창을 거처겠지만, 20여동에 이르렀던 전각은 6·25전쟁을 때 외호문과 사천왕문만 제외하고 모두 소실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보 제44호 보림사삼층석탑과 석등을 비롯하여 국보 제117호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 제115호 보림사동부도, 보물 제156호 보림사 서부도, 보물 제157·158호인 보조선사 창성탑 및 창성탑비, 보물 제1254호 목조사천왕상 등 수많은 성보를 지니고 있어, 스스로 그 위상을 증명하고 있다.

보림사 참배객들도 동부도를 보지 못한 이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동부도는 외호문을 밖에서 바라봤을 때 오른쪽 산기슭에 있어 사찰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보림사 사천왕상은 현존하는 천왕문 목조사천왕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임진왜란 이전에 조성되었다. 그 뒤로 국보로 지정된 삼층석탑과 석등이 보인다.

가장 위에 자리 잡은 부도가 보물 제115호.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되었지만 고려 전기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탑신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3단의 기단을 두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얹었다. 3단으로 된 기단에 연꽃잎을 둘러 새기고 각 귀퉁이마다 꽃장식이 있다. 가운데는 8각의 기둥을 낮게 두었다.

탑신은 한 면에만 자물쇠가 달린 문짝 모양을 새겼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중간에 둥근 기둥을 세우고, 위아래를 나누어 장식하였는데, 그 완전함만큼이나 조성당시 세심한 정성을 기울인 흔적이 보인다. 그 아래로 6기의 부도가 남아 있다. 6기의 부도 가운데는 탑신에 ‘향산운파당’과 ‘지봉당’이라 새겨진 부도도 있다.

보물 제115호로 지정된 동부도의 주인은 누구지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 남아 있는 7기의 부도 모두 신라 말에서 조선시대까지 가지산 보림사를 지킨 선지식들의 흔적이다. 널게 자리한 여러 단의 구성과 남아 있는 부도들의 위치를 고려했을 때, 원래는 상당히 많은 부도들이 오랜 시간 함께했을 것이다. 남아 있는 부도들과 사라진 부도들, 보림사 동쪽 부도들을 보고 있으면 이 가람의 역사가 보이는듯하다.    

사진·글=신재호 기자 air501@ibulgyo.com

[불교신문3512호/2019년8월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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